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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콜텍 해고노동자로 이루어진 밴드 '콜밴'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로 이루어진 밴드 '콜밴'
ⓒ 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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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화요일 서울 공덕동 문화연대 교육장에서는 콜트·콜텍 해고자들이 만든 밴드 '콜밴'이 연습을 한다. 14일 그들의 연습실에 다녀와 이 기막힌 밴드의 탄생에 대한 글을 쓰려던 차에 반가운 문자가 날아들었다.

콜트·콜텍 대법원 판결 날짜가 23일로 잡혔다고 합니다. 2년 5개월 만의 대법 판결 꼭 이기겠죠? 다들 응원해주세요!

지든, 이기든 빨리 대법판결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 버티기가 너무 힘들다고 기약 없는 재판을 기다리며 한숨 쉬던 해고자들을 막 보고 온 터라, 그 문자가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무엇이든 반복되면 무감해지는 게 인지상정인지. 10년 전만 해도 500일 정도의 싸움이면 엄청난 장기투쟁이었고, 20년 전에는 128일, 68일 파업이 그해 최장 파업투쟁으로 기록될 정도로 '장기'파업의 기준이 달랐다. 이제 500일, 1000일은 이른바 '장투(장기투쟁)사업장'이라고 명함도 못 내밀게 되었다.

얼마 전 학습지노조 재능지부는 복직투쟁 1500일을 가뿐하게 넘어섰고, 콜트·콜텍 노조는 1800일을 이미 한 달 전에 넘겼으며, 구미의 코오롱 해고자들은 날수를 셀 수 없어 햇수로 8년째 해고철회 싸움을 벌이고 있다.

불과 20년, 그 세월 동안 도대체 우리에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불릴 만큼 성장한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부끄러운 기록의 경신이 이어지고, 그 기록에 이토록 무감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으로 살고는 있는 것일까?

햇수로 만 5년, 날수로 1848일. 어느 날 출근해보니 잠겨버린 공장 문 앞에 주저앉아버린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복직투쟁 기간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해서 닫힌 공장 문을 멍하니 바라봐야 했던 그들. 인천의 콜트악기 노조 56명, 대전의 콜텍 노조 67명은 모두 하루아침에 정리해고를 당했다.

알짜배기 흑자기업, 상장도 하지 않은 채 앉은자리에서 수십억씩 이윤을 남기던 국내 굴지의 악기회사인 ㈜콜트의 박영호 사장은, 감히 자기의 공장에 노조를 만든 노동자들을 용납할 수 없다며 마음대로 폐업을 해버렸다.

사장 한 명의 분노쯤이면 노동자와 그 가족들 수백 명의 삶이 달린 공장 2개를 하루아침에 닫아버리는 일이 가능했다. 고단한 투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30개가 넘는 소송을 진행하며, 양화대교 옆 15만볼트 송전탑에 올랐고, 본사점거투쟁으로 순진한 시골의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전과자가 되었다.

45m 고공 농성장에서 지회장은 삭발식을 했고, 인천 공장의 어느 조합원은 분신을 시도했다. '딸라빚'을 내 해외 악기쇼를 찾아다니며 6차례 원정투쟁을 다녀왔다. 2009년 고등법원에서 부당해고라는 판결을 받고는 곧 복직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잠시, 무려 2년 5개월 동안 묵묵부답인 대법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5년 넘는 세월 동안 이들이 해보지 않은 것이라곤, 죽는 것, 딱 그거 하나였다. 

하루아침에 문 닫은 공장... 그리고 길에서 보낸 5년

'콜밴'의 멤버 장석천씨(기타)
 '콜밴'의 멤버 장석천씨(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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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반이 다 되도록 판결할 기약이 없는 대법원은 피를 말리고, 사람들의 무관심과 막막한 생계의 압박도 여전했다. 죽을힘을 다해 싸워도 제자리인 상황, 무언가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던 차에 이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즐겁게 싸우기로, 그러기 위해 밴드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이 직접 기타를 연주하는 드라마틱한 노동자밴드, 우리나라 최초의 해고자밴드,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만든 밴드 '콜밴'은 이렇게 태어났다.

결성한 지 석 달도 안 된 콜밴은 벌써 데뷔를 하고 원정공연을 몇 차례 했다. 지난해 12월, 2011년 마지막 콜트·콜텍 수요문화제에서 이들은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할 줄 아나>를 부르며 멋지고 뭉클한 데뷔 무대를 선보였다.

"떨리지. 무대 설 때마다 덜덜덜 떨려. 쌍차(쌍용차) 두 번 서고, 대우자판 한 번, 재능에서 한 번 그렇게 공연했는데, 맨 처음 밴드 해보자 했을 땐 이렇게까지 기타 치는 게 어려울 줄 몰랐지.(웃음) 평균 나이 50대들인데, 하면 할수록 어렵더라고. 처음 한두 번은 어설프고 실수해도 동지들을 즐겁게 해줬는데, 계속 틀리면 그게 스트레스가 되더라고. 쌍차 집회 때도 박자 놓치고 서로 얼굴 쳐다보는데 황당했지.(웃음)

그래도 밴드를 하면서 더 알아주는 것도 있어. 지나가면서 '어, 콜밴이다! 해주고, 방송에서도 뜻밖에 인터뷰도 하자 그러고. 지금까지 한 거보다 콜밴 하면서 받은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어. 현장에서 기타 만들던 50대 사람들이 기타를 만들다가 기타를 연주하는 게 사람들한테 생소한 느낌을 주는가봐. 그래서 지금 견제가 많아(웃음). 현대차비정규직지회도 밴드 활동을 시작했고. 방심하면 큰일 나겠다고 농담하는 동지도 있고."(장석천, 43, 기타)

2월 11일, 3차 희망텐트를 치기 위해 모인 평택역 집회, 가만 있어도 손끝이 시리고 몸이 오그라드는 추운 날씨에 이들은 공연 리허설로 분주했다. 손끝이 시린지 어떤지, 날씨가 추운지 어떤지도 몰랐다고 한다.

잔뜩 긴장하고 본무대에서 <여행을 떠나요>와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를 훌륭하게 소화했다. 열광적인 앵콜 요청이 쏟아졌지만, 달랑 두 개뿐인 레퍼토리를 다 부른 터라 '대략난감'. 결국 앵콜곡은 이인근 지회장이 원정투쟁에서 부른 <땡벌>을 기계 반주에 맞춰 불러야 했다.

콜밴은 요즘 빈약한 레퍼토리를 벗어나기 위해 세 번째 곡을 맹렬하게 연습 중이다. 이들의 연습실을 찾아간 날 콜밴의 세 번째 곡이 거의 완성되고 있었다. 아주 신나는 곡이어서 벌써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이 보이는 듯했다. 곡 선정도 멤버들이 직접 한단다.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이 만든, 한국 최초 '해고자밴드'

'콜밴'의 멤버 이인근씨(기타)
 '콜밴'의 멤버 이인근씨(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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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를 결성한 뒤 뮤지션이 된 이들이 쓰는 기타는 아이러니하게도 콜트가 아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한다. 중국과 인도네시아로 빼돌린 공장에서 만든 콜트 기타는 예전에 이들이 만들던 기타에 견줘 질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기타 하나는 끝내주게 만들던 이들인지라 최고의 기타를 만들어내던 자부심만은 여전해서, 중국산 콜트 기타를 보면 마음이 좋지 않다. 그래서라도 빨리 공장에 돌아가 예전처럼 값은 싸고 품질은 뒤지지 않는 세계 제일의 기타를 다시 만들고 싶다. 직접 만든 기타로 콜밴의 무대를 장식하고 싶다.

한때 무대에서 색소폰을 근사하게 부는 것이 꿈이었던 이인근 금속노조 콜텍지회 지회장(47, 기타)은 누구보다 콜밴의 활동이 즐겁다. 처음에는 진짜 난감하기만 했는데 요즘은 콜밴 만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다. 

"다른 투쟁보다 밴드가 재밌지. 딴 사람들은 '이런 것까지 해야 되나' 할지 모르겠지만 난 재밌어.(웃음) 이 밴드는 또 의미가 남다르잖어. 자동차나 다른 물건들은 노동자들이 만들면서 그걸 이용하는데, 몇몇 특수한 노동자들은 자기가 만들면서도 그걸 사용할 줄도 모르고 가지고 놀 줄도 몰라.

악기 만드는 노동자들이 그렇지. 기타도 그렇고 피아노든 뭐든 특수한 경우잖아. 회사를 다니면서는 배울 여유가 없었지. 잔업하고 특근하고 일에 찌들어서. 그랬던 사람들이 5년 투쟁을 겪으면서 이제서야 자기들이 만들어왔던 것을 가지고 즐길 줄 알게 된 거지."

남의 손에서 연주되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던 기타. 내가 만든 기타가 날 위해 연주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노동자들. 늘상 손에 달고 살 때는 그저 밥 먹고 살게 하는 물건이었던 것이, 그것을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되면서 너무나 특별한 악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날 위해 연주되었을 때, 내가 만든 기타가 얼마나 다른 이에게 위안을 주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동안은 다른 이의 연주를 위해 만들었다면, 이제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 연주한다. 기타 연주는 이들이 다시 기타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마지막 싸움의 방식이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5년 투쟁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적은 인원에 비정규직 투쟁도 아닌, 지방의 작은 공장들의 '그저 그런' 해고들 중 하나. 다만 특별했다면 그들이 만들던 기타라는 제품이었다. 그 특별함이 노동자투쟁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뮤지션들의 지속적인 연대를 이끌어냈다.

문화노동자들의 연대는 이들의 5년 싸움을 버티게 해준 큰 힘이었고, 그들 또한 콜트·콜텍 투쟁을 함께하며 자신들의 연주가 그대로 연대가 되는 값진 경험을 했다. 연대는 그렇게 기타 연주를 타고 서로의 마음을 넘나들었다.

"기타 30대 우선 만들어서 고생한 뮤지션들한테..."

'콜밴'의 멤버 김경봉씨(베이스)
 '콜밴'의 멤버 김경봉씨(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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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가슴 한 켠, 희망버스에 시민들이 수만 명씩 오르고, 한진과 쌍차와 유성과 재능과 또 다른 사업장들의 해고를 해결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부럽지 않았을까?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 자신들의 처지가 서럽진 않았을까?

"그런 게 없잖아 있기는 있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인 거고. 우리는 1800일 넘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관심도 못 받고 있는데, 이제 겨우 1000일, 1500일 되고 그걸 기념하면서 사람들 주목받고 하면 부럽긴 하지. 그래도 부럽지만 어떡해. 하나라도 먼저 끝나라 제발, 그런 마음이 더 크지. 어차피 우리야 대법 판결 기다리고 있는 거니까. 날짜 같은 거 따지면 뭐해. 그거 맘만 아픈 거, 기념할 날도 아니고…."(이인근)

"우리도 1000일까지는 집중적으로 했었지. 500일 문화제, 1000일 문화제, 집회도 했는데, 조합원도 생계 때문에 많이 나가고, 대오가 집중력이 떨어진 거야. 그때 조합원들이 다 본사 점거투쟁으로 집행유예 기간이었어.

지회장이랑 나도 (집행유예가) 몇 개씩 걸려 있으니까 다 주춤했던 거지. 다 함께 싸울 수도 없는 게 생계가 안 되니까 생계를 열어줘야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어. 솔직히 적극적으로 못한 우리 집행부 잘못이 크지."(장석천 콜텍지회 사무국장)

2월 20일, 감옥에서 나온 송경동 시인과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 지도위원, 그리고 한진, 쌍차, 재능, 콜트·콜텍, 기륭, 현대차비정규직지회 등 비정규직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이소선 어머니의 묘소를 향해 '어머니의 희망버스'를 출발시켰다.

대법 판결을 3일 앞둔 콜밴은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결말이 어떻게 되든, 꼭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다짐의 편지였다. 그냥 '어머니, 재판에서 꼭 이기도록 도와주세요' 하고 빌고 싶은 마음일 텐데 그런 결기마저 안쓰럽다.  

"솔직히 안 떨린다면 거짓말이고, 두근두근해. 재판 날짜 통보받은 날부터 일주일이 피 말리는 시간이야. 우리 콜텍은 원고가 26명인데 다들 맘이 그렇지. 변호사비만 콜트가 1억을 쓰고 우리도 9천만 원을 썼는데 그나마 변호사가 양해해줘서 할부로 끊고 있어. 노조 한 번 하고 이렇게 피 볼 줄 몰랐지.(웃음)

그래도 우리는 양반이지. 노조 만들고 1년이나 버티다 해고됐지만 만들자마자 바로 깨진 사람들도 많은데. 회사도 이렇게 우리가 끈질기게 버틸 줄 몰랐을 거야."(장석천)

노조 한번 만든 대가가 이리도 혹독할 줄 몰랐다는 그들. 노조를 만들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노동이었지만, 그 노동마저 빼앗긴 이들에게 그 힘겹던 과거가 오히려 되돌리고 싶은 간절한 꿈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콜밴 활동을 하면서 이들에게는 멋진 연주를 하고 싶은 또 다른 꿈이 생겼다.

"나는 회사 다닐 때도 노래 시킨다고 야유회도 안 간 사람이었어. 노래도 5~6년 동안 한 가지만 하고, 지금도 노래 부르면 음정이 없어. 그래서 악기 다루는 게 좀 더 힘들고. 그나마 기타보다 베이스가 나아서 베이스를 잡았어. 나는 복직해도 어차피 올해면 정년퇴직이라 보장도 없어. 7년 노동하고 5년을 싸우고 있는 상황이라, 내가 계속 이걸 해야 되나 싶기도 하고.(웃음)

그래도 이거(연주) 하면서 못하는 거지만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맥없이 앉아 있으면 잡생각만 나고. 꿈이 있다면 진짜 멋진 베이스 기타 좀 했음 좋겠다는 생각이야. 어디 가면 베이스는 잘 알아주지도 않는다는데.(웃음)" (김경봉, 53, 베이스)

"까혼은 처음엔 손도 까지고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아. 내 꿈은 얼른 지든 이기든 판결나는 거여. 생계가 다들 너무 힘들고, 너무 지치고, 시간 끌고...힘들어. 다들 가정 있는 사람들인데, 친구들한테도 대우 못 받고, 가족한테까지도 대우 못 받고,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고. 끝까지 가긴 가야하는데 너무 시간을 끄니까 힘들지. 좀 더 배우면 서로 맞춰서 잘 연주해보고 싶은 맘이 있지." (임재춘, 51, 까혼)

"나는 만날 투쟁할 때 뮤지션들 섭외하고 했는데 내가 직접 무대 올라가서 해보니까 진짜 추운 날씨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음악활동 한다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투쟁사업장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일푼이잖아. 보면 거의 다 무료야. 그냥 전화 한 통화 하면 달려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방법을 찾아서 도와야하는데….

공장에 돌아가면 30대를 무조건 우선 순위로 만들어서 그동안 고생한 뮤지션들한테 직접 우리가 만든 기타 주고 싶어. 콜트 상표는 떼고 줄 거야.(웃음) 될지 안 될지 모르겠는데 그게 내 꿈이야. 우리가 직접 만든 기타를 주는 거."(장석천)

"꿈? 꿈 그런 거 별로 없는데. 그냥 되는 대로 살자였는데.(웃음) 어렸을 때는 나름 음악이란 걸 해보고 싶은 꿈도 없잖아 있었지. 옛날에는 젤 배우고 싶었던 게 색소폰이었어. 지금껏 기회가 없었지. 그나마 늦게라도 기타를 배울 수 있게 되서 좋아.

옛날에 색소폰 배워서 밤무대 같은 데서 연주하는 게 꿈이었는데. 내가 <슈스케> 나왔을지 어떻게 알어?(웃음) 지금 바람은 그냥 이 투쟁 어떻게든 빨리 승리로 마무리 짓고, 지금 우리 애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는데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바르게 자라줬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야."(이인근)

'해고자밴드'에서 '직장인밴드'가 되는 그날!

'콜밴'의 멤버 임재춘씨(까혼)
 '콜밴'의 멤버 임재춘씨(까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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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일의 고공농성을 마치고 땅에 내려와 한동안 땅 멀미를 앓았던 김진숙 지도위원은, 희망버스를 기획한 죄로 감옥에 갇힌 시인 송경동 때문에 울었다고 했다.

병원에서 연극치료를 했습니다. 올해 가장 많이 한 동작을 해보라 해서 팔을 활짝 벌려 흔들었습니다. 올해 가장 많이 한 말을 해보라는데 '고맙습니다' 하며 목이 메었습니다.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냐 묻는데 '감옥에 있습니다' 그 말을 미처 못 끝내고 울었습니다.

그녀가 트위터에 남긴 글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또 울었다. 시인을 향한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87일 만에 그도 감옥을 나왔다. 그는 석 달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제일 보고 싶었다고 했다.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처럼 부당해고 돼서 5년째 싸우는 사람들. 이 겨울에 차가운 텐트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그들이, 제대로 챙겨먹고는 있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늘 걱정된다고 했다.

이제 2월 23일이면 그토록 기다리던 콜트·콜텍 부당해고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이들을 기다린다. 5년 동안의 고통과 설움을 끝낼 '복직'이라는 마땅한 선물이 이들에게 와락 안기면 좋겠다. 그 반가운 선물을 품은 그들의 가슴 벅찬 세리머니를 보고 싶다.

콜밴의 세 번째 노래는 복직을 기념하는 자축 공연 무대에서 모든 이들과 함께 어깨 걸고 들을 수 있기를, 웃고 또 웃으며 밤이 새도록 그저 기뻐할 수 있기를. 나의, 그들의, 우리 모두의 간절함이 부디 그곳에 닿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오늘이다.

김진숙이 감옥의 송경동을 부르고, 송경동이 감옥에서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불렀듯, 이제 이들이 다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복직이 되면 이들은 '해고자밴드'에서 '직장인밴드'가 된다.

복직된 후에도 계속 연습해서 전국의 힘든 동지들에게 멋진 연주를 들려주겠다고 한다. 지금 그들처럼 누군가의 관심과 연대가 간절한 누군가를 찾아갈 것이다. 그렇게 희망은 뚜벅뚜벅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태그:#콜트?콜텍, #콜밴, #대법원, #부당해고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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