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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수목드라마 <해를 품은 달>.
 MBC 수목드라마 <해를 품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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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수목드라마 <해를 품은 달>(아래 <해품달>)은 영리한 드라마다. 사극이란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은 역사에서 실존했던 사람이 아니다. 극중 주인공 훤(김수현 분)의 아버지는 성조대왕이지만 조선 역사상 '성조'로 칭해졌던 왕은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허구인 세계가 바로 <해품달>의 공간이다.

껍데기를 들춰내고 내용물을 들여다 보면 기실 <해품달>은 현대극에서 이미 오랜 시간 다뤄져왔던 클리셰(진부한 표현을 가리키는 문학용어) 덩어리의 멜로드라마다.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하루아침에 처지가 뒤바뀌고, 자기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연인도 못 알아보는 여주인공, 첫사랑을 잊지 못해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외롭게 살아가는 남자 주인공, 시간이 흐른 뒤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반복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두 사람, 그리고 서서히 되찾아가는 기억….

출생의 비밀, 불륜, 재벌과 더불어 한국 드라마의 최고 병폐 중 하나로 꼽히는 '기억상실증'이란 테마를 전면에 내세운 <해품달>. 그러나 <해품달>은 종방을 향해 치닫는 지금까지도 그 흔한 '막장' 소리 한 번 듣지 않으며 순항하고 있다. 오히려 최초의 '궁중 로맨스' 사극으로 사극 장르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이 대목에서 '왜 굳이 사극이어야 했을까?'에 대한 답이 나온다. 없는 왕을 만들어내 적잖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면서까지 사극이어야 했던 이유는, 조선이라는 시대적 배경 안에서는 식상하고 막장스러웠던 설정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를 덮어 써 훨씬 현실감 있어진 재벌 사모님

현대극에서의 재벌 사모님 캐릭터는 조선이란 시대를 덮어쓰고나서 훨씬 현실감이 커졌다.
 현대극에서의 재벌 사모님 캐릭터는 조선이란 시대를 덮어쓰고나서 훨씬 현실감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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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현대 멜로드라마에서 캔디 여주인공을 아들의 짝으로 반대하는 재벌 사모님의 일관된 행태는 일견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아무리 돈이 계급이 되는 사회라지만 저렇게까지 집요하게 굴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여지가 있었다. 물론 으레 그런 상황에선 아들의 짝으로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비슷한 수준의 집안에서 나고 자란 또래 여성이 등장하기 마련이어서 영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이 돈봉투 들이미는 선을 넘어서 갖은 모략과 협박, 물리력 행사의 수준으로 돌입하게 되면 그때부터 드라마는 조금씩 설득력을 잃어간다. 그때부터는 리얼리티와 개연성을 따지는 대신 '그런 드라마니까'라고 최면을 걸며 시청자는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을 굳이 납득하려 들지 않는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재주가 탁월한 작가의 드라마라면 더욱, 그저 믿고 보는 것이다. "뭐 어때? 어차피 드라마인데"라고 말하면서.

반면 <해품달> 속에서 이런 설정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대왕대비(김영애 분)는 자기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는 인물이다. 아들과 그 아들이 다스리는 조선보다, 윤씨 집안의 가세가 더 우선인 여자. 그런데 역사상 이런 왕비와 대비는 적지 않았다. 왕인 남편과 장차 왕이 될 아들의 안녕보다 가문의 안녕을 중시해 집안사람들을 요직에 앉히고 전횡을 휘둘렀던 대비는 역사책에서 꽤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역모의 위험 속에서 몇 번이나 구해준 은공도 잊은 채 외척의 꼬리표를 붙이고 자신과 가문을 거추장스럽게만 생각하는 왕이라면, 그리고 그 왕이 보위를 이을 세자의 짝으로 외척과 사사건건 부딪히는 강직한 신하의 딸을 점찍었다면, 제아무리 아들과 손자라 할지라도 괘씸하고 미운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떤 수를 써서든 정적의 딸 대신 자기 가문의 여자를 세자빈으로 들이고자 하지 않았을까?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짓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바로 <해품달>이 사극이기 때문이다. 손자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으면, 단순히 금전적인 이득을 포기하고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유지하지 못하는 정도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정쟁에서 패하는 그 순간 원지로 유배되고, 재수 없으면 사약을 받아 멸문으로까지 이어졌던 조선시대였기에 납득이 가능했던 것이다.

첫사랑에 대한 정조... '왕'이기에 더 로맨틱하다

중전과의 합방을 거부한 채 첫사랑에 대한 마음을 지우지 못하는 훤을 여성 시청자들은 응원할 수밖에 없다.
 중전과의 합방을 거부한 채 첫사랑에 대한 마음을 지우지 못하는 훤을 여성 시청자들은 응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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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비롯한 대소신료들과 왕실 사람들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왕과 중전의 합방에만 매달리는 것도 사극이기에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기존 현대극에서 로맨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수록 주인공은 열 일 제쳐두고 오직 사랑 하나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주변인물들은 그 사랑의 동조자 혹은 장애물로서만 기능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시청자들은 "실장님이 일은 언제 하고 만날 사랑타령이냐?"며 극의 떨어지는 현실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사극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용납된다. 전제 국가에서 왕이 아들을 낳아 후사를 잇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칠거지악 중 하나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명분이 되던 시대였다. 하물며 왕이 아닌가. 그렇기에 영의정을 비롯한 대소신료들과 대왕대비 등의 왕실 웃전들이 각자의 본분을 제쳐두고 오로지 합방에만 매달리며 그것에 방해가 되는 월(한가인 분)을 괴롭히는 대목이 이상하지 않다.

월을 향한 훤의 사랑, 그리고 정조 관념은 <해품달>의 로맨스 기능을 극대화하는 장치이며 여성 시청자들을 붙잡아두는 최고의 장점이다. 왕의 성관계는 개인의 성욕을 충족시키고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려는 본능을 넘어선, 국가의 안녕과 체제의 존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중대사다. 그렇기에 중전과의 합방일을 잡는 데 별자리를 보고 액받이 무녀까지 들여 왕의 원기를 보살피는 '수선'을 떠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훤은 끝까지 뚝심 있게 자신의 정절을 지켜낸다. 정적의 딸이자 위선의 가면을 뒤집어쓴 중전(김민서 분)이 미워서 그러는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슴 속에 담아둔 첫사랑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전의 귀에 대고 "그대와 그대의 가문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니 내 마음까지는 바라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훤을 보며 넘어가지 않을 여성 시청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다른 누구도 아닌, 왕이 그렇게 말하는데 말이다.

로맨스 드라마로서의 가능성까지 연 <해품달>

백마 탄 왕자님과 캔디 여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는 매력적인 소재이나 사골국물처럼 우려낸 하나의 패턴만으로는 그 한계가 뚜렷했다. 불륜과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증이란 소스를 뿌려도 좀처럼 그 맛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드라마는 변하기 시작했다. 청순가련형에서 벗어나 숫제 남자 주인공을 위기에서 구해주는 드라마(<시크릿 가든>)가 나오는가 하면, 아예 선악이 모호한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로열 패밀리>)도 그려졌다.

그리고 <해품달>이 등장했다. 식상하고 개연성 떨어지며 막장스러웠던 여러 장치와 캐릭터에 사극이란 옷을 입혀 한결 자연스러워 보이게 했다. 왕족과 양반들의 권력쟁투가 이처럼 로맨스에 딱 어울리는 보조 장치로 쓰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해품달>은 사극의 새 가능성만 연 것이 아니다. 로맨스 드라마의 새 가능성 또한 열어젖혔다.


태그:#해를품은달, #김영애, #김수현, #한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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