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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 캐롤라이나 주 주정부 청사
 노스 캐롤라이나 주 주정부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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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포함해 전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이 20세기 전반부를 전쟁과 대량 학살 속에 신음하며 보냈다. 그에 비하면 남북전쟁 이후 자국 안에서 한번도 전쟁을 겪지 않은 미국은 참으로 축복받은 나라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잘 몰랐던 지난 역사의 뒤안길에서 고통 당한 미국인들이 있었다. 세계 초강대국의 영토 안에서 '인종 개량 계획'이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근 70년간 무고한 시민들을 억압했던 악랄한 법의 토대는 바로 우생학(Eugenics).

한국에서는 '씨 없는 수박'의 우장춘 박사가 연구했던 분야 정도로 알려진 이 학문이 미국에서는 '유전적으로 우월한 인간 종'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유전적으로 열등한 인간 종'은 아예 생겨나지도 못하게 하려는 정반대 방향의 시도가 맹위를 떨쳤다. 지금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진행중인 일은 이러한 과거를 '무지했던 지난 시절의 과오'로 그냥 덮어버리지 않고 분명히 매듭을 지으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주정부 사과에 이어 금전적 보상 추진하는 첫번째 주

얼마 전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 주지사의 태스크포스 팀은 앞으로 미국 내 30여 개 주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바로 수십 년 전 정부기관에 의해 강제로 불임시술을 받았던 우생학적 편견의 피해자들에게 1인당 5만 불씩 보상금을 지급할 것을 제안한 일이다.

앞으로 5월에 있을 주 입법부의 예산 심의를 거쳐야 최종 결정이 내려지지만, 결과가 번복되리라고 보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민주당 소속인 베벌리 퍼듀 주지사는 2008년 주지사 선거 캠페인 당시 우생학 피해자 보상 문제를 공약으로 내걸어 초당적 지지를 받았고, 주지사가 된 후 태스크포스 팀을 꾸려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과거 미국에서 우생학적 불임시술을 강제적으로 시행했던 곳은 1907년의 인디애나 주를 시작으로 모두 32개 주, 피해자 수는 6만 5000명에 이른다. 이중 주정부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거나 피해자에게 사과를 한 곳은 2002년 버지니아 주와 오리건 주를 필두로 해서 모두 7개 주다. 하지만 금전적인 보상 문제를 들고 나온 곳은 노스 캐롤라이나 주가 처음이다.

1929년부터 1974년까지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불임시술을 당한 총 피해자 7600명 중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1500~2000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에게 모두 보상금을 지급할 경우 약 1억 달러라는 자금이 들어간다. 불경기로 너도나도 예산 삭감에 열을 올리는 이때 노스 캐롤라이나 주가 막대한 출혈을 예상하면서도 미국의 어두운 과거를 들추는 이유는 무엇일까? 태스크포스 팀 로라 제랄드 의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보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을 드러내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금전적인 보상과 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생존자들에게 의미있는 지원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금전적으로라도 보상을 하는 것은 우리 주의 구성원들 모두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대가를 치르기를 바라며, 앞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짓밟는 어떤 관료주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만천하에 알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한 것일까? 우선 생존해 있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생학 프로그램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남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가늠해 보려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토대로 어떻게 이런 일이 20세기의 미국에서 일어날 수 있었는지 파헤치고자 한다.  

자식을 낳아도 되는지 안 되는지 판단하는 사회복지사들

교사 출신이며,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스 캐롤라이나 주 주지사가 된 베벌리 퍼듀 주지사가 없었다면, 우생학 프로그램 보상 문제는 현실화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퍼듀 주지사는 며칠 전 언론을 통해 올해 있을 재임 선거에 도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교사 출신이며,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스 캐롤라이나 주 주지사가 된 베벌리 퍼듀 주지사가 없었다면, 우생학 프로그램 보상 문제는 현실화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퍼듀 주지사는 며칠 전 언론을 통해 올해 있을 재임 선거에 도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 노스 캐롤라이나주 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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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 캐롤라이나 주는 32개 주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강제 불임시술을 밀어붙인 곳이다. 정부보조금을 받는 저소득층과 정신질환 및 장애인 시설, 소년원 등에 수용된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접촉하던 사회복지사들에게 불임시술을 권고할 수 있는 권한을 준 유일한 주였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의 인종 청소에 대한 반감 때문에 다른 주에서는 점차 우생학 프로그램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서는 강제 불임시술의 79%가1945년 이후에 행해졌다. 대부분 여성에게 행해졌고, 그들 중 상당수가 가난한 흑인 젊은 여성들이었다.

주정부에 보관된 케이스 파일들은 각각의 피해자들이 어떤 연유에서 불임시술을 받아야 했는지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포함되어 있다.

▲ 가난한 집안의 14세 소녀로 칠칠 맞지 못하고 성적 관심이 지나치다.
▲ 12세부터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딸이 16세에 임신을 하자 아버지가 불임시술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 아이가 다섯인 여성인데 IQ가 낮아 아이들을 잘 돌보기 힘들다.

주정부에서는 일찌감치 피해자 신원 확보에 들어갔지만 '5만 달러'라는 구체적인 숫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큰 진전을 보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확보된 인원은 72명. 그러나 많은 이들은 자신의 이름이 공개적으로 밝혀지는 것을 꺼렸다.

사례 1. 맹장수술이라고 했잖아요!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렉싱턴 시에 살고 있는 62세 여성은 현재 일하고 있는 병원 동료들이 자기의 과거를 알게 된다면 무척 당황스러울 것 같다고 말했다. 어려운 집안 환경으로 인해 입양됐던 이 여성은 그러나 7세에 '정신적으로 좀 모자라다'는 이유로 주정부가 운영하는 특수학교로 보내졌다. 그러다 청소년기에 맹장수술을 받을 것이라고 들은 걸 기억한다. 27세에는 자궁에 문제가 생겨서 의사를 만났다. 의료기록을 보더니 과거에 불임시술을 받았는데, 수술이 잘못됐다고 말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어머니를 찾아가 따져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네가 결혼하기 전에는 말하려고 했단다. 그땐 어쩔 수가 없었어. 동의를 안 하면 정부보조금을 끊겠다고 하는데 어쩌겠니?"

그 후 결혼도 했다. 지금은 죽고 없는 남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렇지만 돌이킬 수 없다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에게도 저런 아이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안 낳고는 내가 결정해야 하는 일이죠, 안 그래요? 누군가가 나를 앞으로 못 나가게 잡아끄는 느낌, 내 인생에 대해서 나는 한 마디도 못하게 가로막는 그런 기분 아시겠어요?"

1921년 국제우생학전시회에 전시됐던 자료. 당시 강제 불임시술 현황을 보여주는 자료다. 이때까지만 해도 본격화되기 전으로 노스 캐롤라이나 주도 아직 참가하지 않았다.
 1921년 국제우생학전시회에 전시됐던 자료. 당시 강제 불임시술 현황을 보여주는 자료다. 이때까지만 해도 본격화되기 전으로 노스 캐롤라이나 주도 아직 참가하지 않았다.
ⓒ 위키미디아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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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2. 갑자기 사생아가 나타나면 어쩌실래요?

노스 캐롤라이나 주 린우드 시에 살고 있는 찰스 홀트(62)는 백인 남성이다. 이야기는 홀트가 12~13세였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에서 싸우고 남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주정부 시설로 보내졌다. 담당 사회복지사는 홀트와 그의 부모 모두 '낮은 정신력'을 가졌다고 기록했다. 1968년 성인이 된 홀트가 새 삶을 살기 위해 시설에서 나오려고 하자 주정부 우생학위원회는 정관절제술을 받아야만 내보내 줄 수 있다고 했다. 사회복지사는 "그게 찰스를 위해 최선이다"라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위원회에 제출한 서류에서 사회복지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찰스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아이의 아버지라고 고소 당하는 일이 없게 막는 방법이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홀트는 19세의 어느 날을 분명히 기억한다. 의사는 "수술을 받지 않으면 집에 갈 수 없다"고 했는데, 그 수술로 인해 영원히 자식을 가질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단지 빨리 집에 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주정부에 남아있는 그의 IQ 테스트 결과는 73. 당시 불임시술 결정의 가이드라인으로 삼았던 IQ 70을 넘는다. 성인이 된 홀트는 신문배달, 슈퍼마켓 점원 일과 소도시의 정비공 일을 한꺼번에 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결혼도 했지만 결국 이혼하고 혼자가 된 지금은 친척들과 함께 살고 있다.

사례 3. 너 때문에 너희 가족이 굶어죽게 될 거야!

미국에서 우생학 프로그램과 관련해 처음으로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나이얼 라미레즈(65). 1973년의 일로 미국시민자유연맹이 소송을 도왔다.

라미레즈는 18세에 남자친구에 의해 임신을 했는데, 그때부터 사회복지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집으로 찾아왔다. 정부보조금을 받던 어머니와 밑으로 줄줄이 있는 동생들을 들먹이며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너희 가족은 네가 한 일 때문에 다 굶어죽게 될 거야. 만약 불임시술을 받지 않으면 네 어머니가 받는 보조금을 끊을 수밖에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동의한 라미레즈가 딸을 낳고 불임시술을 받아야 했던 해는 1965년. 수술 직전 의사에게 "수술했다고 보고만 하고 안 하면 안되나요?"라고 애걸도 했지만 의사는 "그럴 수 없다"고 답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의술을 배운 의사들 중 간혹 이 시술을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흔쾌히 동참했다. 그 후 뉴욕으로 이사 간 라미레즈는 병원 간호보조사로 일하면서 딸을 키웠고, 지금도 서로를 보살피며 함께 살고 있다. 

애틀랜타 지역에 살고 있는 엘레인 리딕 씨가 애틀랜타 대표신문 AJC와 인터뷰할 때 찍은 사진. 엘레인 리딕 씨는 13세에 성폭행을 당하고 14세에 아이를 낳은 직후 불임시술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수술을 받은 사실조차 몰랐다.
 애틀랜타 지역에 살고 있는 엘레인 리딕 씨가 애틀랜타 대표신문 AJC와 인터뷰할 때 찍은 사진. 엘레인 리딕 씨는 13세에 성폭행을 당하고 14세에 아이를 낳은 직후 불임시술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수술을 받은 사실조차 몰랐다.
ⓒ A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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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4. 성폭행을 당했는데, 왜 또 피해를 입어야 하나요?

엘레인 리딕(57)은 불임시술을 당하던 1968년 겨우 14세 소녀였다. 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쇼크를 입어 알코올 중독자가 된 아버지와 역시 알코올 중독인 어머니는 매일같이 싸우거나 교도소에 가 있었다. 8남매 중 아래로 다섯은 고아원에 보내졌고, 엘레인과 여자 형제들은 할머니한테로 보내졌다.

정부보조금으로 살아가던 할머니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군지도 모르는 나이 든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임신한 걸 알아차린 사회복지사는 문맹인 할머니에게 어떤 서류를 내밀었고, 사인하지 않으면 리딕이 고아원에 가게 된다는 말에 뭣도 모르고 사인을 했다. 우생학위원회에 제출된 서류에 사회복지사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참고로 리딕의 IQ 테스트 결과는 75였다.

"1968년 3월에 첫째 아이를 낳게 되는 13세 소녀. 일을 해본 적도 없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며 학교에서도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고 성적으로 문란한데, 이에 대해서는 커뮤니티 보고서에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늦은 밤 혼자 다녔다고 적혀 있다. 의사는 불임시술을 권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도 돌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부모 노릇을 결단코 할 수 없는 이 아이에게서 또 다른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진단명: 정신박약"   

달이 차고 아들을 낳자마자 몇 시간 만에 의사는 불임시술을 진행했다. 아이를 잠시 할머니에게 맡겨 놓고 뉴욕으로 간 엘레인은 18세에 결혼을 했다. 남편은 아이를 원했으나 임신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복부 통증과 출혈이 있었다. 의사와 상담하고 언니들과 얘기한 끝에 자신이 불임시술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전 정말 착하게 살았다고요. 아기를 갖고 싶은데 갖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아픈 일인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남편은 화가 날 때마다 "애도 못 낳는 게"라고 몰아붙였다. 결혼 생활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마냥 낙담만 할 수는 없던 리딕은 이후 2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1974년에 미국시민자유연맹의 도움으로 100만 달러짜리 소송을 제기했다.

역사적 책임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지는 것

1973년과 1974년에 잇달아 일어난 소송으로 이슈가 불거지자 노스 캐롤라이나 주는 1974년에 마지못해 우생학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갈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인종적 편견이 여전하던 1983년에 두 여성 모두 주정부 상대 법정 싸움에서 패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침묵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두 사람 모두 지금은 조지아 주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과 딸은 미국 사회의 번듯한 일원으로 자라났다.

태어나지 않은 자손에 대한 가치는 얼마나 될까? 누구도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아무리 많은 보상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저지른 조직적인 범죄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상처를 아물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은 물질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역사의 잘못을 눈감아 버리지 않고 물질적 보상으로라도 피해자들의 아픔을 얼마간 치유해 보려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노력은 선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후대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역사적 책임'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태그:#우생학, #강제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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