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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인 김신숙씨(왼쪽)
 인터뷰 중인 김신숙씨(왼쪽)
ⓒ 한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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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숙씨(미국 이름 수잔 윌리암스)는 한국 친부모를 찾으러 미국에서 왔다. 입양문서에는 그녀의 혈액형은 A형에 1972년 1월 6일(추정) 서울에 있는 한 병원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1974년 6월 15일 미아보호소를 통해서 서울시립아동병원으로 들어온 그녀는 1974년 6월 26일 서울 노량진에 있는 성로원아기집(고아원)으로 옮겨진다. 그 후 성로원에서 1974년 10월 29일까지 약 4개월 간 살다가 1975년 4월 15일 홀트아동복지회로 옮겨진 후 1975년 11월 미국 뉴욕주로 입양 보내졌다.

그러나 그녀가 2005년 한국에 왔을 때 아동병원과 성로원아기집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아동병원에서는 자신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뜻은 입양 도중 자신의 이름이나 신상에 대한 기록이 누락되었거나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김선숙씨는 자신이 입양 보내지기 전 한국에서 보낸 3년 동안의 생활이나 친부모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그녀의 입양기록엔 이렇게 적혀 있다.

"행복하게 노는 아기. 그러나 장난감을 혼자 갖고 논다."

그녀는 기자와 인터뷰 중 지금도 자기가 남들과 나누는 생활에 인색하다며 "40년 동안에 하나도 변한 것이 없네요"라며 다소 자괴지심(自愧之心)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코넬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를 취득한 영재임에도 불구하고, 친부모를 찾다가 지친 탓인지 기자와의 인터뷰 중에는 종종 의기소침하고 힘없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은 18일 서울 청운동에 있는 '뿌리의집'에서 김신숙씨와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첫 한국 방문 때, 친부모 찾으러 '가출'도

입양 직전의 김신숙씨
 입양 직전의 김신숙씨
ⓒ 김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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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양 간 후 한국에 처음 온 것은 언제인가? 그 후 한국에 얼마나 자주 왔나?
"1988년 올림픽 기간 중 양부모님이 휴가 차 나를 한국에 데리고 놀러 오셨다. 그 후 2002년 두 번째로 한국에 왔고 그 다음엔 수시로 한국과 미국을 오갔다. 전부 합쳐 한국에 산 지가 한 5~6년 정도 된다."

- 1988년, 입양 간 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느낌이 어땠나?
"1988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나는 겨우 16세였다. 당시 2주 정도 한국에 있었는데 나는 양부모로부터 도망가서 아예 한국에 머무르고자 가출을 시도했다. 그 후 심리상담을 받고 내가 문화충격 때문에 그러는 것으로 진단이 나왔다. 미국으로 돌아가서 심층적으로 정신과의사와 상담을 했고 정신과 의사는 한국에서의 나의 이성을 잃은 행동이 당시로서는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진단했다."

- 한국 친부모를 찾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언제부터였나? 
"2003년이었으니 어느덧 9년이 된다. 당시 나는 한국의 한 영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국 부모님을 찾고 싶은 열망이 걷잡을 수 없이 막 일어났다. 그 후 여러 모로 갖은 노력을 했는데 아직까지 친부모님을 못 찾았다. 너무 힘들다. 이제 포기해야 되나 보다."

- 미국에서의 입양생활은 어땠나? 특별히 10대 때 정체성 위기는 어떻게 극복했나?
"내 양부모님은 내게 많은 것을 주셨는데 그것은 사랑, 가정, 많은 장난감과 음식이었다. 10대 때 그럭저럭 친구들과 잘 어울린 것 같다. 허나 부끄럼이 많았고 어색함을 많이 느끼는 성격이었다. 그것은 다른 10대 아이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다.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성격이 원만한 성인이 되었고 지금도 양부모님과의 사이는 좋다. 지금은 장난감 대신 양부모님은 내게 생활비를 도와주고 계신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 장난감을 빌리던 것이 지금 부모님께 돈을 빌리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던 것 같다."

방송 인터뷰도 하고 DNA 검사도 했지만...

입양 직후(1975년)의 김신숙씨
 입양 직후(1975년)의 김신숙씨
ⓒ 김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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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부모는 어떤 분이셨나? 양부모의 직업은 무엇이었나? 양부모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었나? 다른 자녀들과의 사이는 어땠나?
"엄마는 간호사였고 아빠는 제네랄 모터스에서 일하셨다. 지금은 물론 두 분 다 은퇴하시고. 내가 자랄 때인 1970년대 두 분은 많이 바쁘셨고 일을 열심히 하셨다. 물론 부모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려고 맞벌이를 하셨지만 어려서 나는 부모님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욕구가 많았다.

그러나 10대가 되고 성인이 되면서 나는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부모님은 나 외에 백인 소년 오빠 2명과 다른 한국인 여동생 1명도 입양했다. 양모는 불임여성이어서 아이들을 입양했다. 남자 오빠들과는 가깝지 않지만 입양한 여동생과는 가깝게 지낸다.

우리가 둘 다 한국인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 여동생이 나중에 친부모를 찾고자 한다면 내가 여러 가지 도움을 주고 싶다. 내 양부모님들은 일중독에 걸린 분들은 아니었고 다른 가족과 비교해서 우리 가족은 그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내가 커서 친구들을 만나고 우리 가족과 비교해본 결과 우리 가족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보통가정의 범주에 든다고는 말할 수 있다. 10대에는 다른 한국 입양인들처럼 물론 내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다."

- 지금까지 친부모를 찾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나?
"몇 년 전 KBS TV와 인터뷰도 했고 DNA 검사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친부모를 찾지는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 한국 친부모님이나 정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친부모님 사랑합니다. 얼굴과 이름은 모르지만 친부모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함께 산책도 가며, 한국 전통음식도 함께 먹고, 빨래도 함께 하며, 집도 함께 청소하고 싶습니다. 보통 한국의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는 것을 제 친부모님들과 함께 해보고 싶습니다. 그것도 안 되면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그냥 친부모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한국 정부는 제가 한국 친부모님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요청드립니다. 저를 알아보시는 분들은 뿌리의집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첨부파일
수잔.bmp


태그:#김신숙, #해외입양, #김성수, #미국, #친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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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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