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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애틀랜타의 4월과 5월은 각종 학교 행사들로 바쁘다. 학년 말이 5월이기 때문이다. 1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선보이는 자리들이 줄지어 예약된 가운데, 지난 21일 토요일 저녁 에모리대에서는 캠퍼스 내에 있는 오래된 교회 건물을 빌려 한국 문화행사의 밤(Korean Culture Night)이 열렸다.

한국 문화 콘텐츠의 과거와 현재, 한 무대에 서다

'남부의 하버드'라고 불리는 에모리대는 1990년대에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제임스 레이니 전 총장의 한국과의 인연도 있고 해서 그런지 민족별 학생수 통계에서 한국계가 1위다. 학부에만 400명이 넘는 한국 학생들이 있고, 대학원 과정까지 합치면 약 700명 가량 된다고 한다.

한국 문화행사의 밤은 한국계 학부 학생들의 모임인 KUSA(Korean Undergraduate Student Association)와 한인 유학생회인 KISEM(Korean International Students at Emory)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연례 행사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학생들과 한국에서 건너온 학생들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매개로 하나가 돼 함께 행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 2004년. 올해로 9년째를 맞았다.

그간 주말 한국학교 발표회 등에서 어린 학생들의 공연만 봐온 터라 대학생들의 공연은 어떨까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한국 문화와 관련한 레퍼토리가 대체로 거기서 거기라서 사실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프로그램을 받아보니 가야금, 사물놀이, 태권도 등을 선보이는 1부는 리쌍의 노래 'TV를 켰네' 한 곡을 제외하곤 전부 전통 한국문화였고, 2부는 <단군 신화> 한 편을 빼곤 모두 케이팝 노래와 댄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약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공연은 진부하게 얘기하자면 '전통과 현대의 만남', 좀 색다르게 표현하자면 '과거와 현재의 절묘한 어울림'이었다고나 할까? 태권도 시범을 제외하곤 전부 에모리대 학생들이 꾸민 무대는 젊은이들의 당당함과 끼, 그리고 열정이 어우러져 관객을 들뜨게 했다.

가야금 연주와 사물놀이, 태권도 시범 등 전통적인 한국 문화 콘텐츠가 대중 가요와 춤이라는 케이팝 콘텐츠와 한 무대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공연되는 모습은 생각보다 참 잘 어울렸다. 관객들 중 많은 수가 이중 언어를 쓰거나 영어만 쓴다는 점을 감안해서 프로젝터를 통해 모든 순서와 노래 가사 등을 영어로 전달하고 있었다. 한인 유학생 회장의 인사말만 빼곤 모든 대부분의 공연정보와 출연자에 대한 소개도 영어로 해 미국인들의 공연 이해애 도움을 주고 있었다.

1부 – 전통 문화 레퍼토리가 다는 아니야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첫번째 발표에 나선 가야금 연주자 써니신양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설명이 무색하지 않게 수준급의 연주를 선보였다. 첫 곡으로 연주된 '밤의 소리'는 아주 감미로운 멜로디였는데, 소리만 듣는다면 가야금인지 하프 같은 서양 악기인지 모를 것 같았다.

리쌍의 노래는 6명으로 구성된 '절대 4세대(Absolute 4th Generation)'라는 이름의 에모리대 남성 밴드가 공연했다. 해마다 새로운 멤버로 구성되는데, 4세대 그러니까 올해로 4년 된 그룹이다. 아마추어 밴드 공연이 흔히 그렇듯이 악기 소리가 보컬을 덮어 버려 한국어 가사 전달이 잘 안 된 점은 아쉬웠다.

에모리 사물놀이팀 '궁'의 공연 모습.
 에모리 사물놀이팀 '궁'의 공연 모습.
ⓒ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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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도 신나는 사물놀이는 일곱 명으로 구성된 에모리대 사물놀이 팀 '궁'이 공연했다. 특히 공연 참가자들이 어깨를 들썩이고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짓는 등 공연 자체를 즐기는 모습은 아마추어의 경지를 넘어선 능숙함으로 읽혔다.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선보인 태권도 공연은 한인들이 꽤 많이 거주하는 알파레타 시에 위치한 새한태권도장에서 데모 팀을 파견해 이뤄졌다. 빠른 배경 음악과 어우러진 태권도 데모 팀의 공연은 아들이 다니는 우리 동네 태권도장 행사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볼 때마다 뿌듯하다. 특히 주변에 미국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렇다.

새한태권도 데모 팀의 태권도 시범.
 새한태권도 데모 팀의 태권도 시범.
ⓒ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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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파 시범도 여러 번 있었는데, 칼 끝에 높이 매달린 사과를 날듯이 발로 차서 산산조각을 냈을 때는 객석으로 날아든 사과 조각을 잽싸게 손으로 받아 입으로 가져가며 호응했고, 부서진 판자 조각들이 날아들었을 때는 꼬마 관객들이 기념품으로 가져가려고 앞다투어 뛰쳐나가는 소동도 있었다.

마지막 격파는 참가자 전원이 일렬로 서서 차례대로 진행됐는데, 각자 능력별로 판자 수가 달랐다. 맨 끝에 선 선수는 키가 참가자 중에서 중간쯤에 해당하고 5-6학년쯤 되어 보였는데, 꽤 두꺼운 나무판자가 얼추 일고여덟 장은 돼 보였다. 다른 선수들과 갑절쯤 차이 나는 두께에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한두 장부터 서너 장짜리들이 격파될 때도 탄성이 터졌는데, 마지막 나무판자들이 깔끔하게 두 동강 나자 몇몇 미국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환호했다.

1부 순서가 끝난 직후에는 입구에서 김밥과 음료수를 팔았다. 저녁 시간과 맞물린 공연시간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LiNK(Liberty in North Korea, Emory University) 기금 마련을 위한 판매였다. 예년에는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함으로써 북한 현실을 알리곤 했는데, 올해는 일정상 부득이 참가하지 못했다.

객지 생활하는 대학생들이 많아서 그런지 김밥은 금세 팔려 나갔다. 미국인들도 김밥 정도는 이제 익숙한 메뉴가 된 모양이다. 은박지에 길쭉하게 싸인 김밥을 손가락으로 집지 않고 햄버거를 먹듯이 능숙하게 입으로 먹는 모습에서 미국 문화 속에 스며들고 있는 김밥의 힘을 느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2부 – 케이팝이 다는 아니야

2부의 첫 순서로는 '이바네즈(Ibanez)'라는 에모리 록밴드가 2NE1의 '어글리'를 불렀다. 1부 밴드 공연 때 사운드 문제를 바로잡았는지 이번에는 보컬도 꽤 좋았다. 관객들에게 모두 일어나 함께 부를 것을 제안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이 뜨거웠고, 곡이 끝나자 '앙코르'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자신들의 공연에 꼭 와 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 버렸다.

영상으로 소개된 <단군신화>의 한 장면
 영상으로 소개된 <단군신화>의 한 장면
ⓒ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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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서는 <단군 신화>. 당연히 한국말로 연기하는 연극 무대를 기대하고 기다리는데, 프로젝터 속에서 영상이 돌아갔다. 영상 속에 환인이 등장하고 이어 환웅이 나온다. 대사는 영어, 자막도 영어. 한국학교 발표회 때는 한국어 기량 향상을 선보이느라 한국어 대사가 필수다. 그러고 보니 여기선 그럴 필요가 없을 듯도 하다. 내용 전달이 더 중요하니까.

에모리대 캠퍼스를 배경으로 건물 안과 밖을 오가며 자유롭게 찍어서 그런지 코믹 연기들이 일품이었다. 만약 무대 위에서 장면 전환을 표현하려면 무대 세트 등을 준비하느라 꽤 힘이 들었을 텐데,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젊은이들의 재치가 빛나 보였다. 곰이 여자로 변하는 장면을 연극에서는 어떻게 처리할까? 근육질의 남학생이 한복을 입은 여학생으로 바뀌는 것도 장면 하나 바꾸면 되니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오디오가 완벽하지 않아 중간중간 대사 전달이 끊긴 점은 좀 아쉬웠다.

이어진 듀엣 무대는 김학준 군과 신민영 양이 임재범과 박정현의 곡 '사랑보다 깊은 상처'를 불렀다. 이 둘은 행사 시작 전에 애국가와 미국 국가를 번갈아 부르기도 했다.

전원 1학년 여학생으로 구성된 여성 댄스그룹 '써니'.
 전원 1학년 여학생으로 구성된 여성 댄스그룹 '써니'.
ⓒ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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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두 순서는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케이팝 댄스. 먼저 남성4인조 댄스그룹 TNT(TrickaNomeTry)가 비스트의 '더 팩트'와 '픽션', 인피니트의 '비 마인', 빅뱅의 '판타스틱 베이비'를 보여주었는데,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컬쳐 쇼크'라는 댄스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고, 아시아계 미국인들 중에서 재능 있는 엔터테이너들을 발굴하는 단체인 '콜라보레이션 애틀랜타' 행사에서도 공연하는 실력자들이었다.

여성 7인조 댄스그룹인 '써니'는 사회자가 '일곱 명의 일학년 여학생들'이라고 소개할 때부터 객석이 들끓기 시작하더니 소녀시대의 '오'와 '더 보이즈', 티아라의 '롤리 폴리'에 맞춰 춤을 추자 환호성과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열광했다.

대학생 공연의 힘, 지역사회 자산으로 활용됐으면

행사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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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나고 딸 아이에게 뭐가 제일 재미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주저 없이 '댄스'라고 답한다. 아마추어라고는 해도 남녀 대학생들이 인터넷에서나 보던 춤을 실제로 보여 주니 그 감동이 큰 듯했다. '백 번의 동영상보다 한 번의 공연'이 주는 힘이 큰 탓이리라. 공부하느라 바쁜 와중에 언제 그렇게 춤 실력들을 쌓았는지, 간만에 눈이 호사를 누렸다.

가운데 객석 맨 앞 두 줄은 예전에 취재를 한 적이 있는 케임(KAME, Korean Adoptee Mentorship Program at Emory)의 한국계 입양 가족들이 채워 주었다. 마침 이날 오후에 월례 모임이 있어서 대학생 멘토들과 함께 모임 끝나고 곧바로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 입양한 딸과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과 유치원생인 뎁 앤드류스 씨는 동시대의 한국 문화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게 참 좋다고 말했다.

"벌써 몇 년 째 해마다 오고 있는데, 아들이 한국 보이 그룹들의 댄스를 아주 좋아해요. 전통적인 한국 문화 공연은 여기저기서 많이 봤는데, 대중 가요와 댄스 공연을 볼 기회는 많지 않죠. 직접 보면 정말 신이 나요."

행사 시작과 함께 인사말을 전했던 최범용 교수(한국언어학)는 작년에 처음 부임해 왔을 때 "앞으로 잘 지도해달라"며 한국 학생회 소속 학생들이 찾아왔었다고 전한다.

"내가 어떻게 이끌어줄 수 있을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간 우리 한국 학생들이 몇 번 큰 행사를 치르는 것을 보면서 내 역할은 진두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지켜보고 격려하는 것이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행사장에는 세 명의 한국계 교수진이 자리를 함께 했는데, 생각보다 참석 인원이 적어서 나중에 물어봤더니 에모리대를 통틀어 네 명이 전부라고 한다. 그 중 세 명이 한국어 및 한국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어학과도 아직 독립된 상태는 아니고 러시아∙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소속이다. 하지만 한국어 강좌를 신청하는 학생들의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고 교내 신문은 전했다.

300명이 넘는 관객들 중에는 에모리대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드문드문 한인 가족들이 눈에 띄었다. 참가 학생들의 가족인 듯 보였다. 가까이에 큰 한인 사회가 있어 홍보가 잘 됐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었을 텐데, 교내 행사 차원에서 그친 듯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대학 사회가 가진 에너지를 잘 관찰하기만 해도 미국에서 자라나는 한인 2세들에게는 큰 자극이 될 텐데 말이다.

아울러 미국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에게도 행사를 알릴 수 있다면 한국 문화를 진부하지 않게 소개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단군 신화>에서 웅녀로 열연해 인기 만점이었던 글로리아 강 KUSA 회장에 따르면, 케임을 통해 온 입양가족들 외에도 미국인 학생들이 조금 있었고, 특히 중국∙베트남 등 동양계 학생들이 제법 참석했다고 한다.

"남성 댄스그룹과 여성 댄스그룹에는 중국계 학생들도 섞여 있어서 그 친구들이 많이 온 것 같아요."

한국 문화를 직접 즐기고 참여하는 외국인 학생들이 있다니 반가운 얘기다. 덧붙여서, 강회장은 "댄스와 함께 가야금에 대한 관심이 제일 뜨거운 것 같다"고 말하면서 본인도 가야금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고 밝혔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송편과 식혜가 무료로 제공되었다. 덕분에 행사의 여운을 만끽하는 사람들로 교회 앞이 한동안 북적거렸다. 저녁 여덟 시가 다 되었지만, 섬머타임이라 낮이 긴 이곳은 여전히 환했다.


태그:#에모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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