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돌아보면 아프지 않은 청춘은 없다. 나도 그렇다. 40대가 된 지금, 스물 몇해 전 그때를 회상해 보면 역시 작지 않은 상처, 그리고 아픔이 있다. 아팠던 그 기억은 '김용갑'에서 시작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이 그러했고, 또 내가 살아갈 앞으로도 '김용갑'은 그렇게 자리할 것 같다. 

 

24살 청년 '김용갑'과의 첫 만남

 

김용갑을 처음 만난 때는 1989년 3월, 그러니까 내가 대학에 입학한 해였다. 강원도 속초의 모대학 신문사 기자였던 그는 나보다 4살 더 많은 형이면서 '비합법 학생 운동조직'의 동료이기도 했다. 지금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당시 사학의 부패·비리는 정도가 매우 심했다. 우리가 재학하던 대학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용갑과 나는 이에 맞서 싸운 운동권 동지였다.

 

하지만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대하는 학교 당국의 대처는 야만적이었다. 학교는 지역 폭력배를 사주하여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십수 명의 폭력배들은 떼를 지어 쇠파이프, 각목 등으로 학생들을 폭행하고 협박했다. 그 공포감과 두려움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참 많이 맞았다. 정말 딱 한 대만 더 맞으면 죽을 것 같은 공포감으로 수없이 몸을 떨어야 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사건은 1990년 3월 6일 신입생 환영회에서였다. 또다시 술에 취한 폭력배 10여 명이 김용갑과 나를 유스호스텔에 감금한 채 폭행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학생들을 선동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어진 무차별 폭행은 처참했다. 술 취한 그들의 각목은 약간의 인정도 없이 아무렇게나 마구 휘둘러졌다.

 

얼마나 맞았을까. 무차별 폭행이 그쳤을 때, 내 몸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벽을 타고 스르륵 무너졌다. 머리와 입, 코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으로 번졌다. 거울에 비친 내 처참한 몰골은 여전히 쉽게 지워지지 않는 악몽처럼 남아 있다. 그 후, 그날의 폭력 사태 역시 학생처 직원의 사주에 의한 것이란 걸 한 폭력배의 양심 선언을 통해 알았다.

 

목숨 걸고 출마한 총학생회장, 하지만...

 

그때 학생회장으로 출마한 이가 김용갑이었다. 그는 비합법 운동조직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저들과 맞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총학생회라는 합법 공간을 통해 저들과 보다 효율적인 싸움을 하자고 자신의 출마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할 일이었다. 당시도 저들의 폭력이 극에 달했는데, 만약 총학생회장으로 출마한다면 "정말 그들이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형. 그러다가 우리 정말 다 죽을지도 몰라. 총학생회장 출마는 안 돼."

 

우리는 말렸지만 김용갑은 단호했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당했는지 생각해 봐. 그런데 지금처럼 이렇게 있으면 우리 후배들은 또 당해. 난 이제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니 누군가 결심을 해야 하는데, 만약 내가 그 길에서 설령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게. 그러니 나를 믿어줘. 부탁이야."

 

우리는 그의 굳은 결심을 두고 여러 차례 어려운 회의를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굳은 결심 앞에 "좋다. 한 번 해보자. 설마 진짜 죽겠느냐"며 총학생회장 출마 결심에 동의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무살, 청년이었다.

 

하지만 순진했다. 예상보다도 그들의 폭력은 대단했다. 애초부터 정상적인 선거운동은 불가능했다. 선거운동은 고사하고 폭력배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다가 운이 나쁜 친구는 절뚝거리며 나타났고, 또 어떤 날은 다른 친구가 입술이 터진 채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기적이었다. 우리가 승리했다. 그것도 폭력배들이 내세운 상대 후보를 압도적 차이로 누르고 김용갑이 당선됐다. 감격과 환호. 침묵 속에서도 학원 민주화를 열망한 수많은 학우들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리고 폭력배들에게 맞아가며 버텨낸 10일간의 선거운동이 떠올라 우리는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나는 뭔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느낌은 불행하게도 적중했다.

 

학교는 김용갑 후보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자 새로운 학생처 직원의 영입을 발표했다. 우리는 영입된 직원의 전력을 알아보고 놀랐다. 당시 영입된 직원 두 명은 지역에서 소문난 조직 폭력배 일원이었다. 행정상 필요한 정상적인 직원 영입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그들은 김용갑을 상대로 총학생회장직 사퇴를 요구하며 집요하게 괴롭혔다.

 

김용갑이 총학생회장으로 재임한 기간은 불과 20여 일 남짓. 그러나 이 기간 김용갑은 무려 7차례 폭행을 당했다. 그들은 무자비한 폭력과 함께 회장직을 사퇴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문제의 신입생 환영회장에서 벌어진 폭력이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1990년 3월 28일 새벽 2시께, 총학생회장 김용갑은 봄비가 내리던 한적한 도로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내 나이 21살이 되던 이른 봄이었다.

 

학우들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긴 사람

 

"상만아. 지금 내가 여기서 꺾이면 나를 당선시키기 위해 그토록 얻어 터져가며 선거 운동을 해줬던 너희들을 어떻게 볼 수 있겠니! 또 나를 믿고 지지해준 학생들, 그들에게 내가 했던 약속을 저 버릴 수 없어. 그리고 이건 아니야. 난 포기 안 할 거야!"

 

김용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나는 한없이 울었다. 정말 그렇게 다시 울어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대성통곡을 했다. 눈물과 콧물, 그리고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나는 발버둥까지 쳐가며 통곡하고 또 울었다. 누군가 그렇게라도 울어주지 않는다면 김용갑, 불과 스물다섯 해를 살다가 죽어간 그가 너무나 불쌍하고 서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가 생전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죽기 3일 전, 혼자 힘으로 버텨내기에는 너무도 힘든 그들의 폭력과 협박에 힘겨워하던 김용갑을 위로하고자 "형, 차라리 우리 학생회장직을 포기하는 것이 어떨까"라고 말했을 때 그가 한 말이다. 그리고 끝내 타협하지 않고 원칙을 지킨 김용갑은 죽었다. 

 

한편, 당시 경찰은 김용갑의 죽음에 대해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인정할 수 없었다. 가장 큰 의문은 김용갑이 숨지기 바로 일주일 전 있었던 학생처 직원 김아무개씨의 발언이었다.

 

그는 김용갑에게 학내 민주화운동을 하지 말라고 협박하면서 "나는 나를 배신한 자(민주투쟁을 할시)를 용서하지 않는다. 차로 갈아 버리겠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하겠다. 사람을 차로 갈아버려도 과실치사로 6개월이면 풀려나온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은 당시 현장에 있던 다른 이도 들었다. 

 

그리고 김용갑은 그의 협박처럼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한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이라는 경찰의 발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김용갑. 자신을 지지한 학우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아름다운 영혼의 청년, 그의 죽음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가 가진 염원, 그가 가진 꿈이 그렇게 잘못된 것일까. 부패와 비리가 없는 깨끗한 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그 염원이 그처럼 참담한 죽음을 당해야 할 이유였을까. 결국 그는 한줌 재가 되어 속초 영금정 바다에 뿌려졌다. 그날 내가 올려다 본 하늘은 너무나 푸르렀다.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가슴으로 떨어졌다. 1990년 4월, 어느 날이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표현할 수 없는 고통

 

김용갑의 죽음 이후 나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고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김용갑을 잃고도 그전과 똑같이 살 수 없었다. '그는 죽고 나는 살았다'는 게 너무 괴로웠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폭력을 피하지 않았다. 때리는 그들 앞으로 더 나갔다. 상처입은 짐승처럼 살았다고 표현하면 정확할까?

 

나는 잠을 자지도, 밥을 먹은 기억도 거의 없다. 그래도 배고프지 않았다. 그저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김용갑의 사인을 규명하라는 대자보를 쓰는 일이었다. 그렇게 쓴 대자보를 학생들이 다니는 벽에 붙였고 구호를 외쳤으며 울부짖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20대 청춘은 분노, 그 자체였다.

 

결국 그해 여름, 나는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 시기를 어찌 버텨냈는지 모르겠다. 제적생 신분으로 싸움을 하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들었고 어려웠다. 무엇보다 아들이 제적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보수적인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더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집과의 관계도 끊겼다. 이때만 해도 아버지 입장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빨갱이 자식'이었다.  

 

그해 겨울, 나는 스티로폼 한 장을 깔고 학교 동아리방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다가온 김용갑의 1주기 추모제. 절망과 분노, 그리고 좌절감으로 깊어지는 1991년 겨울이었다.

 

사건은 1주기 추모제를 일주일 앞둔 1991년 3월 19일 발생했다. 당시 동아리연합회 회장이면서 학생운동을 함께하던 정연석과 추모제를 논의하고 있을 때였다. 또다시 10여 명의 폭력배들이 각목과 벽돌을 들고 난입했다. 그들은 거칠 것 없이 폭력을 행사하며 학내에서 김용갑 추모제를 하지 말 것과 동아리연합회 회장직을 자신들에게 넘기라는 요구를 했다.

 

유리창이 깨지고 비명과 고함소리가 난무하자 주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폭력 사태에 놀라 어리둥절해 하던 학생들이 상황 파악이 되자 우리 편을 들며 같이 싸워주었다. 그러자 불리해진 폭력배들은 "두고보자"는 협박을 남긴 채 돌아갔다. 피투성이가 된 정연석과 나는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아파서가 아니라 서러워서 울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우리는 전날 있었던 폭력 사태에 항의하고자 '학내 폭력 척결과 부패·비리 재단 퇴진을 위한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그러자 폭력배들이 다시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집회장으로 난입했다. 순식간에 집회장은 엉망이 되었다. 비명을 지르는 여자후배, 각목과 쇠파이프에 맞아 여기 저기 쓰러진 학생들….

 

그때였다. 같은 제적생 신분이라 학내 집회에 함께 할 수 없었던 정연석이 말릴 겨를도 없이 그 폭력의 아수라장으로 뛰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을 혼자 힘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순식간에 달려든 폭력배들에게 정연석은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나는 정신없이 그 틈으로 끼어들었고 다행히 다른 학생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정연석을 빼냈다. 

 

땅바닥에 주저 앉은 채 정연석은 울부짖었다. 짐승같은 괴성을 지르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비명에 나도 울었다. 잠시 후, 후배들의 부축을 받아 정연석이 어디론가 사라진 후 현장을 어떻게 수습할지 잠시 생각했다. 어디선가 낯익은 절규가 들려왔다.

 

"학원폭력 근절하고 이사장을 처벌하라!"

"김용갑의 사인을 규명하라!"

"문교부는 학원 감사를 실시하라!"

 

정연석이었다. 푸르게 찍혀진 멍자욱 위에 절망과 분노의 기름을 부은 정연석은 그렇게 한 덩어리 불꽃이 되어 버렸다. 여학생들의 비명과 후배들의 경악. 검게 그을려 퍼지는 연기속에서 들려온 절규. 군중의 동요. 그 아픈 기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내 나이 22살, 슬픈 봄이었다.

 

그 후 20년, 김용갑의 이름으로...

 

정연석의 분신 후 이어진 7일간의 점거 농성은 또다시 실패했다. 학교 당국은 농성 중인 학생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휴교령을 발표했다. 기숙사 학생까지 모두 빠져나간 1991년 3월 28일 새벽 2시께. 학교 당국은 경찰이 아닌 폭력배들을 농성장에 투입시켰다. 그리고 쇠파이프를 든 그들에 의해 학생들은 농성장에서 쫒겨났다. 

 

그 후 나를 비롯한 6명이 구속되고, 20여 명의 후배에게는 수배가 떨어졌다. 죄명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및 폭력행위 등이었다. 폭력을 당한 것은 우리인데 경찰은 우리에게 폭력의 죄를 씌웠다. 역시 1991년 3월의 일이다. 

 

그날이었다. 수갑과 포승줄로 꽁꽁 묶인 채 구치소로 향하는 경찰버스에서 나는 결심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나같은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인권운동가로 살겠다고. 김용갑, 그리고 정연석의 그 한 맺힌 희생을 젊은 날, 한때의 치기로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감옥에서 석방된 나는 이후 1992년 전국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을 시작으로 전국연합 인권위원회와 천주교인권위원회, 인권연대, 반부패국민연대 등 여러 시민사회인권단체에서 일했다. 그리고 2002년부터는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판문점 김훈 중위 국방부 특별합동조사단 등에서 조사관으로 일했다. 특히 군대 의문사 사건과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이들과 함께하고자 노력했다.  

 

살며 흔들릴 때, 나는 왼손 두 번째 손가락 마디에 남은 칼자국을 살펴본다. 김용갑을 잊지 않겠다며 22년 전, 분향소 영정 앞에서 스스로 칼로 찌른 흔적이다. 그리고 그 선연한 피로 형의 이름 석자를 썼다.

 

'김용갑'

 

벌써 그날로부터 22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 흔적은 내 가슴에 남아있다. 나는 내가 결심한 그 21살 청년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 그것이 바로 지난 20대 청춘 시절에 만난 '아름다운 청년 김용갑'에 대한 '살아남은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정의와 인권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열심히 살 것이다. 내가 대신 살아가야 할 25살, 영원히 젊은 청춘 '김용갑의 이름으로'.


태그:#김용갑, #청춘, #정연석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3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