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말이라고 했다. 앞으로 2주 뒤면 아버지는 20년 넘게 근무해온 직장에서 은퇴하게 된다. 집 밖에 나와 사는 탓에 무관심했던 나는, 아빠의 퇴직이 가까웠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코앞으로 다가온 줄은 미처 몰랐다. "딸, 잘 지내? 아빠 안 보고 싶어?"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가 늘 밝았던 탓도 있다. 하지만 잠들기 전 엄마와 통화하면서 아버지가 요즘 들어 부쩍 생각이 많아지셨다는 얘길 들었다. 뒤늦게 아차 싶어 아빠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조심스레 퇴직이 언제인지, 퇴직하고 나면 뭘 할 건지 물었다. 약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돌아온 대답. "그러게, 아직 마땅한 계획이 없네. 딸, 아빠 퇴직하면 뭐하지?"

고령화시대, 갈 곳 없는 이 땅의 아버지들

그래서 더욱 관심이 갔다. 10일 저녁 8시에 방송된 KBS 스페셜 '위기의 베이비부머, 퇴직쇼크' 편에서는 아빠와 같은 '베이비부머(Baby boomer)' 세대의 위기와 대안을 다뤘다. 내내 무관심했던, 자주 전화도 안 하는 못난 딸이었던 게 마음에 걸려 방송으로라도 퇴직을 앞둔 아빠의 마음이 어떤 건지 짐작해보고 싶었다. 한국 전쟁 직후 태어나 80년대 한국 사회의 성장을 이끈 주역이면서 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까지, 쉽지 않은 시기를 모두 겪어낸 세대. 700여만 명으로 추정되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앞둔 '집단적 은퇴'는 이제 더 이상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후를 맞이할 준비도 무방비일 뿐더러, 이들을 흡수할 사회적 안전망도 전혀 정비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둔 사람들의 심리적 압박은 상상을 초월한다.

은퇴를 앞둔 사람들의 심리적 압박은 상상을 초월한다. ⓒ KBS


방송은 퇴직을 앞둔 사람들의 하루 일과를 따라가며 진행됐다. 내레이션도 그들의 입장에서 직접 이야기하는 듯 흘러나온다. 평생을 일 해온 회사에서 조기퇴직하게 된 53세 이중모씨. 그는 당장 필요한 생활비와 자녀의 교육비를 벌기 위해 재취업을 꿈꾸지만 쉽지가 않다. 이 씨는 "5년 후 국민연금 탈 때가 될 때까지 4~5년의 간격을 어떻게 해서든 메꿔야 한다"고 했다. 얼마 전 은퇴한 58세 이규학 씨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특히 자신을 비롯한 베이비부머 세대가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이 씨는 이어 "언젠가 돈만 된다면 젊은 사람들 안 쓰고 오십세 넘은 사람들로만 회사를 꾸려보고 싶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라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은퇴를 앞둔 한국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섰다.

은퇴를 앞둔 한국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섰다. ⓒ KBS


'퇴직쇼크' 먼저 경험한 일본에게서 배우는 지혜

은퇴 후 재취업을 위한 교육은 물론, 제대로 된 관련 제도조차 만들어져 있지 않으니 나이들수록 가난해지는 것도 당연지사. 경제협력기구(OECD)는 작년 3월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 65세 이상 고령자의 빈곤율이 회원국 중 가장 높다는 사실(45.1%)을 발표했다.

그렇다면 이웃나라 일본은 어떨까. 한국보다 10년 정도 앞서 비슷한 일을 경험한 일본에서는 고용연장 의무화 법률을 시행하는 등 정부 주도하에 민간, 기업이 함께 해결책을 찾아가고 있었다. 직원 40% 정도가 60세 이상인 '마이스터 60' 회사나, 15만개의 업체와 협력을 맺고 고령자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후쿠오카 70세 현역응원센터' 등이 좋은 예다. 이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한 야마다 히데(62) 씨는 "일본에는 월급을 적게 받더라도 (계속) 일하는 시스템이 정착됐다"고 말했다.

 은퇴 후 재취업을 국가에서 보장해주는 일본의 사례.

은퇴 후 재취업을 국가에서 보장해주는 일본의 사례. ⓒ KBS


반면, 재취업이 어려운 한국에서 퇴직자들은 대개 창업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현실이다. 2011년부터 창업시장엔 이미 조기 퇴직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OECD 평균의 2배인 62%에 달하고, 외환위기 이후부터 이미 공급 과잉에 빠진 상태다. 또한 창업 자금으로 퇴직금을 사용하는 것은 노후자금을 순식간에 잃을 위험이 있다. 방송은 이런 현실을 비판하면서, 실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창업을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저는 시간이 아쉽습니다. 회사에서 조금만 더 취직을 준비할 시간을 줬더라면…."

조기 퇴직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이중모 씨는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게 너무 늦지는 않았는지 두렵다"며 "가장이라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토로했다. 그는 퇴직 전 회사 다닐 때는 관련 정보는 물론, 이런 일에 대해 생각조차 안 했다는 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 했다.

 조기 퇴직 후 다시 구직 활동에 뛰어드는 베이비부머 세대

조기 퇴직 후 다시 구직 활동에 뛰어드는 베이비부머 세대 ⓒ KBS


그러나 아주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일본의 은퇴관련 정책에 대해 설명한 호세대학 교수 후지무라 히로유키 씨는 "한국의 경우 베이비부머 세대가 일본보다 10년 늦기에 지금부터 시작하면 준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5년 후도 너무 늦다면서 "2012년 지금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송 말미에는 60세 이상 고령자들을 사원으로 뽑는 한국의 제작․설비 업체, 65세에 다시 일자리를 찾은 김건태 씨 등 소수이지만 성공적인 사례들도 다뤘다. 이제는 기업 뿐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고령자들의 고용 촉진을 위한 대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재취업에 성공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65세 김건태 씨.

재취업에 성공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65세 김건태 씨. ⓒ KBS


며칠 뒤 다시 전화한 아빠는 한결 나아진 목소리였다. "은퇴 후가 걱정이긴 하지만 일단은  못했던 공부를 다시 하고 싶다"는 결론이었다.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던지, 아빠는 그새 근처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해 엄마와 함께 저녁마다 영어를 배우러 다니신다고 했다. 얼마 전 'daughter(영어로 '딸'을 뜻함) 뭐해?'라고 문자를 보낸 이유도 거기 있지 싶었다. 전쟁 후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중학교 때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든 아빠. 힘든 세월을 살아온 아빠를 비롯한 모든 대한민국의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은퇴 후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그저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해 버리기엔,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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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플러스 에디터. 여성·정치·언론·장애 분야, 목소리 작은 이들에 마음이 기웁니다. 성실히 묻고, 세심히 듣고, 정확히 쓰겠습니다. Mainly interested in stories of women, politics, media, and people with small voice. Let's fi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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