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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2년 1월 10일 ∼ 15일까지 진행된 대전충남녹색연합의 '청소년일본환경연수' 일정 중 13일 일본 오사카인근 센난지역의 석면피해자와 가졌던 간담회를 소개한 것입니다. 함께 일본을 방문했던 청소년과 대전충남녹색연합 실무자들이 한일역사문제, 에너지문제, 원전, 환경 교육센터 등을 주제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편집자말>

"지난해 서울에서 개최된 석면피해자 한일심포지움에서 만난 한국인 피해 여성이 얼마 전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무척 안타깝습니다. 저도 앞으로 폐암이나 중피종암에 걸릴 수 있고 이걸 각오하고 살아가는게 무척 힘듭니다"
 
지난 1월 13일, 일본 오사카 인근에 있는 센난에서 만난 오카다 요코씨는 이 말을 하는 도중에도 눈물을 흘렸다.

 

오카다씨가 말한 한국인 여성 피해자는 이정림씨. 그는 지난  2006년 악성 중피종으로 진단받고 지난해 12월 21일 사망했다. 사망당시 그녀의 나이는 46세였고, 그녀가 악성 중피종에 걸린 것은 대전시 오류동 벽산슬레이트 공장에서 3km 떨어진 곳에서 4년(1981~1984년), 공장으로부터 1km 떨어진 곳에서 3년(1991~1993년)을 살았기 때문. 중피종암은 석면이 주요 원인이다.

 

오카다 요코씨의 아버지(강재희)는 일제시대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끌려 왔다. 해방이 됐지만 고국에 있는 친척들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어려운 시기라 다들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단다. 일본에 남은 요코씨의 아버지는 일본인 여성과 사랑했으나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이곳 센난에 왔고, 석면공장에서 일했다.

 

오카다씨의 아버지는 석면폐증으로 고생하다 폐암으로 66세 되던 해 돌아가셨다. 어머니도 1987년 석면폐증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 어머니가 석면폐증 진단을 받을 당시, 석면공장에서 일할 때 어린 오카다씨를 대바구니에 담아 공장 안에서 놀게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원 측에서 오카다씨도 검사를 받게 했다. 검사 결과, 그녀 역시 석면폐증 진단을 받았다.

 

오카다 요코씨는 현재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산소통을 별도로 들고 다닌다. 그러나 그녀는 석면공장 노동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국의 친척들을 그리워 했던 오카다씨의 아버지는 석면피해로 몸이 망신창이 되었을 때 친척들과 연락이 돼 만날 수 있었다. 

 

오카다씨가 자신처럼 석면공장 노동자는 아니었지만 주변 환경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비 노동자나 가족들의 피해 구제를 위해 보상재판을 시작하면서 한국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친척과 연락이 닿은 것. 한국과 일본의 아픈 역사가 '석면'이라는 재앙을 통해 더 아프게 드러난 것이다.  

 

"석면 나쁜 줄 알았으면 일 안했을 텐데..."

 

고얀마 미야치씨 역시 재일교포 2세다. 고얀마씨는 센난으로 시집을 와 처음에는 나라 지역 공장에서 수송해 온 석면 슬레이트를 부셔서 가루로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먼지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석면 방직공장이 유행하면서 작은 공장 하나를 인수해 23년 동안 가족이 함께 운영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 남편은 폐암으로 사망했다.

 

남편은 석면이 몸에 축적돼 화장을 했는데도 그 덩어리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석면으로 인한 사망이라 생각하지 못했고, 2004년 석면 피해가 사회문제로 드러나면서 사망 원인을 알게 됐다고 한다.

 

나카야바씨는 남편이 석면공장에서 일하다 병을 얻어 본인이 석면공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석면공장의 먼지가 대단했어도 본인이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그만둘 수 없었고, 기침이 나면 멈추지 않아 약을 먹으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만일 그 당시 석면이 이렇게 나쁘다는 것을 알았으면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센난에서 만난 오카다씨를 비롯한 수많은 석면피해자들은 지금 일본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위한 희생은 어쩔 수 없다?

 

센난은 오사카의 남쪽에 있는 작은 도시로 100년 전부터 석면공장이 밀집해 있었다. 이곳은 바닷가에 인접해 있어 천연광물 상태인 석면을 들여와 천이나 실로 만드는 초기단계 공정이 주로 이뤄졌고, 5~10명 정도의 가족들이 경영하는 영세한 공장들이 100~200개 정도 밀집해 있었다. 석면가공 초기 공정단계는 순도가 높아 노동자들에게는 치명적이다. 뿐만 아니라 공장 주변 가옥지붕에는 석면가루가 뿌옇게 쌓여 있었다 한다. 환경이 이렇다 보니 노동자뿐 아니라 일반 주민들도 석면에 쉽게 노출돼 관련 질병을 앓는 사람이 많다.

 

'오사카·센난지역 석면피해 국가배상청구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타니 신수케 변호사는 "1940년에 이미 일본 정부가 이 지역에 대한 석면피해 역학 조사를 실시해 20년 이상 근속한 노동자의 경우 대개 석면폐에 걸린 것을 확인하고도 2차 대전 당시 군수용품 납품과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을 위해 제대로 대처를 하지 않았다"고 분개했다. 1988년 당시 센난지역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이곳 주민들의 평균수명이 남성의 경우 14년, 여성의 경우 19년 정도 짧다. 그래서 타니 변호사는 "국가가 이미 석면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고 규제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국가경제발전을 위해 국민들의 건강과 생명을 내팽개쳤으니 이제라도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06년 오사카·센난지역 석면피해 국가배상청구소송이 시작됐고, 2010년 1심 재판에서 승소판결이 났다. 승소판결 이후 석면피해대책위원회와 지원단체에서는 국가를 상대로 항소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각종 집회와 농성을 펼쳤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2010년 6월 1일, 항소 기간 하루를 남겨놓고 항소를 했고, 2심 재판에서는 패소했다. '경제성장을 위해 국민들의 다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였다.

 

2006년 재판을 시작하면서 1심 판결이 날 때까지 원고인단 중 3명이 사망했고 그후 2명이 더 사망했다. 현재도 소송은 진행되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또 원고인단 중 누군가는 사망할 것이다. 석면피해자들은 바로 코 앞에 닥칠 죽음을 기다리며 현재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들의 건강을 담보로 경제발전을 이룬 국가는 그들에게 아무런 책임을 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센난 지역 석면피해자 다수가 한국인

 

석면피해대책위원회를 지원하고 있는 오사카시민네트워크의 노부요 후지나가 대표는 "센난 지역 석면피해자들의 다수가 한국인이고, 이들은 일제시대 강제로 이곳으로 끌려와 가혹한 노동현장에 투입됐다"며 고개를 숙였다. 석면광산에서 강제노역을 했다는 증언도 있지만 사실 확인이 안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오카다 요코씨가 흘리는 눈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나라를 잃고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 가장 처참한 노동현장에 내몰려야 했던 한국인들이 어쩌면 일본과 한국 두 정부로부터 모두 외면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사회도 현재 석면과 관련해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아직도 생활 곳곳에 퍼져 있는 석면제품을 처리하는 문제부터 석면피해자들을 제대로 구제하는 일까지 산적한 과제가 많다. 그러나 '센난의 눈물'은 석면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과 일본의 아픈 과거에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외면하고 있는 재일 한국인의 석면피해에 대해 한국 정부가 관심 갖고 함께 대응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늘도 산소통을 끌고 석면 피해에 맞서 싸우고 있는 오카다 요코씨를 비롯한 많은 석면피해 한국 동포들의 눈물에 관심을 가질 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작성한 박정현 기자는 대전시의회 산업건설위원회 의원입니다.


태그:#센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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