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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신풍루
 화성행궁 신풍루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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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2대 왕 이산 정조. 그는 세종대왕과 더불어 조선시대 가장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대왕 하면 '훈민정음'인 것처럼 정조 하면 꼭 따라붙는 게 있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화성행궁'이다.

'행궁(行宮)'은 임금이 지방에 갈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과 휴양, 혹은 능원 등에 참배하기 위해 마련한 '임시궁궐'이다. 행궁은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안에 있는 광주부행궁은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난을 피하고 국사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한 행궁이다. 온양행궁은 왕이 병을 치료하거나 휴양을 하기위해 지은 행궁이다.

화성행궁은 왕이 지방에 있는 능원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다. 하지만 정조에게 화성행궁은 단순한 '행궁'이 아니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화성행궁에 꽂혀서 지금도 화성행궁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김준혁 박사(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화성이 정조의 새로운 고향이라고 말한다. 지난 18일 오전, 김준혁 박사를 만났다.

김준혁 박사
 김준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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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풍루 보이죠? 이곳이 화성행궁의 정문인데,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했어요. 정조가 신풍루(新豊樓)라고 바꾼 것이지요. 신풍루는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고향 풍패(豊沛)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조가 화성을 고향처럼 여긴다는 뜻이지요. 수원 백성들이 나의 팔과 다리요 수원이 나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의미로 '신풍'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지요."

김준혁 박사는 정조 연구가다. 석사·박사 학위 논문 모두 정조를 연구한 결과물이다. 책도 이미 4권(<이산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 하다> <정조의 혼, 화성을 걷다> <알기쉬운 화성 이야기>)이나 썼다.

그가 정조에 꽂힌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 들었다.


"저한테 왜 정조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정조 때 와서 국가가 내놓는 정책, 국왕의 이야기 이런 것들을 반포할 때 반드시 언문 즉 한글로 같이 만들어서 발표를 했어요. 백성들이 알아야 된다는 거지요. 그 이전까지는 우민화 정책을 많이 했어요.


공부는 사대부가 하는 것이고 백성은 알 필요가 없다는 거였는데 정조는 그게 아니었어요. 백성들이 많이 알아야 하고, 많이 알려면 읽어야 되는 것이고, 읽게 하기 위해서 언문 본을 만들어서 동시에 같이 내놓은 것이지요. 기존의 기득권 세력을 대체하는 새로운 신진세력들이 성장하고 백성들이 자기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이지요. 이렇게까지 깊이 고민한 인물이 정조입니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정치적' 이유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이유는 잘 알려진 대로 현륭원과 화성행궁을 호위하기 위함이다. 현륭원(顯隆園)은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경의왕후, 즉 혜경궁 홍씨의 무덤이다. 효심이 깊은 정조는 즉위한 지 13년 만인 1789년에 명당이라 알려진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로 사도세자 무덤을 옮긴 후 현륭원이라 이름 지었다.

김준혁 박사는 여기에다 정치적인 이유를 한 가지 덧붙였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이유가 잘 알려진 대로 아버지 무덤을 보호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는 것.

"화성을 건설한 첫째 이유는 현륭원을 보호하고 화성행궁을 호위하기 위함입니다. 아버지 무덤이 수원에 있으니까 무덤을 훼손하는 사람을 막겠다는 뜻입니다. 또 한 가지는 성에 군사를 두고 화성행궁을 호위하기 위함인데, 이것이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역모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기를 지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정조가 개혁 정책을 추진할 당시, 기득권 세력의 힘이 굉장히 컸어요. 아버지를 죽인 세력도 그들이었고, 정조가 즉위한 뒤에 자객을 보내기도 했어요. 정조 즉위 1년인 1776년에 자객들과 금군들이 동원돼서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거든요.

그 뒤에도 정조는 수시로 역모사건을 겪었고, 아들이 독살되는 사건까지 겪었어요, 물론 명확하게 독살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호적상의 아버지였던 효장세자도 독살되었고, 생부는 뒤주에 갇혀 죽었고, 기득권 세력의 힘이 말도 못할 정도로 대단했던 것이죠."

정조는 이 세상을 뜨기 28일 전에 그의 신하 서유린에게 화성을 건설한 진짜 이유를 밝힌다. 서유린은 1766년(영조 42)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장원한 후, 정조 때까지 벼슬을 한 문신이다. 김준혁 박사는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진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정조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화성 유수였던 서유린을 불렀어요. 물었죠, 내가 화성을 건설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서유린은 대답을 못합니다. 그러자 정조가 말하길, '화성을 만든 목적은 실제 따로 있다. 농업 활성화 같은 다양한 정책들을 화성에서 만들어서 실험하고 성공시켜 전국에 8도에 보급해서 새로운 조선을 만들겠다'고. 그러니 너는 더 열심히 하라고, 그러고 나서 28일 뒤에 돌아가신 거죠."

서울은 주상의 수도로, 수원은 상왕의 수도로

수원 화성
 수원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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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 말대로라면 정조는 화성에 눌러앉을 생각을 했던 것. 그렇다면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려고 한 것일까. 그건 아니다. 정조는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 준 후, 화성에서 대리청정하려 했다고 김준혁 박사는 말한다. 정조는 그의 아들 순조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대리청정을 하려 했다. 말하자면 서울은 주상의 수도, 수원은 상왕의 수도로 만들려 했다는 것.

정조가 대리청정을 계획한 이유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왕위를 물려주고 순조가 왕이 되면 즉위식 날 혹은 다음날 자기 할아버지였던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기가 직접 하지 않고 아들을 통해 아버지 사도 세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려 했던 걸까? 김준혁 박사에게 그 이유를 들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왕으로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1775년에 영조가 세손이었던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때 동궁이 왕이 된다 하더라도 선 세자(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지 말라고 교지문에 써버렸기 때문이죠. 정조는 영조와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인 순조에게 그 일을 맡기려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정조가 아버지 사도 세자 명예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효심이 지극해서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뭔가 부족하다. 김준혁 박사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사도세자가 국왕으로 추존되는 건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정통성을 세우는 것이죠. 사도세자는 역적으로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정조는 늘 정통성 문제로 공격을 받았어요. 신하들이 늘 '역적의 아들인데' 이랬던 거죠. 조선은 명분을 갖고 싸우던 시대니까요.

영조가 정조를 큰아들이었던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켰지만 그건 눈 가리고 아웅 한 것이죠. 그래서 정조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켜서, 즉 아버지를 국왕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정통성을 회복하려 한 것이죠. 그래야 개혁정치를 하는 명분도 확실해지고……."

정조 정책 가장 많이 따른 사람은 고 노무현 대통령

김준혁 박사
 김준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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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 박사에 따르면 정조의 개혁 정책은 크게 4가지다. 정조는 즉위하면서 자신이 실천할 4가지 과제를 천명했다. 요즘 말로 하면 공약이다.

첫 번째는 백성들이 모두 다 부유해져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를 위해 인재를 육성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자주국방을 이룬다는 것이고 네 번째는 국가 재정을 안정시킨다는 약속이다.

그 중 자주국방 정책을 눈여겨 볼만하다. 정조는 쓸모없는 군인이 너무 많다며 군대를 구조조정해서 엘리트 군인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무과 시험을 통해서 제대로 된 무관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 요즘 말로 하면 의무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바꾸자는 말이다.

정조의 개혁 정책을 가장 많이 따른 사람이 고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김준혁 박사는 말한다. 그래서 그가 다음에 쓸 책 주제는 '정조와 노무현'이다. 이미 자료 조사를 다 끝냈다고 하니 곧 나올 모양이다. 머지않아 그 책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잠시 가슴이 들떴다. 도대체 고 노무현 대통령이 정조의 어떤 점, 어떤 정책을 본뜬 것일까.

고 노무현 대통령이 행정 수도를 세종시로 옮기려 했던 일, 그게 바로 정조의 정책을 본 뜻 것이라고 김 박사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세종시는 정조의 화성에서 따갖고 간 게 분명합니다. 정조가 화성을 키우려 한데는 당시 집권층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던 이유도 있어요. 당시 노론 세력들이 서울을 다 잡고 있었어요. 그래서 정조는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신흥 상인들을 대대적으로 육성했던 것이죠. 정치와 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니... 그건 요즘이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시대 사람 사는 모습과 요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전혀 다를 게 없어요. "

얘기인 즉, 고 노무현 대통령도 기득권 세력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세력을 키우기 위해 행정수도를 세종시로 이전시키려 했다는 것인데... 사실일까?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무래도 앞으로 김 박가사 펴낼 책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태그:#수원 화성, #김준혁, #정조,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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