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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인터뷰 대상자를 화자로 해 재구성했습니다. 인터뷰 대상자의 발언과 <80년 5월의 민주언론-80년 언론인 해직 백서>(한국기자협회·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저, 나남출판 펴냄)을 토대로 쓰여졌습니다. [편집자말]
1980년 5월. 나 소옥원은 1977년 <전남매일신문>(이하 전남매일)에 입사한 스물아홉의 청년 기자였다. 당시 제 2사회부에 소속돼 전라남도 진도에 주재기자로 나가 있었다. 5월 광주의 소식은 전화로나마 접하는 정도였다.

5월 21일, 신문사 문이 굳게 닫혔다. 한동안 신문이 못 나왔다. 광주에 문제가 있음을 직감했다. 본사에 연락을 하니 "사태가 심각해 윤전기가 정지된 상태니 조금만 기다려보라"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답답해서 5월 말 광주에 올라왔다. 광주는 죽어 있었다. 신문은 6월 2일에 다시 발행한다고 했다. 며칠 뒤 신문 1면에 '아아, 光州여!'라는 시 한편이 실렸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 가는 것을"

 소옥원씨가 아들인 기자에게 당시 썼던 기사들을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소옥원씨가 아들인 기자에게 당시 썼던 기사들을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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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매일> 기자들은 5월 19일에 있었던 광주의 처참한 현장을 20일자 신문에 보도하기 위해 19일 오후 5시 무렵 긴급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20일자 신문에 기사가 실리지 못하면 제작거부 및 기자직을 사퇴하기로 결의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1980년의 언론 환경은 처참했다. 같은해 3월경부터 보안사령부의 사전 검열이 있었다. 중사나 상사 정도 되는 군인들이 신문사 안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5월에는 그 강도가 심해졌다. 노크도 없이 문을 차고 들어오는 게 다반사였고, 비서실을 거치지도 않은 채 사장실을 들락날락했다. 곧이어 내가 있던 진도, 군 단위까지 사무실을 내놓고 상주했다. '무소불위'였다.

광주의 참극을 보도하려 한 20일자 신문이 정상적으로 나갈 리 없었다. <전남매일> 기자들은 집단사표를 쓰고 이를 약 2만 장 인쇄해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 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모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부끄러워 붓을 놓았다.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 기자 일동."

나는 진도에 있었기 때문에 광주의 사정에 밝진 못했다. 어쨌든 6월 2일 신문이 발행된다고 해 '이제 어느 정도 정상화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6월 2일자 신문을 받아 봤다. 1면에 '아아, 光州여!'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최근 <타오르는 강>을 완간한 소설가 문순태가 당시 <전남매일>의 편집부국장이었다. 그를 비롯한 편집국 간부들이 논의를 해 6월 2일자 신문에 시를 한 편 싣기로 했고, 당시 전남고 교사인 김준태 시인에게 시를 부탁했다. 오전 9시 부탁을 받은 김준태 시인은 한 시간만에 109행의 시를 완성했다.

본래 시 제목은 '아아, 光州여 우리나라의 十字架여!'다. 보안사령부의 검열로 제목도 잘리고, 시도 33행으로 줄어든 채 실렸다. 그는 훗날 "당시 광주시민의 영령들이 내 몸속으로 들어와 이 시를 쓰게 만들었다, 5월의 영령들이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한 십자가를 진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6월 2일자 신문이 나가고 얼마 안 있어서 일이 났다. 그 기사가 빌미가 돼 군인들이 편집국을 급습, 4~5명의 간부 및 기자가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행 소식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새벽 5시, 헌병의 강제 연행 그리고 '첫 번째 해직'

6월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던 중 7월 초에 회사로부터 "사표를 내놓고 근무하라"는 조치가 나왔다. 당연히 많은 기자들이 항의를 했다. 회사 측에선 "사표를 낸다고 해 수리를 하는 건 아니니 근무를 해라, 정부의 방침이다"고 말했다. 이런 비상식적 상황에 염려가 된 나는 당시 계엄사령부 광주전남북분소에 아는 사람이 있어 이 '사표 근무'가 어떻게 된 것인지 물었다. 계엄사 쪽으로부터 "별다른 이상이 없으니 가서 근무하라"는 답을 들었다. 조금은 안심이 됐다.

며칠 후 앞서 말했던 검열을 위한 보안사령부 요원이 진도에도 내려왔다. 박아무개 중사였다. 흔히 이 사람을 '박 대장'이라 불렀다. 그러던 중 그 박 대장이 "정보도 공유하고 할 겸 한 번 보자"고 나를 '호출'했다. '무슨 군인이 민간인을 오라 가라야'라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 안 갔다. 황당한 건 며칠 후 타 신문사 기자가 연락이 와 "박 대장이 회의를 간다는데 여비나 좀 해줘야 되지 않겠어?"라고 말했다. 웃어 넘겼다. 소도 웃을 일이지 않은가.

이틀 정도가 더 지난 토요일로 기억한다. 밤낚시를 하고 다음날 새벽 4시쯤 숙소로 돌아왔다. 당시 사무실 내에 따로 방이 있어 그곳을 숙소로 사용했다. 씻고 난 후 새벽 5시쯤 누워 막 잠이 들려던 차에 전화가 울렸다. 귀찮기도 하고, 장난전화인가 싶어 받지 않았다. 상당 시간 울리던 전화벨이 멈췄다.

그런데 3층에 있던 사무실로 누군가 빠르게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꽤 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진 '술 먹고 누가 주정을 부리나' 생각했다. 그 빠른 발소리는 다시 건물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또 전화벨이 울렸다. 역시 상당 시간 울리던 전화벨이 멈추자 그 발소리가 다시 사무실로 향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발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때서야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발소리가 가까이 오자 신발이 군화임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철컥철컥'하는 헌병 특유의 장식물 소리가 들렸다. 그 발걸음은 내 방문 앞에서 멈췄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뭐야"라고 외쳤다. '완전무장'한 헌병 두 명이 서 있었다.

"좀 나오세요."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요?"
"별 일 아니니까 나오세요. 가보시면 압니다."

영장도 없이 새벽에 붙들려 나가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일단 옷가지를 챙겨 입고 그들과 동행했다. 건물을 나가자 바로 양 측에서 팔짱을 꼈다. "도망 안 갈 테니 이 손 놔라"고 말해도 줄곧 "가보시면 안다"는 말만 했다. 조금씩 동이 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양 팔이 제압당한 채로 경찰서까지 걸어서 연행됐다.

일요일이라 경찰서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소리를 지르며 항의를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부터 사람들이 잡혀오기 시작했다. 유치장이 초만원이었다. 아는 사람도 있고 해서 무슨 일로 왔는지 묻자 다들 "가보면 안다"는 말만 듣고 끌려왔다고 답했다.

며칠 후엔 <전남매일> 업무국에서 간부급 인사가 와 사표를 수리한다고 말했다. 잘못한 것도 없었고, 형이 확정된 것도 아니었다. 진도에 주재해 있었기에 광주에서 있었던 6월 2일자 신문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세게 항의했다. 그 간부급 인사는 "시국이 시국인 만큼… 우리가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도 마음이 아픈데 어쩔 수 없다, 일단 이렇게 해 두고 나중에 방법을 찾아보면 있지 않겠나"라는 말뿐이었다. "좋을 대로 해라"고 소리치고 그걸로 해직됐다.

유치장에서 10일쯤 보냈을까. 심사를 받으러 가니 준비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오전 10시쯤 유치장에 있던 사람들 전부가 군민회관 같은 곳으로 이동했다. 도착하니 줄을 세워놓고 유치장 사람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얼핏 보니 소령 계급을 단 군인이 이름, 주민등록번호 등을 묻고 등급을 결정했다. A, B, C, D등급으로 분류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나는 D에 속했다. 치욕적이었다. 군인들이 와서 일반 시민을 줄세워 분류하는데 그 대상자가 되니 죽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군용 트럭 비슷한 큰 차가 경찰서 앞에 섰다. 나만 제외하고 모두 그 트럭에 실려갔다. 잠시 후 서장이 호출을 했다. 그에게서 "모두들 '삼청교육대'라는 곳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법정에서 항변할 기회를 드려야 할 것 같아 제외를 했다"고 귀띔했다. 걱정이 됐다. 처음 삼청교육대란 말을 듣고, '나머지 사람들은 적당히 교육을 받고 나오는데 나는 중죄를 받으려나 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목포 검찰에 송치됐다.

"그냥 조용히 지내는 게 좋다"... 석방된 뒤 또다시 강제해직

 계엄군이 양손에 진압봉을 받쳐들고 시위군중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계엄군이 양손에 진압봉을 받쳐들고 시위군중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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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특히 물이 부족해 물을 가진 교도관과 죄수들 중 선택된 지도요원들의 권력이 셌다. 교도소 안에서 '정화'를 한다며 봉체조 같은 '신체단련'도 했다. 그러면서 2주간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조사가 다 끝나고 맞는 첫 토요일, 검사가 날 불렀다.

'조사도 끝났는데, 더군다나 토요일인데'라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같이 수감돼 있던 사람들도 염려를 했다. 원탁에 앉아 검사와 얼굴을 마주했다. 평소와 달리 인상이 부드러웠다. 검사는 원탁에 놓인 서류 뭉텅이를 가리키며 "검찰이라는 곳은 검사 마음대로 못하는 곳이니 이 서류들을 가져가 지청장의 결제를 받으면 잘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자리를 뜬 검사는 20여 분 후에 팔에 서류를 끼고 돌아왔다.

"2주 동안 고생 많았다. 오늘 저녁에 석방될 것이다. 석방이 돼도 지금 밖이 상당히 어수선 하니 젊은 패기에 보복한다고 날뛰고 그러지 마라. 그냥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겠다."

그날 저녁, 방에 가서는 침묵을 한 채 석방 명령만 기다렸다. 평소 같으면 8시 정도에 석방 명령이 내려오는데 그날은 취침 시간까지 아무런 부름이 없었다. '뭐가 잘못됐나' 걱정이 됐다. 모두 잠자리에 들었지만 내 귀는 복도를 향해 있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더니 내가 있던 방 문 앞에서 군대식으로 '턱' 하고 발 구르는 소리가 났다.

무혐의로 석방됐기 때문에 복직을 하려고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그 와중에 '언론통폐합'이 진행됐다. '1도(道) 1사(社)'를 원칙으로 신문사, 방송국들이 통폐합된다는 말이 나왔다. <전남매일>은 <전남일보>로 흡수돼 지금의 <광주일보>로 통폐합됐다. 어렵게 해서 <광주일보>에 다시 들어갔다. 다시 시험도 보고 했으니 복직이라기보다, 재입사였다. 그리고 해남 주재기자로 다시 활동했다.

1981년 7월, 해남에 있으면서 농민들이 '하곡(보리)수매'를 기피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 당시 보리를 재배하면 농협을 통해 정부에서 구입을 하는데 낮은 값을 책정해 농민들이 이를 꺼린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 때문에 해남 군수실에서 호출이 왔다. 가보니 군수가 잔뜩 격앙이 돼 있었다. 군수가 "이 기사 때문에 농수산부 장관이 퇴근도 못하고 있다"며 정정 보도를 요청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 해남군 차원에서 하곡수매 홍보를 대대적으로 하면 그 뒤 상황을 봐서 후속보도를 하겠다고 합의했다.

얼마 뒤 편집국장이 불러 광주에 올라갔다. 편집국장이 "왜 시류에 편승을 하지 모가 난 행동을 하느냐"며 "지난해 경험도 있으면서 시류에 동승을 하라"고 다그쳤다. 얼마 뒤 따로 만난 해남군수도 "전에는 해남의 일들이 우슬재를 넘지 않았는데 당신이 온 뒤로 좋지 않은 일들이 자꾸 우슬재를 넘어가 곤혹스럽고 섭섭하다"고 말했다. 우슬재는 해남을 들어올 때 넘어야 하는 곳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쓰는 것도 아닌데"라고 받아쳤다.

당시엔 문화공보부에서 기자들에게 프레스카드를 발부했다. 1981년 8월, 프레스카드를 신청해야 한다고 해 관계 서류를 제출했다. 그리고 2주 정도 지났을까. 본사의 가까운 간부가 내 프레스카드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광주에도 가보고, 서울에도 가봤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자신들 명의로 프레스카드를 내는 문화공보부마저도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거면 내주고 싶은데 위에서 이미 정해진 것이라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두 번째 해직을 당했다. 시간이 지나 알아보고, 드러난 것을 보니 나, 그리고 광주뿐 아니라 모든 언론이 1980년 1월부터 계획한 신군부의 'K-공작계획'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5월의 투사도, 시민군 대장도 아니었다. 그저 기자라는 직종을 가진 소시민이었다. 당시 권력이 얼마나 광범위한 탄압과 비민주적인 행태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시간이 지나 이제 아들놈이 기자를 꿈꾸고 있다. 그리고 5월을 맞아 당시를 겪은 사람을 인터뷰해 기사를 쓰겠다고 나를 찾아왔다. 난 당시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짱똘' 하나를 던지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 녀석 어렸을 때부터 종종 1980년 5월부터의 이야기를 해줬지만 오늘 같이 이렇게 자세히 털어 놓은 건 처음인 것 같다. 기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 아들이 묻는다. "사실이 아닌 것을 쓰는 것도 아닌데"라고 말할 수 있는 기자가 되라고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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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선악의 저편을 바라봅니다. extremes88@ohmy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