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서울 노량진 고시촌에는 '컵밥'을 파는 노점이 있다. 하지만 이 컵밥도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서울 노량진 고시촌에는 '컵밥'을 파는 노점이 있다. 하지만 이 컵밥도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 이규정

관련사진보기


서울 노량진 고시촌에는 2000~2500원짜리 컵밥이 있다. 컵밥은 노점상에서 판다. 일회용 용기(컵)에 밥과 반찬을 함께 담아주는데 선 채로 5분이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시간과 돈을 아껴야 하는 고시생에게 인기가 많다.

하지만 컵밥이 사라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고시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탓이다. 매출이 줄은 식당 주인 등은 컵밥을 단속해 달라고 구청에 민원을 넣었다. 그리하여 밥값 비싸기로 유명한 서울 하늘 아래, 2000~2500원짜리 컵밥은 설 자리를 잃었다.

노량진 노점상이 구청과 '타협'한 탓에 이미 몇 가지 메뉴는 사라졌다. 하지만 불과 몇 주 전만 하더라도 길거리 컵밥집은 카레덮밥, 오징어덮밥, 제육덮밥, 규동, 김치찌개덮밥 등 웬만한 덮밥 메뉴를 다 갖추고 있었다.

노량진 '명물' 컵밥 사라진 위기

노량진 고시촌 생활 1년 차라는 한 고시생은 "서울에서 한 끼 먹는데 이만큼 싼 데가 어딨나"라며 "값도 싸고 메뉴가 다양해서 이곳저곳 다니면서 먹는다"라고 말했다. 한 컵밥집 주인은 "학생들은 싸고 맛있게 빨리 먹어야 되는데 컵밥은 그런 요건을 다 갖췄다"고 설명했다.

조금씩 자취를 감추는 컵밥. 카레밥과 오징어덮밥을 팔던 컵밥집은 이제 핫바를 팔고 있다. 오므라이스와 소시지를 팔던 노점상 주인은 라면을 팔 계획이다. 그 외의 컵밥집들도 메뉴를 바꿀 예정이다.

도대체 값싼 컵밥을 둘러싸고 노량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 3일 '민주 노점상 전국연합(민노련)'의 노량진 지역장 양아무개씨를 만났다. 양씨는 "고시촌 뷔페식 식당 주인들이 요식업중앙회를 통해 구청에 민원을 넣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양씨는 "컵밥은 잘 팔리는데, 식당은 장사가 안되니까 주인들이 많이 분노했다"며 "(결국 구청에서) 컵밥을 팔지 말라고 우리들에게 통보를 했다"고 밝혔다.

노량진 노점에서 컵밥을 먹는 사람들. 값이 싸 고시생들이 즐겨 먹는다.
 노량진 노점에서 컵밥을 먹는 사람들. 값이 싸 고시생들이 즐겨 먹는다.
ⓒ 이규정

관련사진보기


또 양씨는 "논란의 발단은 '비회원' 노점상 때문이다"며 "그들이 골목까지 진출해 컵밥을 팔아 식당 주인들이 화가 많이 났다"고 책임을 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노점들에게 돌렸다.

이번엔 노량진 고시촌에서 분식집을 운영하는 오아무개씨는 만났다. 오씨의 분식집은 골목 안쪽에 있다.

분식집 유리창에는 '김밥 1000원, 라면+공기밥 3000원'이라는 메뉴가 붙어 있다. 사실 이 정도면 서울에서 가격이 싼 편이다. 그런데 이 골목에는 컵밥 노점상이 3개 있다. 이곳에서는 햄, 계란후라이 등을 얹어주는 컵밥을 1800~3000원에 팔고 있었다.

2004년부터 노량진에서 장사를 했다는 오씨는 "2~3년 전부터 골목에 컵밥 노점상이 들어왔는데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 작년 가을부터 매출이 평균 20~30% 줄었다"며 "지난 2월 구청장 간담회에서 '컵밥 단속'에 대한 민원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구청 "식사류 팔지 말라고 공문 보냈다"

이어 오씨는 "우리는 세금 낼 거 다 내면서 장사하는데 이렇게 피해를 볼 수 없다"며 "군것질하고 식사는 다르다. 길거리 컵밥이 사라지면 다시 장사가 잘 될 거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카레덮밥과 오징어덮밥을 팔던 이 컵밥집은 2주전부터 핫바를 팔기 시작했다.
▲ 메뉴를 바꾼 컵밥집 카레덮밥과 오징어덮밥을 팔던 이 컵밥집은 2주전부터 핫바를 팔기 시작했다.
ⓒ 이규정

관련사진보기


컵밥을 파는 상인들도 컵밥이 인근 식당 매출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인정한다. 민노련 회원들은 비회원들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노점상들은 메뉴를 바꾸려 하나 뚜렷한 대안은 없는 상태다. 식당 주인들은 밥 종류만 팔지 않길 바랐다. 그렇다면 구청은 어떤 입장일까?

동작구청 노점상 담당 부서인 건설관리과 가로관리팀의 한 관계자는 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4월 6일부터 컵밥을 판매하지 말라는 공문을 보냈다"며 "하지만 바로 강제 중지를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본 뒤 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컵밥 노점상 쪽은 지난 5일 구청과 면담을 했다. 면담을 다녀온 직후 양 지역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과거에도 식당 주인들의 민원은 수차례 있었으나 이번은 좀 다를 것 같다"며 "요식업중앙회가 민원을 넣었고 구청장이 직접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량진 노점상인들은 10일에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양 지역장은 "회의를 해도 결국 컵밥은 못 팔게 될 것"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노점상이지만 그래도 하나의 트렌드를 만들고 싶었다. 컵밥은 사실 트렌드가 됐다"며 "식당 매출에 영향을 주는 건 알지만, 컵밥이 사라질 수밖에 없어 아쉽다"고 한숨을 쉬었다.

고시생들이 노량진 거리에서 서서 먹던 컵밥. 어느새 명물이 된 컵밥도 이젠 '추억'으로 남을 듯하다.


태그:#노량진, #컵밥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