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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고향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들 생각을 한다. 그런데 기실 알고 보면 고향의 역사 문화는커녕 지리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지난 18일 오후, 나는 차를 몰고 영주시내에서 안정면 동촌리의 피끝마을을 지나 소백산면의 백산서원을 둘러봤다. 백산서원에서 조금 더 가면 우측에 있는 구구리라고 하는 동네로 갔다.

구구리 마을 뒷산에는 무학봉이 있다.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는 <시전(詩傳)>에 있는 옛 뜻을 따라 '구고'라 했다. 이후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통합을 함에 따라 '구구리'로 개칭해 영주군 소백산면에 편입됐다.

영주시 소백산면 구구리의 홍유한 선생 성지
▲ 홍유한 선생 유택지 정문 영주시 소백산면 구구리의 홍유한 선생 성지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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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행길이었지만, 마을 초입에 크게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홍유한 선생의 유택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선생이 1775년부터 1785년까지 10년 동안 천주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실천하며 살던 곳을 찾았다. 

구구리 아랫배나무실은 작은 자연부락이지만 역사 깊은 천주교 성지로 알려져 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보다 30여 년 전에 천주신앙을 받아들여 심신을 연마한 수덕자인 농은 홍유한(1726~1785) 선생의 유택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너무 쉽게 선생의 유택지를 찾았지만, 정말 별로 볼 것도 없고 특별히 물어볼 사람도 없다. 거기에 40년은 족히 돼 보이는 집은 비어 있었고, 입구의 효자문도 지저분했다. 마당 가운데 있는 유적비와 예전에 오랫동안 쓰였을 것 같은 절구통과 맷돌이 너무도 외롭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영주시 소백산면 구구리의 홍유한 선생 성지
▲ 유적비 영주시 소백산면 구구리의 홍유한 선생 성지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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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살던 홍유한 선생은 비록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천주교를 단순히 신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천지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로 대했다는 점에서 한국 가톨릭 창립의 선구자 혹은 밀알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실학자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순암 안정복, 녹암 권철신, 복암 이기양 등과 함께 동문  수학했다. <천주 실의>와 <칠극>등 신학문과 종교 서적을 탐독하게 됐다. 이때 그는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천주학을 처음 접한 뒤 유교와 불교에서 구할 수 없었던 진리를 발견하고 1757년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1775년까지 18년간 혼자 신앙을 연마했다. 그러던 중 1775년 조용한 곳을 찾아 경상도 땅 소백산 아래 있는 구구리 고들미 마을로 옮겨와 1785년 6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영주시 소백산면 구구리의 홍유한 선생 성지
▲ 안쪽에서 바깥으로 바라본 효자각 영주시 소백산면 구구리의 홍유한 선생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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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천주교의 진리를 처음 깨달은 후부터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해 칠극에 의한 천주교 수계생활을 혼자했다. 축일표도 기도 책도 없던 홍유한은 칠극에 의한 수계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7일마다 축일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된 홍유한은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경건하게 쉬면서 속세의 번잡한 일을 물리치고 기도에 전념했다. 금육 일을 알지 못했음에도 기름지고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자율규칙을 지켰다. 나아가 욕정을 금해 30세 이후는 정절(貞節)의 덕을 실천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한국 천주교 역사가 시작되는 천진암 강학회 이전부터 그는 서학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인물로 기록된다.

현재 구구리의 생가에는 그 당시 그가 사용하던 대문이 아직도 보존돼 있고 1722년(경종24년)에 효자로 정려(旌閭)된 조부 홍중명의 효자문 현판이 남아 있다. 그밖에 자료들은 순교자 권일신과 서신 왕래하던 친필 서찰들이 후손에 의해 보존돼 오다가 현재는 경기도 퇴촌에 소재한 천진암의 전시관에 보관돼 있다.

영주시 소백산면 구구리의 홍유한 선생 성지
▲ 조부의 효행을 기리는 문, 안쪽 영주시 소백산면 구구리의 홍유한 선생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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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의 행적을 기리는 효자문 현판 앞면에는 '일효자학생홍중명지문(一孝子學生洪重明之門), 뒤편에는 1726년(영조2년)에 사헌부 지평으로 증직돼 하사받은 '증 통선랑 사헌부 지평 홍중명 지문(贈 通善郞 司憲府 持平 洪重明 之門)'이라는 글귀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이 현판은 홍 선생이 1775년 이곳으로 이사올 때 가져왔다고 한다.

효자문 안으로 들어서면 마당 우측에 천주교 안동교구청이 1995년 홍 선생의 선종 210주년을 기리며 마련한 유적비가 성지임을 알리고 있다.

유적비 앞면에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수덕자 풍산 홍공 유한선생 유적지', 옆과 뒷면에는 '홍유한 선생은 사방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가득해도 접대함에 소홀함이 없이 반드시 행자를 후히 주어 배웅했고 길에서 굶주린 사람을 만나면 주머니를 털어 주었고 늙거나 병든 이를 만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대신 태워다 주었고 남에게 절을 받을 때도 깍듯이 공경하여 답례했다…. 그의 영향으로 후손 중에 권철신, 홍낙민 등 13인의 순교자가 나왔고 그 중 6명이 103위 순교성인에 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1785년 3월10일(음력1월30일) 6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년 동안 철저히 칠극에 의한 천주교수계 생활을 했던 곳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영주시 소백산면 구구리의 홍유한 선생 성지
▲ 조부이 효행을 기리는 효자문, 바깥 쪽 영주시 소백산면 구구리의 홍유한 선생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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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무나 아쉽게도 현재 선생이 살던 유택지에는 조부의 효행을 알리는 효자문과 1995년에 천주교에서 세운 유적비, 1970년 후손이 신축한 기와집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다.

이웃의 주민들은 "40여 년 전에는 선생이 살던 ㅁ자형 초가집이 있었으며, 초가는 방 5칸, 큰 마루, 작은 마루, 방앗간, 부엌 2칸, 대문간, 옆문, 마구간을 갖춘 전형적인 농촌 주택이었다"고 전한다.

영주시 소백산면 구구리의 홍유한 선생 성지
▲ 절구통과 맷돌 비슷한 것이 보인다 영주시 소백산면 구구리의 홍유한 선생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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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를 둘러보면서 느낀 것은 내 고향에 이런 훌륭하신 분이 살았고, 그것을 이제서야 겨우 알게 된 내가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자산이 되는 유택지를 가는 길도 잘 모르면서 처음 가보았다는 미안함이 가장 먼저였다.

그런데 두 번째는 이런 소중하고 의미 있는 유적이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홍유한 선생에 대한 흔적은 전혀 없지 않은가? 조부의 효행을 알리는 효자문과 현판이 있지만, 분명 조부의 것이고, 유적비가 있지만 1995년에 세워진 것이고, 집이 있기는 하지만 후손이 새롭게 지었다가 현재는 비어있는 폐가일 뿐이다.

영주시와 천주교가 한 일은 그저 말없는 방향 표지판을 두어 개 세워둔 것뿐이다. 땅을 매입하여 초가를 복원하는 일이나 천주교 성지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피정의 집이나 안내소 혹은 안내판, 안내인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당장이라도 영주시는 천주교와 상의하여 부지를 매입해 초가를 복원하고, 안내소나 피정의 집 같은 공간과 주차장 등을 마련해 오가는 관광객은 물론 신자들을 위한 안내인과 안내판 설치 등을 해야 하지 않을까. 더 시급한 것은 청소다. 오랫동안 집이 비어있어 곳곳이 지저분하다.


태그:#홍유한 , #영주시 소백산면 구구리, #최초 천주교 신자 , #구구리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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