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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닥터 진>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범수 분).
 MBC 드라마 <닥터 진>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범수 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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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을 다룬 사극에서 거의 예외 없이 공통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흥선'대원군'이 되기 이전, 그러니까 흥선'군' 시절 이하응의 모습이다. 아들인 고종을 왕으로 만들기 이전의 이하응은 전형적인 천덕꾸러기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MBC <닥터 진>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다. 5월 27일 제2부에서는, 이하응(이범수 분)이 고위층 인사들 틈에서 술을 얻어먹다가 수모를 당하는 모습이 나왔다. 동석자가 안주를 연못에 던지고, 이하응이 얼른 뛰어들어 건져 먹는 장면이었다. 똥개 훈련시키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드라마 속의 시정잡배들도 이하응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늘날로 치면 조폭 행동대원밖에 안 되는 사람들도 이하응을 아주 하찮은 존재인양 취급하고 있다. 지난 10일 제6부에서는 그런 시정잡배가 이하응에게 깨진 바가지를 던지는 장면이 나왔다. 재수 없다고 바가지를 던진 것이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항상 이렇게 묘사되기 때문에, 우리는 흥선군 시절의 이하응이 아주 비참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인지, 학자들의 명의로 정리된 인터넷 백과사전들에서도 이하응은 어김없이 천덕꾸러기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어딘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고귀한 왕족이 하층민 대우를 받다가 어느 날 갑자기 대원군(임금의 아버지)이 되어 권력을 독점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이처럼, 고귀한 자가 시련을 겪다가 정상에 올라서는 내용은 영웅담의 단골 스토리가 아닌가? 전형적인 소설 기법이 아닌가?

이상한 구석은 이뿐만이 아니다.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던 인물이, 아들이 왕이 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을까? 영구나 맹구 같던 인물이 갑작스레 국정의 중심에 서서 개혁을 추진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까?

사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하응의 이미지는 거의 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1863년에 고종이 왕이 되기 이전에 그가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지 판단하려면, 기존의 선입견을 모두 버리고 사료 속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이하응의 행동은 모범적이었다

 운현궁 내의 유물전시관에 보관된 이하응의 모습.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소재.
 운현궁 내의 유물전시관에 보관된 이하응의 모습.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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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즉위하기 11년 전인 철종 임금 때였다. 소설이나 드라마대로라면, 이하응이 한창 치욕과 수모를 당하고 있어야 할 시기다. 그런데 이런 선입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철종 3년 7월 10일자(1852년 8월 24일) <철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상소문이 담겨 있다.
"종친(임금의 친족)들이 한결같이 남연군·흥인군·흥선군을 본받도록 하소서."

남연군은 이하응의 아버지이고, 흥인군은 형이다. 상소문을 작성한 사람은 홍문관 부교리(종5품) 김영수다. 홍문관은 엘리트 선비들이 포진한 학술 기관으로서 선비들의 여론을 임금에게 전달하는 기관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 상소는 흥선군 3부자에 대한 선비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김영수가 '흥선군을 본받도록 하소서'라고 상소한 것은 이하응의 행동이 모범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종친의 신분을 남용하는 일부 왕족과 비교할 때 흥선군은 아주 적절하게 처신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상소에서 나타나는 것은, 세상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 조심하는 이하응의 모습이다. 이것은 존경받을 만한 행동이지, 결코 무시 받을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이런 행동의 소유자한테, "받아먹으라!"며 안주를 연못에 던질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당시 사람들이 이하응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는 점은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도 나타난다. 구한말의 정치상황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의 권1에 따르면, 흥선군의 집인 운현궁에 왕기(王氣)가 떠돈다는 소문이 이미 철종 때부터 널리 퍼졌다고 한다. 운현궁은 서울 안국역과 종로3가역 인근에 있고, 광화문에서 도보로 20분 거리다.

유사한 소문은 또 있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철종 초기에 "관상감(기상청)에서 성인이 나실 것"이란 민요가 유행했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현대건설 본사 부근도 관상감 자리였지만, 한때는 운현궁도 관상감 자리였다. 

<매천야록>에서 말하는 관상감 자리는 운현궁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관상감 자리에서 성인이 나실 것'이라는 유행가는 '운현궁에 왕기가 떠돈다'는 소문과 같은 맥락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하응 집안에서 차기 대권주자가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진 상황에서, 과연 시정잡배들이 그를 함부로 다룰 수 있었을까? 시정잡배들은 물론이고 고위층 인사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운현궁 입구
 운현궁 입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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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하응이 한때 불우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왕이 되지 못한 종친은 대개 다 마찬가지였다. 이하응과 여타 종친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오십보백보에 불과했다. 이하응이 '좀더' 불우했을 뿐이다.

이 같은 이하응의 시련은 상당부분은 그 자신의 작품이었다. 그는 철종 임금이 후계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철종의 6촌인 자신이 주목을 받자, 세상의 견제를 피하고자 일부러 불량배들과 어울리는 등의 파격적 행동을 일삼았다. 요즘으로 치면, 차기 대권의 향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유력 인사가 일부러 조폭 두목과 골프를 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행보를 걷는다 하여, 면전에서 그를 비웃고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됐을까? 뒤에서 수군댄다면 모를까, 바로 앞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흥선군 시절의 이하응을 판단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그가 종친 중에서도 일종의 '성골'이었다는 점이다.

제21대 영조 임금이 죽은 뒤로 조선의 왕권은 사도세자의 후손들에 의해 독점되었다. 사도세자는 의소세자·정조·은언군·은신군·은전군이라는 다섯 아들을 두었다.

사도세자의 둘째아들인 제22대 정조로부터 제23대 순조(사도세자의 손자)와 제24대 헌종(4대손)이 나왔다. 헌종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셋째아들인 은언군 쪽에서 제25대 철종(3대손)이 나왔다. 철종 역시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넷째아들인 은신군 쪽에서 제26대 고종(4대손)과 제27대 순종(5대손)이 나왔다.

이처럼 18세기 후반부터 조선의 왕통이 사도세자의 후손들에 의해 독점되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이하응은 일반 종친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성골 신분이었다. 이런 인물이 드라마나 소설에서처럼 하찮은 대우를 받았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 

또 이하응이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했다는 점은, 그가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직접 권력까지 행사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만약 그가 권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물이었다면, 권력의 전면에 나서서 그처럼 단호하게 개혁을 추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 이하응은 왜 천덕꾸러기?

 운현궁 노안당에 앉아 있는 이하응(밀랍인형).
 운현궁 노안당에 앉아 있는 이하응(밀랍인형).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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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하응이 우리 머릿속에서 천덕꾸러기 이미지를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 시작은 1930년대 조선일보에 연재된 김동인의 장편소설 <운현궁의 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하응을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은 <운현궁의 봄>은 흥선군 시절의 이하응을 아주 초라하게 묘사했다. 이 작품에는 이하응을 '상갓집 개'로 표현한 구절이 17회나 나온다. 같은 뜻의 한자어인 상가구(喪家狗)라는 표현까지 합하면 총 18회다. 그중 한 구절은 이러하다.

"상갓집 개와 같이 가는 곳마다 구박을 받는 이 공자는, 그래도 행여 구박하지 않는 고마운 세가(권세가)가 있지 않나 하여, 대목의 바람 찬 거리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김동인은 상갓집 개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의 뇌리에 '상갓집 개'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함으로서 흥선군 시절의 이하응에게 천덕꾸러기 이미지를 부여했던 것이다.

덕분에, 이하응은 '고귀한 혈통으로 태어나 시련을 겪다가 정상에 올라선다'는 전형적인 영웅의 이미지를 갖추게 되었다. 김동인 때문에 체면은 구겼지만, 덕분에 영웅의 반열에 올라선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흥선군 이하응' 하면 아주 불쌍한 사람을 연상하는 것은 이처럼 문학작품의 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들뿐만 아니라 학자들까지도 그 같은 이미지를 아주 당연시하고 있으니, 문학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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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