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했던 한 시대의 막이 내렸다. 프로농구 명문 전주 KCC가 다사다난했던 '허재 호' 1기를 뒤로 하고 이제 새로운 시대를 대비한 과도기에 접어들었다.

전주 KCC는 11일 울산동천체육관에서 열린 '2011-2012 KB국민카드' 프로농구 울산 모비스와의 6강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66-79로 패하며 3연패로 탈락이 최종 확정됐다. 지난 3년연속 챔프전에 올라 두 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던 KCC는 5년 만에 4강진출에 실패하는 아픔을 맛봤다.

지난 3년간 단기전의 강자로 명성을 떨치며 정규시즌보다 플레이오프에서 더욱 강한 모습을 보였던 KCC지만, 올해는 정규시즌 막판 부상을 당한 전태풍의 공백에, 높이 강화를 위하여 득점력이 좋던 드숀 심스를 포기하고 대체로 선택했던 자밀 왓킨스 카드가 실패로 돌아가며 모비스의 조직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KCC가 플레이오프에서 1승도 거두지 못하고 3전 전패로 물러난 것은 07~08시즌 4강플레이오프 서울 삼성전 이후 4년만이다.

특히 이날 경기가 더욱 여운을 남긴 것은 KCC에 있어서 '한 시대의 마감'을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KCC는 올해를 끝으로 주축 선수들 상당수가 팀을 떠나며 변화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우선 전태풍은 귀화혼혈 선수 규정에 따라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무조건 다음 시즌에는 다른 팀으로 옮겨야 한다. 국내 최장신 센터인 하승진 역시  병역 해결을 위해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해야 한다. 불혹을 바라보는 최고참 추승균은 은퇴의 기로에 서 있다. 이외에도 백업 선수들 상당수가 FA로 풀린다. 심지어 사령탑인 허재 감독마저 올해를 끝으로 KCC와의 계약이 만료된다. 다음 시즌 성적을 장담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팀 구성과 색깔 전체가 큰 폭으로 물갈이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꼴찌에서 우승까지, 파란만장했던 '감독 허재'의 7년

 허재 현 KCC감독은 지도자가 되어서도 여전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허재 KCC감독 ⓒ 전주 KCC


흔히 스타출신 지도자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속설이 있다. 허재 감독이 KCC에서 보낸 지난 7년의 시간은 농구대통령으로 불린 최고의 스타 선수 출신 허재가 어느덧 KBL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진화해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허재 감독의 현역시절 못지않은 드라마틱한 롤러코스터의 연속이었다.

허재 감독은 2003~2004 시즌을 마치고 TG(현 동부)에서 은퇴하며 현역생활을 마감한 이후 1년간의 미국 코치연수를 거쳐 2005년부터 KCC의 지휘봉을 잡았다. 감독 허재의 탄생은 등장부터 큰 화제를 몰고왔다. 한국농구가 배출한 역대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 마침내 프로 지휘봉을 잡게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랬지만, 은퇴 후 이렇다할 코치 경험도 변변히 없이 너무 빨리 감독을 맡았다는 우려와 함께, 친정팀 TG도 아니고 전신인 현대 때부터 현역 시절 최대의 라이벌로 꼽혔던 KCC의 지휘봉을 잡았다는 것도 의외로 여겨졌다.

허재 감독은 처음 KCC의 지휘봉을 잡았을 때 전임 신선우 감독이 구축해놓은 전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상민, 추승균, 조성원, 심지어 외국인 선수 찰스 민렌드까지 경험많은 선수들이 건재하며 허재 감독은 첫해(05·06시즌) 4강에 올라 무난한 데뷔 시즌을 보낼수 있었다.

하지만 위기는 두 번째 시즌부터 찾아왔다. 주포 찰스 민렌드가 LG로 이적하고 조성원이 은퇴하며 전력이 급격히 약화된 KCC는 이상민과 추승균마저 연이어 장기간의 부상을 당하며 팀 창단 이후 처음 꼴찌로 수직 추락했다. 허재 감독에게도 현역 시절을 통틀어 처음으로 당해보는 굴욕이었다.

그러나 위기 뒤에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고, 꼴지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덕분에 이듬해 열린 신인드래프트에서 1순위를 차지하는 행운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해 NBA에서 국내 복귀를 결정한 하승진의 등장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허재 감독은 신인드래프트에 이어 이듬해 귀화혼혈선수 드래프트에서도 1순위를 차지하며 신이 내린 '뽑기 운'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팀을 재건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꼴찌를 차지한 다음 시즌에는 FA로 최대어 서장훈과 임재현을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으나 이 과정에서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던 이상민이 보호선수에서 제외되며 결국 삼성으로 이적하게 되어, 허재 감독은 팬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들어야 했다. KCC는 그해 정규리그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이상민이 분전한 삼성에 3전 전패로 완패하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듬해는 서장훈과 하승진의 만남으로 '높이의 농구'를 구축하여 정상 도전에 나섰지만 초반 기동력에 문제가 있는 두 선수의 공존 실패로 팀성적은 오히려 추락했고 결국 서장훈은 트레이드를 자청하여 팀을 떠났다. 여기에 하승진의 부상이 겹쳐 KCC는 시즌중반 연패 수렁속에 한때 8위까지 추락하기도 했다. 허재 감독의 지도자 인생에서 최대 위기였다.

하지만 현역시절에도 위기상황에서 누구보다 강했던 허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극적인 반전에 성공한다. 노장 추승균과 외국인 선수이던 마이카 브랜드의 활약에, 서장훈과 맞바꾸어 전자랜드에서 고전하던 루키 강병현을 트레이드로 영입해 비교적 단시간에 팀 색깔을 바꿨다. 또 부상에서 복귀하여 KBL에 적응을 마친 하승진이 마침내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분위기 전환에 성공한 KCC는 그해 정규시즌을 3위로 마쳤고, 플레이오프에서는 상위팀을 연파하며 결국 우승까지 했다.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 포함 무려 71경기를 치르는 대장정 끝에 따낸 극적인 반전 우승이었다.

이듬해는 귀화혼혈선수 1순위로 포인트가드 전태풍까지 가세하며 마침내 '허재 판 KCC 왕조' 1기가 완성됐다. 2010~11시즌에는 절친 강동희 감독의 동부를 꺾고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정점을 찍었다. KCC는 하승진이 합류한 08~09시즌부터 3년간 정규시즌 성적은 3위에 그쳤으나 늘 정규시즌 중반 이후부터 진가를 발휘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매번 챔피언결정전까지 오르며 'KBL판 슬로우 스타터' 혹은 '단기전의 강자'라는 애칭을 얻었다.

허재 감독의 리빌딩은 어느 정도 행운이 따른 측면도 있지만, 감독의 능력 역시 과소평가할 이유는 없다. 탁월한 신체조건에 비하여 기본기와 경험이 부족하고 부상위험이 잦은 하승진을 팀의 중심으로 키워낸 것은 허재 감독의 최대 공로다. 이밖에도 강병현이나 임재현같은 선수들을 영입했고, 이중원, 강은식, 유병재, 김태홍, 정민수 같은 식스맨들을 두루 활용해 KBL에서 가장 공격적인 농구를 펼치는 팀으로 조련해냈다.

2005년부터 지휘봉을 잡은 허재 감독은 이제 어느덧 KBL에서도 손꼽히는 중견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현역 지도자 중 KBL에서 한 팀에서만 오랫동안 지휘봉을 잡고 있는 것은 2004년부터 울산 모비스 사령탑을 맡고 있는 유재학 감독에 이어 두 번째다. 2009년 텐진 아시아선수권과 2011년 우한 아시아선수권에서 지휘봉을 잡아 국가대표 감독도 두 번이나 역임했다.

다사다난한 여정을 딛고 어느덧 지도자로서도 성공가도를 걸었던 허재 감독이지만, 다음 시즌은 지도자 인생에서 또 한번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허재 감독이 만일 KCC와 재계약하게될 경우 이제와는 전혀 다른 고생길이 기다리고 있다. 현역시절부터 항상 선수복이 끊이지 않았던 허재 감독이 그야말로 차포를 모두 뗀 상황에서 원점부터 새롭게 팀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감독 허재의 지도력이 진정한 시험무대에 오르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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