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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한국만화박물관에서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유해매체 지정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다.
 27일 한국만화박물관에서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유해매체 지정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다.
ⓒ 김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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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인터넷에 "일본을 공격한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누리꾼들은 내용에 관계없이 모든 질문에 "일본을 공격한다"고 대답하고, 그 난데없음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았다. "평행사변형의 넓이가 38.786㎠이고, 밑변의 길이가 4.73cm라면 높이는 몇 cm인가?"라는 질문에 "일본을 공격한다"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최근 웹툰 23개를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한 것을 보며 철 지난 유행어를 떠올렸다. 지난해 12월부터 학교폭력이 논란이 된 가운데 <조선일보>는 1월 7일 뜬금없이 웹툰 <열혈초등학교>가 "학교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고 나섰고, 방심위는 "웹툰의 모니터링을 강화하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웹툰이 갑자기 학교폭력의 주범으로 떠오른 가운데 7일 방심위는 '청소년유해매체물 결정 관련 사전 통지 및 의견제출 안내'라는 공문을 4개 포털사이트 대표 앞으로 발송했다. 그야말로 "웹툰을 공격한다"였다.

만화계는 "방심위의 결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며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만화가협회와 우리만화연대 등은 18일 '방심위심의반대를위한범만화인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구성하고 공식블로그 '노컷웹툰' 개설, 기자회견, 공청회 등의 활동을 통해 방심위의 웹툰 심의에 대응하고 있다.

27일 오후 3시 한국만화박물관에서 방심위의 심의에 반대하는 공청회가 열렸다. 이날 공청회에는 윤태호·백정숙 공동비대위원장, 박인하·서찬휘 비대위 집행위원, 이종필 변호사 등이 참가해 방심위 조치의 문제점을 살피고 향후 행동 방향을 논의했다. 다음은 공청회 내용을 대담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청소년에 악영향 끼친다는 증거? <뉴스데스크> 실험!

공청회가 끝나고 비상대책위원회 간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백정숙 비대위원장, 윤태호 비대위원장, 박인하 비대위 집행위원.
 공청회가 끝나고 비상대책위원회 간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백정숙 비대위원장, 윤태호 비대위원장, 박인하 비대위 집행위원.
ⓒ 김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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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심위는 학교 폭력의 원인이 웹툰에 있다고 하는데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통계자료나 연구가 있나?
박인하 "만화뿐 아니라 게임 등의 미디어가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어떤 발표에도 제대로 된 연구조사나 통계는 없었다. MBC <뉴스데스크>가 PC방 전원을 끄고 게임이 청소년의 폭력성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했던 것이 가장 제대로 된 실험이다.(웃음) 오히려 교육학 쪽에서 만화 매체가 청소년에게 모방 충동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연구는 몇 편 봤다."

서찬휘 "방심위 쪽에서는 신고가 들어와서 거기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한다. 유해매체 선정에 아무 근거가 없고, 심지어 유해매체 선정 사유가 모두 똑같다. 어느 장면의 어떤 대사가 문제라고 했으면 이해는 됐을 텐데, 이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 영화만 해도 특정 장면이 문제가 있으면 그걸 자르거나 모자이크해 등급을 조정한다. 그냥 뭉뚱그려 '이 작품은 유해하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박인하 "전문성도 없는 방심위가 갑자기 심의를 하면서 생긴 문제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간윤)은 그래도 몇 쪽의 어떤 장면이 문제가 된다고는 말을 했다. 영화만 해도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심의를 하기 때문에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방심위는 전문가가 없어서 그런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 그렇지만 웹툰에 청소년이 보기 부적절한 내용이 있다면 유해매체로 지정하는 것이 꼭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나.
서찬휘 "19금과 유해매체물의 차이를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네이버나 다음에서도 로그인해야 볼 수 있는 웹툰이 있지만 청소년유해매체는 그 자체로 유해물로 고지, 공시된다. 광고가 제한되고, 단행본 출간 때 법으로 정해진 크기의 빨간 딱지를 붙여야 하고, 별도의 서재를 갖춰야 하는 등 판매에서 매우 불리하다. 이번에 유해매체로 지정된 이정규 작가의 <전설의 주먹>은 인쇄 직전에 인쇄를 멈췄다.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수거되면 굉장히 큰 피해가 생기기 때문에 멈춘 것이다.

물론 유해매체 지정 안 되게 맞춰서 그리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그릴 때마다 어느 수위로 그릴지를 고민하게 된다. 벼룩실험이라는 것이 있다. 벼룩을 상자에 가둬두면 나중에 상자에서 꺼내도 벼룩이 상자 높이까지밖에 못 뛴다. 이대로라면 우리가 벼룩 꼴이 된다."

박인하 "19세 이상만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반대 안 한다. 문제는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며 격리하고 다 가려야 하는 것이다. 성인 만화가 모두 격리 수용되어야 하는 만화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청소년 문제를 만화·게임 탓으로 정리하는 것은 간편한 희생양 만들기"

- 이번 사태를 이야기하면서 1997년 청소년보호법(청보법) 사태를 많이 이야기한다. 그때도 학교폭력의 원인이 일본만화라고 하면서 정부가 청보법을 제정했고, 이번 심의의 근거도 청보법에 있다.
박인하 "1990년대에 <미스터블루><트웬티세븐><빅점프><화이트><마인><나인> 등의 성인만화잡지가 있었는데 청보법이 등장하면서 성인만화가 청소년유해매체가 되고 폐간됐다. 우리는 10여 년간 성인만화 잡지가 없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청보법이 출판만화를 망가뜨려 온 것이다. 일본에는 170여 개의 만화 잡지가 있는데, 거기 연재하는 작가들은 잡지에 따라 자율적으로 적합한 수위의 만화를 그리고 소비하기 때문에 일본만화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

저는 웹툰이 그랬었다고 생각한다. 웹툰이 유해매체로 지정될 수 있다면 어떻게 연쇄살인 같은 소재로 만화를 그릴 수 있었겠나. 우리가 뽀로로만 그릴 수는 없다. 엉덩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엉덩이를, 연쇄살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연쇄살인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반사회적인 게 아니다. 창작의 자유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토양이 될 수 있다. 이번에 유해매체로 지정된 작품들을 재미있게 봤다. <전설의 주먹>은 절대 일진이 돼서 싸움을 하면 안 된다는 그런 교훈적인 내용이었다.(웃음) 역시 유해매체로 지정된 <더 파이브>도 너무 재미있었다.

웹툰을 보면서 이런 발랄한 상상력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생각했는데, 이 사태를 겪으면서 명확하게 이해하게 됐다. 심의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 연쇄살인, 훔쳐보기 같은 소재는 예전의 잡지만화 시절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던 주제다. 웹툰이라는 심의와 분리돼 있었던 공간에서 새로운 작가들이 새로운 소재를 탐구하면서 이런 재미있고 발랄한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심의의 굴레에 한번 빠져들면 벗어날 수 없다.

지난 만화의 기억을 되돌아봐도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순간 만화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80년대에 우리 만화가 가장 발전했다고 한다. 6월 항쟁 후 창작의 자유가 풀리면서 최초의 순정만화 잡지 <르네상스>가 창간되고, <북해의 별><아르미안의 네 딸들> 같은 걸작이 나올 수 있었다. 선배 작가들이 걸었던 고난의 길을 '웹툰'이 걷지 않기 위해서는 작가들이 이런 심의가 우리 밥그릇을 걷어차는 행위라는 것을 인식하고 똘똘 뭉쳐야 한다." 

- 1997년에도 학교폭력의 원인을 만화 탓으로 돌리고 탄압했지만 학교폭력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또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왜 사회적인 문제를 자꾸 만화 탓으로 돌리는 것일까.
박인하 "정상적인 사회라면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하고 고민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군인이 무슨 사고를 쳤으면 그 병사가 휴가 나가서 무슨 비디오를 빌렸나 무슨 만화를 봤나 어떤 게임을 주로 접속했나를 보고 그쪽으로 몰고 나간다. 1997년에 한참 일진회가 일본만화를 보고 따라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런데 사실은 일진회라는 명칭이 일본 만화에서 사용됐던 것이라는 기사가 일본 만화를 보고 일진회를 만들었다는 것으로 확대 재생산됐다."

- 최근 '빵셔틀'의 '셔틀'이라는 말이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학교폭력의 원인이 게임이라는 것과도 비슷한 것 같다.
박인하 "그렇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바꾸거나 고치기 위해 합리적인 토론을 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범인을 만들려는 데 있다. 사실 청소년 문제는 교육, 전체 사회의 맥락에서 봐야 하는 복잡한 문제다. 이것을 만화와 게임의 문제로 정리하는 것은 간편한 희생양 만들기의 방식이다."

- 자율 규제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 이야기를 많이 한다. 미국은 어떠했나.
박인하 "미국에서 1950년대에 범죄 만화와 호러 만화가 본격 등장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때 프레드릭 웨담이란 사람이 <순수에의 유혹>이란 책을 내서 이런 만화가 아이들에게 유해하다고 주장했다. 보수적인 정계도 이에 동참해 만화 청문회가 열렸고 만화를 불태웠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사들이 코믹스코드(CCA)라는 것을 만들어 자율적으로 심의하겠다고 했는데 사실은 자율적이지 않았다. CCA에 맞추다 보니 우리가 아는 그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하는 못된 짓이 아이들 성적표를 훔쳐가는 것이었다.(웃음) 그 만화를 누가 보나. 창의력과 만화 산업 발전이 저당 잡힌 거다. 1980년대에 출판사들이 CCA를 받지 않는 만화를 출판하면서 그런 상황을 벗어났고 <다크나이트><킬링조크> 같은 걸작들이 나왔다."

밝고 명랑하게 아이들의 성적표를 훔치고 도망가는 조커. 코믹스코드에 맞춰서 만든 만화다.
 밝고 명랑하게 아이들의 성적표를 훔치고 도망가는 조커. 코믹스코드에 맞춰서 만든 만화다.
ⓒ 디씨 코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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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 등급부여가 대안... 적정한 등급 부여해 유통하면 돼"

- 이런 식의 심의는 문제있지만 심의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생각하는 대안이 있다면.
박인하 "방금 미국 이야기했는데, 1980년대부터 출판사들이 CCA를 이탈했고 이제 완전히 CCA가 무너졌다. 미국은 창작자와 유통사가 자율적으로 12세, 15세, 18세 등의 등급을 정하고 거기에 맞게 유통한다. 우리도 자율적으로 등급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이 보기에 부적절하면 적정한 등급을 부여해 유통하면 된다. 사회적으로 어느 만화가 문제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는 만화진흥위원회가 만들어지면 그 내부에, 혹은 간윤 등에 분쟁조정위원회를 만들어 거기서 등급을 조정할 수도 있다. 작가와 유통사가 자율적으로 등급을 부여하고, 그래도 해결 안 되면 분쟁조정위원회에서 해결하면 된다."

- 정말 저질적인 만화가 있을 수도 있다. 자율 규제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박인하 "래리 플린트란 사람이 있다. <허슬러>라는 저질 잡지의 발행인이었는데, 그분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많은 분들이 싸웠다. 제가 동의 못 하는 작품이라도 표현의 자유를 침해받는다면 끝까지 싸워줄 것이다."

백정숙 "저도 만화를 보면 아이에게 권하고 싶은 것도 있고, 권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내 선택권을 어떤 기관에 넘겨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 모든 만화가 항상 다 좋을 수는 없지만 좋지 않은 만화라면 독자들의 선택에 의해 시장에서 사장시킬 수 있다. 지금처럼 권력을 가진 몇 사람이 만화에 대한 이해도 없는 상태에서 심의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권,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 자율 등급부여를 하려면 결국 청소년보호법을 개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박인하 "그렇다. 우리는 1997년 체제가 자연스럽게 사그라들고 <천국의 신화> 때문에 기소됐던 이현세가 '혐의 없음'으로 풀려나면서 문제가 해소됐다고 생각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거다. 이번에 자율적인 등급 부여로 바꾸지 않으면 몇 년 뒤에 계속 새로운 매체가 나올 때마다 계속 이런 문제가 나올 것이다."

- 1997년 청보법에 맞서 싸울 때는 패배했다. 이번에는 이길 수 있을까.
윤태호 "그 당시에는 논의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지속적으로 이 일을 할 조직력이 없었고, 젊은 작가 모임은 만들었지만 역할분담이 잘 안 됐다. 더 이상은 그런 실패를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지점이 같아야 한다."

백정숙 "1997년과는 다르다. 당시는 굉장히 비조직적이었고, 감성적 대응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부터 법학자·변호사가 합류하면서 논리 싸움을 하고 있다. 자율 심의 관련해서는 만화연구가·법학자 등이 함께 대오를 꾸려 작가들의 창작환경, 웹툰과 출판만화의 차이와 공통점 등까지 검토해 향후 대응을 생각하고 있다.

지난 14일에 처음으로 공문 이야기를 들었는데, 일주일 만에 오늘 공청회까지 열었다. 한국 만화사에서 유례없는 발빠름, 기민함을 보여주고 있다.(웃음) 사람들이 심의로 청소년의 폭력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굉장히 잘 알고 있고, 만화계 밖에도 자기들이 할 일이 있으면 기꺼이 하겠다는 사람이 많다. 처음에는 '1997년처럼 되지 않을까' 싶어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대오가 꾸려지는 것을 보면 굉장히 힘이 된다. 오늘 여러분들 만나서 즐거웠고, 다음에 또 오자.(웃음)"

덧붙이는 글 | 김경훈 기자는 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웹툰 , #방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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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한겨레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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