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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라디오스타' 그 자체였다.
 김구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라디오스타' 그 자체였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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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라가 떠났다. 방송사 PD들이 입을 모아 "대체 불가능한 MC"라고 평했던 그가 자신이 출연하는 모든 방송에서 하차했다. 다른 방송도 마찬가지지만 무엇보다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이하 '라스')에서 그것은 단지 '5명의 MC 중 한 명의 하차' 수준이 아니었다. 언론과 누리꾼들 사이에서 프로그램의 '폐지'가 거론될 정도로, 그의 하차는 방송의 존폐를 위협하는 정도의 타격이었다.

그는 종종 방송 내에서의 자신의 존재감, 위치를 나타낼 때 "'라스' 그 자체"라고 표현하곤 했다. 그 말에 윤종신을 비롯해 나머지 MC들은 발끈했지만 객관적으로 그리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신정환의 하차 이후, 김구라는 명실상부 '라스'를 대표하는,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유일한 MC였다. 그리고 그 표현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이 바로 지난 16일, 그가 빠지고 처음 녹화한 방송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슈퍼스타K>의 허각과 서인국, <위대한 탄생>의 손진영, 구자명이 게스트로 출연했던 16일 방송은, 재미있었다. 웃길 것으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손진영이 시종일관 분위기를 주도해 빵빵 터뜨려주면서 이준과 김응수의 뒤를 잇는 초대박 게스트로 급부상했고, "김구라가 빠진 마당에 게스트 라인업이 너무 부실한 거 아니냐"는 우려를 불식시켰다. '라스' 입장에선 복덩이가 절로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손진영의 활약이 클수록 김구라의 공백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방송은 산만해서 흐름은 때 없이 뚝뚝 끊겼고, 게스트 간의 밸런스는 완전히 망가져 손진영 독무대가 되었다. 주도권을 게스트에게 넘겨준 MC들은 단순히 질문을 던지는 역할 외엔 하지 못했다. 때때로 쇼의 주인공인 게스트를 철저히 소외시키면서 MC들끼리 '노는' 것으로 유명했던, '라스' 특유의 색깔이 완전히 지워져버린 한 회였다.

손진영 한 명에게 휘둘린 4명의 MC

손진영은 예상 외로 활약했지만 그로 인해 김구라의 공백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손진영은 예상 외로 활약했지만 그로 인해 김구라의 공백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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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는 원래 산만한 예능이었다. 4, 5명의 MC와 평균 3명 가량의 게스트가 작은 반원 형태의 테이블 앞에 옹기종기 모여 떠드는 이 쇼는 오디오가 겹치고 말이 씹히는 건 일상다반사일 정도로, 정제되지 않은 방송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산만하고 부산한 가운데서도 나름의 질서와 체계는 존재했다. 그리고 그 질서와 체계는 '라스'를 다른 쇼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독특하고 개성 있는 쇼로서 존재하게 했다.

신정환이 존재했을 때, '라스'의 많은 질문은 그로부터 출발했다. 그가 던지면 김구라가 연타를 날리고, 게스트로부터 튀어 나온 반응을 윤종신이 주워 먹으면, 김국진이 정리하는 식이었다. 신정환이 빠진 뒤에는 김구라가 그의 몫까지 커버했다. 김희철이 어느 정도 신정환의 빈자리를 메웠으나 그마저 하차한 뒤로는 누구도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없었다. 규현은 예능초보였고, 유세윤은 적응하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졌다.

질문을 던지고 게스트를 찌르는 공격수의 부재. 그리하여 16일의 '라스'는 김국진부터 규현까지 4명의 MC들이 차례로 질문을 던졌다. 같은 질문이라도 누구의 입을 통해 발화하느냐에 따라 뉘앙스와 그에 대한 반응은 천차만별.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질문을 던지고 게스트를 찌른 그 다음 상황이었다. 4명의 MC들은 게스트의 반응을 적절하게 통제하는 데 실패했고, 방송은 산만해졌다.

손진영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시종일관 큰 웃음을 줬다. 그러나 그가 다른 게스트의 말을 잘라먹고, 고무공처럼 혼자 튀어나갈 때, MC들은 그걸 받아 웃음으로 만들거나 따라 웃으며 리액션할 뿐, 그 상황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김국진은 4명의 MC 중 거의 유일하게 그걸 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손진영의 개그에 매료됐는지 방청객처럼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모두들 손을 놓고 손진영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방송의 맥은 뚝뚝 끊겼다. 하나의 질문을 통해 대화가 오고가면 그걸 정리하고 다음 질문, 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게 넘어가야 하는데 16일 방송에선 그 '자연스럽게'가 되지 않았다. 결국 하나의 장면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건 온전히 PD의 몫이 됐다. 먹구름과 같은 CG와 편집이 MC들을 대신한 것이다.

무너진 게스트 간의 균형

김구라는 묻히고 소회되는 게스트를 끌어올려 게스트 간의 밸런스를 맞출줄 아는 MC였다.
 김구라는 묻히고 소회되는 게스트를 끌어올려 게스트 간의 밸런스를 맞출줄 아는 MC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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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손진영의 활약에 MC들이 손을 놓은 사이, '라스'는 손진영 원맨쇼가 되어 버렸고, 게스트 간의 밸런스는 무너졌다. <슈퍼스타K> 우승자 출신인 허각이 그와 대립각을 세우며 어느 정도의 분량을 확보했고, 그나마 방송 경험이 있는 서인국이 이따금 허각을 거들며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예능이 처음이었던 구자명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방송 내내 별다른 활약도, 존재감도 나타내지 못했다.

물론 게스트들의 예능감이 자로 잰 듯 같을 순 없다. 출연한 게스트 모두가 재밌게 말하고 남을 웃긴다는 건, 그런 게스트들만 일부러 모아놓으려고 해도 어려운 일이다. 튀는 게스트가 있으면 묻히는 게스트도 있다. 모든 게스트에게 공평하게 발언권이 돌아가고 방송분량이 나눠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16일 방송에서 김구라가 자리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김구라는 묻히는 게스트, 소외된 게스트를 끌어올릴 줄 아는 MC였다. 잘 나가는 게스트를 띄워줄지도 알지만 그가 너무 나간다 싶을 때 적당히 제동을 걸어주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 묻혀 존재감이 희미한 게스트에게는 적당한 질문을 던져 말을 시킨다. 정 할 말이 없을 땐 "이럴 거면 왜 나왔느냐"면서 면박을 줘 굴욕적인 웃음을 끌어내더라도 분량을 확보하는, 게스트 간의 밸런스를 맞출 줄 아는 그런 MC였다.

손진영 등이 출연하기 불과 3주 전 방영됐던 <해를 품은 달> 조연 특집에서도 그의 이런 능력은 빛을 발했다. 정은표, 선우재덕, 김응수가 출연했던 이 날 방송에서 선우재덕은 유독 대화에 끼지 못했다. 대화의 주된 화제는 <해를 품을 달>이었는데 그는 극 초반 하차했기 때문에 드라마에 대해 별다른 에피소드도, 할 말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은표와 김응수가 화면에 잡히는 동안, 선우재덕은 소외됐다.

그러나 김구라는 그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정은표와 김응수가 드라마에 이어 연극계에 몸담았던 과거에 대해 신나게 얘기하고 있을 때, "여기서도 선우재덕 씨는 소외되네요"나 "재덕이 형 오늘 왜 부른 거야?"와 같은 멘트를 시기적절하게 찔러 넣으면서 굴욕적인 상황으로 웃음을 만들고, 선우재덕이 말할 타이밍을 벌었다.

평범하고 시시한 쇼가 된 '라스'

'라스'가 다른 집단 토크쇼와 달랐던 점은 신정환, 김구라로 대변되는 독한 멘트, 강한 공격만이 아니었다. 게스트를 배려하지 않는, 때때로 게스트를 무시하기까지 하면서 철저하게 MC 위주로 돌아갔던 유일무이한 쇼라는 점에서 '라스'는 그 어떤 토크쇼와도 비교가 불가능한 특별한 예능이었다.

'라스'가 다른 토크쇼와 달리 게스트에 따라 재미가 천차만별이지 않고 언제나 고른 웃음을 뽑아낼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재미와 웃음이 게스트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MC들로 인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라스'의 시청자들은 게스트가 누구냐에 관계없이 늘 편안하게 TV를 시청할 수 있었다. 어차피 자신들을 웃겨주는 건 김구라, 신정환, 윤종신 등이지 게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라스'에서는 더 이상 그런 '라스'만의 색깔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신정환이 하차하면서 조금 옅어졌던 '라스'만의 색깔은, 김구라의 하차로 완전히 바래버렸다. 16일 방송에서 윤종신은 김구라의 역할을 '독설'로 한정지었지만 그의 역할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명백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이 날의 방송이었다. '라스'는 평범하고 시시한 쇼가 되어 버렸다. 그저 아쉬울 뿐이다.


태그:#김구라, #라디오스타, #윤종신, #손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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