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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닥터 진>의 진혁(왼쪽, 송승헌 분). 사진은 드라마 제작발표회의 모습.
 MBC 드라마 <닥터 진>의 진혁(왼쪽, 송승헌 분). 사진은 드라마 제작발표회의 모습.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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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6일부터 MBC에서 <닥터 진>이라는 퓨전 사극이 방영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드라마의 스토리 구조가 얼마 전 종영된 SBS <옥탑방 왕세자>와 정반대라는 점이다.

<옥탑방 왕세자>는 대한민국에 환생한 조선 왕세자의 이야기를 다룬 데 반해, <닥터 진>은 조선시대에 환생한 대한민국 의사 진혁(송승헌 분)의 사연을 다루고 있다.

수술 장비가 든 가방 하나만 갖고 환생한 진혁은 19세기 조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칼과 망치를 환자 머리에 들이대는 치료 기법에 다들 경악과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혁은 죽을 뻔한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마취된 환자에게 '흉기'를 들이대는 진혁을 보고, 처음에는 다들 오해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경찰청 국장급보다 조금 높은 포도청 종사관 김경탁(김재중 분)은 그런 진혁을 죽이려고까지 한 적이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당연히 인정되는 의술이 200년 전 조선에서는 충격 그 자체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면서, 진혁은 자신이 조선 최초로 서양 의술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을 항상 의식하고 있다. 본의 아니게, 서양 의술의 전도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드라마 속 진혁의 역할을 실제로 수행한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다. 첫째 그룹은 조선에 들어와 의료선교를 펼친 서양 기독교인들이고, 둘째 그룹은 이 서양인들에게 배운 의술을 이 땅에 정착시킨 한국인들이다.

둘째 그룹의 대표 주자는 흥미롭게도 백정의 아들인 박서양(1887~1940년)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박서양은 서양인들과의 인연을 계기로 한국인 최초의 서양식 의사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인물이다. 

박서양, 진보적이고 세련된 인물

 김경탁(김재중 분).
 김경탁(김재중 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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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발행된 <의사학> 제15권에 실린 박형우·홍정완의 '박서양의 의료활동과 독립운동'이란 논문에 따르면, 박서양에게 서양식 의사의 길을 권유한 사람은 아버지인 백정 박성춘이었다.

박성춘은 꽤 진보적이고 세련된 인물이었다. 1895년에는 서른네 살의 나이로 지금의 서울 롯데호텔 부근인 곤당골교회(훗날의 승동교회)에서 사무엘 포맨 무어 선교사로부터 백정 최초로 세례를 받았고, 1898년에는 독립협회 주요 멤버로서 만민공동회에서 대중연설을 했다. 그는 은행가와 교회 장로로도 이름을 남겼다.

성춘(成春)이란 이름은 '봄을 이루다'란 뜻이다. 그가 이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세례를 받은 뒤에 그런 이름을 선택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봉건질서가 해체되던 구한말에,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봄'을 발견한 것이다. 

박성춘이 아들에게 서양 의술을 권한 것은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받은 따뜻한 대우 때문이었다. 1893년에 그가 장티푸스에 걸리자 무어 선교사는 의료선교사인 올리버 에비슨을 소개했고, 에비슨은 몇 차례에 걸쳐 박성춘의 집을 찾아가 치료를 해주었다.

당시 에비슨은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자 국립병원인 제중원(훗날의 세브란스병원)의 책임자였다. 박성춘은 그가 최하층 신분인 자기를 평등하게 대해주는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조선시대에 경상도 어느 지방에서는 백정 부녀자들의 치마를 벗기고 소나 말처럼 끌고 다니면서 그 위에 올라타는 백정각시놀음이란 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만큼 백정에 대한 차별이 당연시되었던 것이다.

그 부녀자들의 남편들은 고기를 바치고 빌지 않으면 아내나 딸을 돌려받을 수 없었다. 그들의 속이 얼마나 부글부글 끓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백정에 대한 차별이 이렇게까지 심했으니, 그들이 서양 선교사들의 따뜻함에 이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박성춘은 결혼식을 막 끝낸 10대 초반의 박서양을 에비슨에게 맡기기로 결심했다.

"박사님, 이제 제 아들놈을 장가보냈으니, 병원으로 데려 가셔서 사람 좀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때가 1890년대 끝자락이었다.

백정 출신, 최초의 '의술개업인허장'을 받다

 박서양. 사진 원본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은의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문의 사진은 <의사학> 제15권에서 따온 것이다.
 박서양. 사진 원본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은의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문의 사진은 <의사학> 제15권에서 따온 것이다.
ⓒ 대한의사(醫史)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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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슨은 처음에는 박서양에게 의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인간됨됨이를 보고자, 청소 같은 궂은 일만 시켰다. 박서양이 불평 없이 일을 해내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에비슨은 그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주었다.

1900년 8월 30일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한 박서양은 동기들 중에서 유난히 끈기 있는 모습을 보였다. 동기 여섯 명 중에서 세 명이 자퇴한 뒤에도 그는 끝까지 남아 1908년 6월 3일 제1회 졸업생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다른 졸업생들과 함께 최초의 '의술 개업 인허장'을 받았다. 의사 면허를 받은 것이다.

여기서 '최초'라는 것은, 확인된 기록에 의거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1899년 '의학교규칙' 및 1900년 '의사규칙'을 계기로 의료에 대한 국가관리가 이미 시작되었으므로, 박서양이 정부로부터 공인받은 최초의 서양식 의사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공식 기록상으로는 박서양과 그의 동기들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사들이다.

박서양은 졸업 후 모교 전임교수로 남아 서양의학의 토착화에 앞장섰다. 그는 1917년부터는 활동영역을 만주로까지 넓혔다. 그곳에서 병원도 열고 학교도 설립하고 독립운동에도 참여한 것이다. 그는 만주지역 최대의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에서 군의로 활약했다.

단순히 한국 서양의학의 원조로만 남지 않고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까지 참여했으니, 박서양은 제1회 졸업생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가장 천대 받는 백정 집안에서 태어나 그런 삶을 살았으니, 그가 남들보다 돋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구한말과 일제시대에는 박서양처럼 사회에 적극 참여하는 백정들이 많았다. 박성춘이 독립협회에 참여해서 열심히 활동한 것이나, 백정들이 형평사란 단체를 조직하여 인권운동도 벌이고 독립운동도 지원한 것은 당시 백정들의 활력적인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서양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소재. 박서양에게 서양의술을 전수한 에비슨 선교사의 부인과 아들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
 서양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소재. 박서양에게 서양의술을 전수한 에비슨 선교사의 부인과 아들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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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세계적 혼란, 백정에게 지도층 자리를 허락하다

초기 백정의 역사는 고려시대 초기인 10세기로 소급한다. 조선 세조 2년 3월 28일자(1457년 5월 2일) <세조실록>에 언급된 것처럼, 백정들은 고려 초기부터 한반도에 정착한 이방인들의 후예였다.

고려-거란족 전쟁에서 포로가 된 거란인들이 자기들의 거주지를 만든 것이 백정촌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여진족·몽골족 이주민들도 이런 대열에 가담하면서, 고려 곳곳의 백정촌은 주로 유목민 출신 이주민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들은 유목민의 후예였기에 짐승 고기를 잘 다루었다. 농경민들이 기피하는 일을 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들은 숱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한반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목민 출신의 이방인이라는 점과 짐승을 잡는 일을 한다는 점 때문에, 백정들은 경제적으로는 먹고 살 만하지만 정치·사회적으로는 왕따 대우를 받는 이중적 지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백정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 19세기 말의 세계적 혼란이었다. 혼란의 와중에 기존 체제가 약해지자,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회의 전면에 나섰다. 박성춘·박서양 같은 백정 출신들이 구한말에 사회지도층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배경 덕분이다.

만약 백정들에게 준비된 경제력이 없었다면, 그런 기회를 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지독한 차별을 받는 와중에도 꾸준히 경제력을 축적했기에, 한반도 정착 900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들의 지위를 개선하기 위한 도전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박성춘의 '성춘'은 '봄을 이루다'란 뜻이라 했다. 아들인 박서양의 서양(瑞陽)은 '상서로운 태양'이란 뜻이다. 기존 사회질서가 해체되던 19세기 말에 희망을 발견하고 가슴이 부풀었던 한반도 백정들의 분위기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이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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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101.9 (목)11시20분경. (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노비들,왕의 여자,철의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