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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인터뷰 대상자를 화자로 재구성했습니다. [편집자말]
공포심에 무작정 달음질치던 나는 어느 주인 모를 집의 피아노 앞에 앉았다. 마당에 재래식 화장실이 따로 있는, 당시의 전형적인 한옥이었다. 그 화장실 뒤에선 법대생 여럿이 모의를 하고 있었다.

"계엄군이 두 명씩 짝지어 다닐 거야. 우리 둘이 여기에 있다가 계엄군이 들어오면 덮칠게. 우리가 실패할 것을 대비해 나머지는 부엌에 숨어 있도록 해."

나는 태연히 피아노를 치며 계엄군을 낚기 위한 미끼 역할을 맡았다. 겉으론 태연했지만 '무섭다' 외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1980년 5월의 기억이다.

"시내에서 군인들이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패더라"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 씨제이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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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재수를 해 전남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학생이었다. 남과 어울리기보단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서울의 봄'이 도래하면서 전남대도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높아졌고, 학내 곳곳에서 집회와 공개토론이 열렸다. 하지만 난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업을 듣거나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는 것이 내 학교생활의 대부분이었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기억한다. 한창 학교 안에서 집회나 공개토론회가 많이 열리던 시점이었고, 총학생회가 참여를 호소하며 정문에서 학생들의 귀가를 막았다. 그래도 난 그냥 그들 앞을 지나 학교를 나왔다. 모두가 '으쌰으쌰' 하던 시점에서 내가 너무 당당하게 지나가서였는지 그들도 차마 날 막아 세울 수 없었나 보다.

5월이 왔다. 당시엔 병영집체훈련이라고 해 아직 군대에 가지 않은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군부대에서 며칠 간 훈련을 받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5월 16일 금요일, 이날 내가 속한 학과의 남학생들이 병영집체훈련을 받으러 갔다. 때문에 16일 오후부터 그 다음 주까지는 휴강이 예정돼 있었다. 16일, 오전 일찍 수업이 끝난 나는 농대 부근 잔디밭에 홀로 누워 책을 읽었다. 그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 왔다. 그런데 안경이 없었다.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다 안경을 잠시 벗어 놓고는 그대로 집에 와버린 것이다. 병영집체훈련 때문에 월요일(19일)에 학교를 갈 필요가 없었지만 그날 가서 안경을 찾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요일인 18일엔 시내 광주공원 근처 친척 결혼식에 참석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는 곧장 집으로 왔고, 부모님은 시내에서 좀 더 일을 보고 귀가했다. 아버지의 표정이 한껏 상기돼 있었다. 아버지는 "시내에서 군인들이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더라"며 분노하셨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와 달리 잔뜩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시위대에 참여하려는 아버지를 겨우 말려 집으로 왔다"며 "군인들이 학생들이라면 가리지 않고 잡아 가더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부모님의 말들이 그 장면을 쉽사리 상상하게 도와주진 못했다. 

안경 찾으러 학교에 갔다가... "숨어있어, 지금 가면 위험해"


 전남대사거리와 전남대 정문을 잇는 길. 이곳에 있었던 어느 라면집 아저씨는 계엄군으로부터 나를 숨겨줬다.
 전남대사거리와 전남대 정문을 잇는 길. 이곳에 있었던 어느 라면집 아저씨는 계엄군으로부터 나를 숨겨줬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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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월요일 아침, 안경을 찾기 위해 학교에 가는 버스를 탔다. 당시 집이 농성동이었는데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산수동과 광주교육대학교를 거치는, 꽤 돌아가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한참 버스를 타고 가는데 광주교대 앞에서 군인들이 버스를 세웠다. 버스에 오른 군인들이 신분증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학생증을 꺼내 내미려는데 전날 어머니가 "군인들이 학생들이라면 가리지 않고 잡아 가더라"라는 말이 떠올랐다. 걱정되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 학생증을 본 군인은 이어 나를 쳐다보고 나서 학생증을 돌려줬다. 버스에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전남대를 향해 버스는 계속 달렸다.

지금은 전남대 정문 근처에도 버스정류장이 있지만 당시는 전남대 정문에서 약 300m 떨어진 전남대사거리까지만 버스가 다녔다. 전남대사거리에 내린 나는 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학교 정문이 보일 쯤, 갑자기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기더니 자기 집으로 끌고 갔다. 너무 놀라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주 가던 라면집 아저씨였다.

"위층으로 올라가 숨어있어. 지금 학교 쪽으로 가면 위험해서 안 돼."

아저씨의 말에 버스에서 신분증 검사를 하던 군인들 생각까지 더해지자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잠자코 숨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아저씨는 "이제 내려와도 된다"며 "왜 학교에 가려 하냐"고 물었다. 나는 학교에 안경을 찾으러 간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매우 흥분된 어투로 "어차피 지금 학교에 못 들어가니 학교 쪽으로 가지 말고 집에 돌아가라"고 말했다.

꽤 긴 시간이 흘러, 내가 안경을 찾으러 학교에 간 바로 전날, 즉 18일 오전에 전남대 정문에서 큰 충돌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17일 24시 계엄령 확대와 함께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이에 항의하는 학생과 계엄군이 전남대 정문 앞에서 대치했고, 결국 학생들이 무자비한 폭력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 사건은 5·18 민중항쟁(이하 5·18)의 도화선이 됐고, 전남대 정문은 5·18 최초 충돌지라 불리며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당시 전남대 정문 근처에서 라면집을 운영하던 그 아저씨는 18일 오전의 장면을 목격했고, 이후에 비슷한 일이 수차례 일어나 격앙돼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중 19일 단골인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학교를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 팔을 잡아 끈 것이다.

군인과 대치한 시민들... 어느덧 나도 시위대 안으로

학교를 뒤로하고 다시 전남대사거리 쪽으로 나갔다. 버스를 타려 했는데 버스가 끊겼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계엄군에 의해 버스가 통제된 것 같았다. 이전 정류장을 따라가면 버스를 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버스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정류장을 지나도 버스는 계속 통제된 상황이었다. 버스 타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광주고등학교를 지나 대인시장 부근에 이르렀다. 그리고 거기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대인시장 쪽으로 군인들이 줄지어 있었고, 광주고등학교 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아 시민들이 웅성거리며 대치해 있었다. 일부 시민들은 돌을 던지기도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국가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왜 저렇게 길을 막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어느 순간 시위대 안에 합류해 있었다.

계엄군이 무섭게 달려들었다. 명령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대치해 있던 시민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나도 달려드는 계엄군을 보고 달아나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천을 따라 한참을 달리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자신의 집으로 나를 이끌었다. 전남대 정문의 라면집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아주머니도 여러 차례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한 듯했다. 그 집엔 나를 포함에 4명(혹은 5명)의 학생이 있었다. 나를 제외하곤 모두 남자였고, 그들은 모두 아는 사이였다. 자신들을 법대생이라 소개한 그들은 나의 학과와 학년을 물었다. 그리고는 서로 '작전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마루에 있는 피아노에 앉아 연주하는 연기를 하라고 했다.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여학생인데다 그렇게 투쟁심이 있어 보이진 않아서였는지 내가 피아노에 앉아 있으면 계엄군에게 혼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나보다. 그 사이 그 법대생들은 자신들의 작전 회의에 따라 화장실과 부엌 한 켠에 매복을 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신분증 검사를 하던 때, 라면집에 숨어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가 엄습했다.

다행히 계엄군들이 집 안까지 수색을 하진 않았다. 아주머니의 "이제 괜찮겠다"는 말을 듣고 그 집에서 나왔다.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계엄군이다"라는 외침을 수차례 들었다. 어디서 들리는지 알 순 없었지만 그 소리의 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가야하는 것은 그 외침에 대한 분명한 답이었다.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떠돌며 "시민 여러분, 불온 세력에 의해 혼란이 일고 있으니 빨리 집으로 귀가 하십시오"라고 방송을 해댔다. 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집에 갈 수 있게 해줘야 갈 것 아냐.'

"계엄군 오늘 저녁에 들어온다"... 어느날 집 앞에 선 탱크 11대

 계엄군이 시내를 재장악하기 위해 탱크를 몰고 돌고개를 넘고 있다.
 계엄군이 시내를 재장악하기 위해 탱크를 몰고 돌고개를 넘고 있다.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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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갔던 내가 집에 오지 않자 집에서는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광주제일고등학교(이하 광주일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남동생이 학교에서 "위험하니 곧장 집으로 가라"는 '훈화 말씀'을 듣고 친구 몇 녀석과 집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지난 일요일 학생이라면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던 계엄군의 모습을 보았던지라 학교에 갔던 내가 돌아오지 않자 불안감이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막내 동생을 시켜 내 행방을 좀 알아오도록 했다. 어머니는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고등학생보다 초등학생이 나가 '수색'을 하는 게 문제가 안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광주일고 부근에서 배회하던 나는 놀랍게도 자전거를 탄 막내 동생과 마주쳤다. 그런데 이 만남도 얼마 못 갔다. "계엄군이다"라는 외침에 난 또 어디론가 도망갔고 동생과 헤어졌다. 어쨌건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했다. 평소 한참을 돌아가는 버스 때문에 걸어오기도 했던 집을 4시간이 걸려 도착한 것이다. 

집에 있던 고3 동생은 친구들과 함께 연신 화를 내며 "나가서 싸우자"고 말했다. 광주일고가 금남로 부근에 위치해 당시 부조리한 상황을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연신 말리며 나가지 못하게 했다. 나도 "지금 나가면 위험할 것 같다"고 말하며 동생을 진정시켰다.

다음날부터는 동생과 매일 당시 전남도청에 나가 시위에 참여했다. 물론 적극적이진 않았지만 그곳에서 여러 이야기들도 듣고 나름 열심이었다. 어머니도 집에서 음식거리를 싸다가 도청까지는 아니어도 집 근처 돌고개라 불리는 곳까지 가 나눠주곤 했다. 도청에서 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항상 불안한 마음을 안고 왔다. 현재 상무지구인 당시 상무대엔 도청을 포함한 시가지에서 물러난 계엄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내가 사는 농성동은 도청과 상무대의 중간 지점이었다. 계엄군이 시내 쪽으로 진격하기 위해선 돌고개를 꼭 넘어야 했다.

며칠간 도청에 '출석'한 나는 매일 반복되는 시위에 꾸준한 참여 의지를 갖지 못했다. 대신 어머니와 함께 돌고개 정도만 나가 응원을 하기도 하고, 음식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매일 '계엄군이 오늘 저녁에 들어온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걱정스런 마음으로 돌고개에 나가보면 시민군이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탱크가 돌고개에 한 줄로 세워져 있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탱크의 숫자를 세었다. 정확히 11대였다. 며칠 시위에 참여하며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막연한 희망이 탱크를 보고는 절망으로 바뀌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학교에 다시 갈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돌아온 학교는 말 그대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학생회나 학과에 연고가 없었던 나조차도 그렇게 느꼈으니 다른 학생들은 어땠을까. 은연중에 "○○과 누가 죽었다더라"라는 소문만 입에 오르내렸다.

"부채의식 갖고 있는 그날의 기억... 학생들에게 계속 들려줄 것"

1983년 졸업을 한 나는 곧바로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도 했다. 이후 1999년 귀국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교수가 된 지금까지 나는 한 학기에 한번쯤은 '1980년 5월'에 내가 겪은 일을 학생들에게 전한다. 내 수업을 몇 차례 들었던 제자가 이 이야기를 용케 기억했는지 5월을 맞아 나를 찾아왔다. <오마이뉴스>에 나의 이야기를 써보겠다면서 말이다.

처음엔 거절했다. 내 이야기를 기사화 할 만큼 나는 그 당시 자랑스럽게 행동하지 못했고, 때문에 지금도 부채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녀석이 후세대가 5·18을 기억하는 데 내 이야기가 도움이 될 거라며 거듭 부탁을 했다. 요청을 받아들였다. 녀석이 "왜 그날의 이야기를 매번 학생들에게 하는가"라고 묻는다. 사실 나도 시행착오를 겪었다. 1980년 5월의 이야기가 누구나에게 뭉클함을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했었다. 때문에 유학을 막 마치고 와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나 혼자 흥분해 그날을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5·18. 내겐 눈물이 핑 돌만큼 지금도 살아있는 과거지만 누구에게나, 특히 현재 대학에 다니는 젊은 세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마치 6·25전쟁에 느끼는 감정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내가 6·25전쟁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듯 그들에게도 5·18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싶다. 직접 경험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과거의 아픈 경험은 우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희생이 현재를 있게 하고, 그것이 현재의 부조리함에 맞서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믿었으면 한다. 그래서 난 이번 5월에도 1980년 5월의 내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줬고, 내년에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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