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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러진 화살> 포스터.
 영화 <부러진 화살> 포스터.
ⓒ 아우라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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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경으로 기억한다. 어느날 아침 나는 모 일간신문 사회면을 폈다. 중간의 조그만 1단 기사를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아, 이 사람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구나"  이아무개. 그는 2년 전 내가 변호한 한 형사사건의 피고인이었다. 그가 대전교도소에서 목을 매달아 죽은 것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건을 생각하면 부화가 치민다. 변호사로서 나의 무능함에 화가 나고, 변호사의 호소를 철저히 외면한 재판부에 치가 떨린다.

그 사건은 내가 민변의 변호사로서 시국사건 변호 차원에서 맡았다. 내가 변호를 맡기로 하고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1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던 터였다. 그는 1심에서 변호인도 없이 제대로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실형 선고를 받고 나서야, 주변의 도움으로 민변을 찾았고, 결국 내게 연결되었다.

20년 전 교도소에서 발견된 주검

가족에게 사건을 수임한 나는 바로 다음날 서울구치소를 찾았다. 몇 마디를 나눈 순간, 나는 그가 일반 시국사건의 피고인이 아님을 직감했다. "귀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며 고통을 호소했고, 국가보안법 사범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사상적, 사회적 배경도 갖추질 못했다. 더욱, 그는 몇년 전 속초 앞바다에서 작은 보트를 타다가 경찰에 걸렸는데, 당시 그는 북한으로 가기 위해 노를 저었다고 진술했다가, 경찰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판단하여 그냥 훈방 조치를 받은 경력도 가지고 있었다. 일견하여, 나는 이 피고인이 제 정신의 일반 시국사범이 아님을 알았다.

이 피고인이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범죄사실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보안법상의 잠입탈출 미수죄로 기소되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대만에서 피고인이 북한 대사관으로 탈출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지만 대만에는 북한 대사관이 없다. 따라서 그가 북한으로 탈출을 시도했다고 해도 그것은 불능미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지금 같으면 검찰이 이런 사건을 기소한다면 누구나 담당검사의 머리가 어떻게 되었다고 할 것이나 당시는 이런 사건도 기소되었고, 부지불식간에 실형선고가 나오기도 했다.

나는 이 사건 항소심에서 우선 피고인에 대한 정신감정을 신청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냉담했다. 이어 나는 이 사건에서 중요한 증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당시 대만 대표부의 안기부 직원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피고인이 대만에서 어떤 행위를 했는지 정확히 알아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심에서 이 증인의 진술조서가 증거로 제출되었는데 변호인이 없는 상황에서 이 증거는 모두 동의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원점으로 돌리고 새로운 재판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증인은 공판기일이 몇 번이나 공전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물론 법원도 나의 증인신청을 기각할 수 없어 받아주기는 했지만 그 증인을 소환하고자 하는 의지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항소심 구속기간 만기를 며칠 앞두고 마지막 공판기일이 열리는 날, 그날도 그 증인을 기다렸지만 결국 나오지 않았다. 재판부는 변호인의 정신감정과 그 증인의 법정진술의 필요성에 대한 나의 호소를 외면한 채 결심을 선언하였다. 그런데, 이날 나는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이상한 재판진행을 경험했다. 재판장은 결심을 선언하고, 잠시 뒤에 선고를 한다 - 통상 형사재판에서 공판기일이 끝나면 선고기일은 따로 잡아 선고한다 - 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공판도 끝나기 전에 판결문을 써 왔다는 것인가? 나는 귀를 의심하고, 법정을 떠나지 않았다. 30분 뒤, 정말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한다."

이 일이 있고나서 2년이 안 되어, 그 피고인은 교도소 감방에서 목을 매 죽었다.

"재판인가, 개판인가"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 영화 <부러진 화살>이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다. 개봉 전에 제2의 도가니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적중했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간 느낌이다. 다년 간 변호사를 해 왔던 필자이기에 이 영화가 주는 리얼리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관객들은 설마 판사가 저렇게까지 불통이고 권위적일까 의심할지 모르지만, 위의 사실을 떠올리면 <부러진 화살>의 리얼리티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꼴통(?) 판사로 특별출연한 문성근.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꼴통(?) 판사로 특별출연한 문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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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어떤 판사는 법정에서 당사자에게 기록을 던지기도 했고, 육두문자를 쓰기도 했다. 이런 수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불쌍한 백성은 꼼짝없이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일들이 적어도 얼마 전까지 우리의 법정에서 흔치 않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이 영화를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는 그동안 우리 사법부의 치부를 그들만의 리그에서 해결할 수 없음을 우리 시민사회가 각성한 결과다. 사법부의 엘리트 주의, 권위주의에 아무리 당찬 변호사들이 도전한들 변하지 않기에 드디어 시민사회가 영화라는 무기를 사용하여 들고 일어선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가 주는 함의는 클 수밖에 없다. 사법부는 이 영화를 더 이상 권위주의적 사법을 용서할 수 없다는 시민사회의 엄중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이 영화가 개봉되기 전 몇 주 전에 시사회를 통해 보았다. 매우 충격적인 영화였다. 메시지 전달력도 좋고, 출연 배우들의 연기력도 탁월했다. 극중 피고인 역을 맡은 안성기의 열연도 좋았고, 특히 2심 재판장인 문성근의 연기는 돋보이는 것이었다. 이들의 연기력 때문에 영화의 리얼리티는 살아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 영화가 갖는 몇 가지 문제점이 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호평 속에 비판이 없을 수 없다. 이 영화는 긍정적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자칫 놓쳐서는 안 될 것을 간과하게끔 하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부러진 화살> 리얼리티의 문제

우선, 영화의 리얼리티에 관한 문제다. 리얼리티 영화에서 사실성의 추구는 일반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성의 추구는 영화 제작의 모티브와 그것을 영화적으로 풀어가는 방법에서 현실의 세계와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정도로 족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십수 년 동안 일어난 어느 특정인의 실제 사건을 마치 99% 동일하게 보여주겠다는 것으로 리얼리티의 의미를 해석한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내용을 영화적 허구로 인식시키지 않고,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의 재현 영상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여기에서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라는 말은 설 자리가 없다.

이런 이유로 이 영화는 쓸데없는 구설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속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실존하는 인물로 해석될 수 있어 사실의 진위에 대한 논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영화가 사실의 진위를 밝힐 수 있는 도구가 아님에도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그것을 무심결에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와 관련 있는 인물들이 언제까지 침묵을 지킬지 의문이나, 만일 이해관계자들이 영화상영금지 가처분 신청 등을 제기한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갖는 리얼리티의 표현 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1월 18일 개봉한 <부러진 화살>의 한 장면
 1월 18일 개봉한 <부러진 화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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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의 자기 모순적 상황설정이다. 이 영화가 직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우리 사법부의 권위주의적 불통의 모습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그것은 좋다. 그런 영화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과도한 의욕 때문에 더 중요한 정의의 문제를 혼동스럽게 만들어 버렸다.

독자들이여, 나의 진심을 왜곡하지 말길 바란다. 나는 실제사건의 진위여부에는 지금 관심이 없다. 단지, <부러진 화살>의 영화적 진실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놓칠 수 없는 사법적 정의, 피고인은 무죄일 수 없다

영화에서 피고인은 석궁사건의 진실이 검찰과 법원에 의하여 완전히 왜곡되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다. 하지만 피고인 자신도 자신의 재판결과에 불만을 품고 재판장이 사는 아파트에 석궁을 가지고 가서 위협을 했고 몸싸움이 일어났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석궁이 우발적으로 발사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영화는 바로 이 사실의 범죄성을 무시한다.

피고인의 주장을 전부 받아들인다 해도 피고인에게 협박죄나 폭행죄의 죄책을 인정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말이다. 물론 피고인이 의도적으로 쏘지 않았고, 피해자의 상해가 혹시나 조작된 것이라면 그것도 중요한 쟁점이기는 하지만 - 왜냐하면 이 경우 인정되는 범죄사실이 달라진다 - 그 이전에 판사를 찾아가 석궁으로 위협하면서 몸싸움을 했다는 점도 사법적 정의로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사회에서 어떤 사인도 이런 식으로 자력구제를 할 수 없지 않은가.

관객들이 자칫 영화가 말하는 피고인의 무고함만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이야 말로 심각한 정의의 왜곡이다. 사실, 이 영화가 우리 사법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이 큰 목적이었다면 석궁사건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것은 무리한 일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피고인이 석궁사건을 일으키게 한 민사사건을 중심으로 우리 사법이 가지고 있는 온갖 부조리 - 예컨대, 전관예우, 법관의 권위주의, 불공정한 재판진행 등등 - 를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사실성 있게 만들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리얼리티 영화의 순수성도 유지하면서, 위와 같은 법률적 자가당착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영화적 결점에도 불구하고 <부러진 화살>이 비판을 불허하는 난공불락의 사법부에 자성의 계기를 준 것만은 분명하다. 영화인이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 해석은 이제 관객의 몫이다. 관객은 영화의 해석을 통해 우리 사법부에 개혁을 요구할 수 있다. 그것은 시민의 권리이다. 우리의 사법부가 아직도 권위주의와 특권의식에서 맴돈다면 정의의 마지막 수호자로서의 역할은 심대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사법의 민주화가 가능할지, 어떻게 하면 시민사회로부터 신뢰받는 사법이 가능할지 하루 빨리 대안을 강구할 때라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찬운은 변호사이며 현재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 교수이다.



태그:#부러진 화살, #석궁사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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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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