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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문대 야간반을 졸업했다. 1990년대 초, 당시 나는 3교대 근무를 하는 회사에 다녔는데, 오전 6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 이후 5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에 출석했다. 회사도 학교도 모두 외지에 있다 보니 회사에서 학교까지 한 시간 이내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오토바이밖에 없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 다니는 게 처음엔 멋있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1년 열두 달을 오토바이만 타고 학교에 가는 것만큼 곤욕스러운 것도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토바이를 탈 수밖에 없었다. 여름엔 불빛을 보고 달려 드는 날벌레가 무서웠고, 겨울엔 옷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칼바람이 무서웠다.

한 번은 버스와 접촉사고가 났다. 오토바이를 다시 못 쓸 만큼의 큰 사고였다. 그쯤 되면 두 번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싶지 않을 만도 했는데... 다음날 다시 중고 오토바이라도 사야 할 판국이었다. 그게 아니면 학교에 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난 어떻게든 학교에 가야 했다.

오토바이만 있다고 해서 학교 가는 게 다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회사에서 제때 퇴근하는 게 쉽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오후 4시에 제대로 퇴근만 할 수 있다면 문제가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 일로 퇴근이 늦어지면 도저히 제시간에 학교에 닿을 수 없었다. 차가 막히거나, 날씨가 안 좋은 날에도 영락없이 지각했다. 그래서 첫 수업에 늦거나 아예 빠지는 경우가 잦았다.

더 큰 문제는 오후 4시에 시작하는 수업이 있을 때였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교양체육이 오후 4시부터 시작됐다. 오후 4시에 회사에서 나오는데, 무슨 수로 같은 시각에 수업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월차도 쓰고, 조퇴도 하고, 가끔은 눈치를 보면서 중간에 빠져나오기도 했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교양체육 과목은 출석 일수 부족으로 F를 받았다. 더욱이 교양체육은 졸업을 위한 필수 이수 과목이라 어떻게든 학점을 채워야 했다. 다행히 계절학기가 개설돼 나는 여름휴가에 월차를 이어 붙여 계절학기에 참여했고, 낙제를 겨우 면한 학점을 받아 졸업할 수 있었다.

남모르게 노력해 졸업장 받는 이도 있다

지난 2월 27일 한 대학교 졸업식에서 학생이 학사모와 가운을 입고 졸업식장을 나서고 있다(자료사진).
 지난 2월 27일 한 대학교 졸업식에서 학생이 학사모와 가운을 입고 졸업식장을 나서고 있다(자료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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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대학에 가는 이유는 다를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자로서 사회생활을 할 때 겪는 여러 가지 차별 대우 때문에 전문대 졸업장을 원했다. 지금의 내 삶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졸업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때는 나름 졸업장이 절박했다.

전문대 야간반에는 나처럼 낮에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나이도 많고 나보다 훨씬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진 형님들도 꽤 있었다. 여자친구의 부모님으로부터 "사위 될 사람이 대학 졸업장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 입학한 경우도 있었다.

졸업하는 날, 서로가 서로를 많이 위로했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대학 졸업장은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인증서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또한, 그것을 얻기 위해 남모르는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도 많다.

수업 참여가 어려운 상황 뻔히 알면서...

최근 김연아 선수의 대학 생활과 교생 실습이 요즘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김연아 선수는 체육 특기생으로 고려대에 입학한 후 대회를 준비하느라 1, 2학년 때는 학교에 잘 나가지 않았고, 외국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고려대 학칙에 의하면 '국내외의 중요한 훈련 및 경기 참가를 위하여 부득이하게 수업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 출석 인정 신청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김연아 선수는 1학년과 2학년 생활 모두를 '국내외의 중요한 훈련 및 경기 참가를 위하여 부득이하게 수업'에 빠진 상태에서 스케이트만 탔다. 선수 생활을 잠정 중단한 3학년과 4학년 생활 역시 김연아의 바쁜 일정 때문에 수업 참여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고 한다.

나는 김연아 선수가 학칙을 어기면서까지 고려대 졸업장을 받는 반칙을 저지르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남의 논문을 복사해 박사 학위를 받는 나라, 건물 지어 준 재벌 회장에게 명예 '철학 박사' 정도는 우습게 내 주는 나라에서 김연아 선수 같은 대 스타가 수업 좀 많이 빠졌다고 졸업장 하나 못 받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다만, 내가 이처럼 길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유는 김연아 선수에게 대학 졸업장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서다.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스포츠 종목에서 김연아 선수가 이뤄놓은 성과는 이미 눈부시다. 당연히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도 없다. 그런 그에게 대학 졸업장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기에 수업 참여 자체가 어려운 걸 뻔히 알면서도 대학에 입학했을까. 게다가 늘 '부득이한 경우'를 두고 수업에 참여한 것으로 쳐주는 그런 학교 생활을 해야 했을까.

만약 그가 체육교육을 하고자 했다면

김연아 선수가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으로 활동 했을 당시.
 김연아 선수가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으로 활동 했을 당시.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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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학 졸업장 소지 여부는 피겨스케이팅이나 스포츠 관련 분야에서 그가 계획하고 있는 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만약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그가 못 하는 일이 있다면, 그 현실 자체를 바꿔 나갈 수 있을 만큼 그에게는 충분한 힘이 있다. 그가 이미 이루어 놓은 성과와 인정받은 능력, 그리고 국민들의 지지와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대학 졸업장 없이 개인의 능력만으로 어떤 일이든 척척 이뤄가는 걸 국민들에게 보여준다면 한국에 만연한 학벌지상주의 역시 완화될 것이다.

반대로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 대학에서 공부를 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일이라면, 그는 학사 과정에 충실히 참여하고 공부해야 했다. 그 일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김연아 선수의 전공은 체육교육이다)이라면 더욱 그렇다. 학생들에게 '개인적인 성취만 있다면 학교 수업쯤은 대체할 수 있다'고 가르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수업은 대회 참가와 연습으로 대체하지만 졸업장만은 받아서 대학에서 공부한 것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은 거창하게 이야기할 것도 없이 개인적인 욕심일 뿐이다.

김연아 선수가 대학 졸업장을 받느냐 마느냐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하지만, 능력 있는 이들에게 대학 졸업장 정도는 시간만 지나면 받을 수 있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김연아 선수를 통해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가서 밤늦게까지 공부해서 어렵게 받은 내 전문대 졸업장을 초라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태그:#김연아, #고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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