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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탑. 뒤로 수로왕비릉이 보인다.
 파사탑. 뒤로 수로왕비릉이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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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비릉에 가면 5층 파사탑부터 먼저 보게 된다. 묘역 안으로 들어섰을 때 왕비릉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사탑은 본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는 이 탑이 본래 '금관(金官)의 호계사(虎溪寺)'에 있었다고 말한다. 김해에 있었던 수로왕의 가야국을 금관가야라 하므로 금관은 곧 김해를 뜻한다. 따라서 호계사는 김해 시내에 있었다.

불교 탄압 심했지만 파사탑 온전해 천만다행

호계사는 1873년에 없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절이 있었던 정확한 위치는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어 아무도 알지 못한다. 성리학을 숭상하고 부처를 불씨(佛氏)로 낮춰 불렀던 조선 시대에 사라져버린 사찰이 워낙 많으니 폐사(廢寺)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한 사람도 없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파사탑이 수로왕비릉 경내로 옮겨져 무사히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파사탑은 삼국유사 중 '금관국 파사탑' 부분에 '수로왕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서역(西域)의 아유타국에서 배로 싣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돌을 써서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아유타국에서 완성되어 바다를 건너온 탑이라는 뜻이다.

삼국유사는 그 근거로 '닭벼슬의 피를 찍어서 (돌에 발라보는) 시험(까지) 했다'고 말한다.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품질이 매우 좋은' 파사탑의 돌에 닭벼슬피를 바르면 핏기가 오랫동안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돌이 없다는 것이다.

파사탑의 돌이 인도에서 생산되는 돌이라는 것 외에, 수로왕릉의 정문에 서로 마주보는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려져 있는 것도 허황후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근거로 여겨진다. 물고기 두 마리를 서로 바라보게 배치하는 그림은 인도 갠지스강 중류의 '아요디아' 지역 일대에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고유 문양(文樣)이기 때문이다.

즉, 허황후가 아요디아(아유타국) 또는 아유타국이 태국에 거느렸던 식민지 아요티야에서 바다를 건너 곧장 가야에 왔거나, 아니면 중국을 거쳐서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아득한 그 옛날 인도의 전통 문양이 가야로 전파될 수 있었겠느냐는 추리인 것이다(중국을 거쳐서 왔다고 보는 견해는 수로왕비의 시호가 '보주태후'라는 데에 근거를 둔다. 중국 사천성의 보주와 지명이 같다는 것).

수로왕릉 정문의 쌍어 문양. 열린 문 사이로 수로왕릉이 보인다.
 수로왕릉 정문의 쌍어 문양. 열린 문 사이로 수로왕릉이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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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비는 인도에서 왔다

허황후가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내용은 삼국유사의 '금관국 파사탑'만이 아니라 '가락국기'에도 실려 있다. 금관국에 당도한 허황옥은 수로왕과 결혼을 하기 직전에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다.'하시면서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를 하늘이 (금관 땅에) 내려보내어 임금자리에 오르게 했으니 그는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여전히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 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찐蒸대추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서린蟠복숭아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수로왕비릉 묘역 전경. 오른쪽 앞에 파사탑 보호 비각이 보인다.
 수로왕비릉 묘역 전경. 오른쪽 앞에 파사탑 보호 비각이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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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이 대답했다.

"나는 출생할 때부터 신성하였기 때문에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고 했지만 그 청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오.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나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오."

수로왕비인 허황옥은 아들 열과 딸 둘을 낳는다. 그녀는 157세까지 산다(189년 3월 1일). 남편 수로왕은 부인보다 한 살 더 많은 158세에 세상을 뜬다. 하지만 수로왕이 왕비보다 10년 뒤에 타계하므로(199년 3월 23일), 나이는 수로왕이 허황옥보다 9살 어렸다. 두 사람이 결혼할 때(48년) 허황옥은 16세였고 수로왕은 7세였다. 

수로왕이 7세에 결혼한 사실을 두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은 없다. 수로왕은 태어난 지 10일만에 키가 9척(270cm)이 되고, 15일만에 임금자리에 오른 신화적 인물이다. 그런 그가 7세에 결혼을 하였다고 해서 무에 이상할 것도 없다. 

수로왕보다 9살 연상 허황후 10년 먼저 타계


허황옥이 수로보다 아홉 살 연상인 것도 전혀 문제가 아니다. 옛날에는 흔히 아내가 남편보다 나이가 많았고, 그런 풍속은 20세기 초반까지도 보통이었다. 아내는 아기를 낳아야 하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구지봉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돌아본 수로왕비릉
 구지봉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돌아본 수로왕비릉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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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은 아유타국의 공주 출신답게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정치적 능력도 대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삼국유사는 '왕후의 내조의 공을 비유해서 말하자면, 도산이 하나라 우왕을 돕고 당원이 순임금을 도와 요씨를 일으킨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특히 허황옥이 157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백성들이 보인 반응을 기록한 부분은 그녀가 어떤 지도자였는지를 분명하게 증언해준다.

(189년)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하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여 처음 배에서 내리던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땅이 꺼진 듯 슬퍼하였다고 하니, 그만하면 국모(國母)답게 백성들의 뜨거운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리고 그녀는 구지봉 동북언덕에 묻혔다. 지금의 무덤이 타계 당시 그녀가 묻혔던 바로 그 자리이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10월부터 2012년 2월 사이에 김해 지역을 여러 차례 답사했습니다.



태그:#수로왕, #파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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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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