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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결식이 열리던 날(3일), 나는 고문기술자였던 이근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영화 <밀양>에서 살인범이 자신은 이미 주님에게 다 용서를 받았다며 평안한 얼굴로 면회를 간 주인공 신애를 만나고, 그를 용서하러 갔던 신애가 이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왜, 하나님이 먼저 그를 용서해 주셨는가?

아직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뭔데, 왜 먼저 그를 용서하셨단 말인가?'

 

고문기술자였던 이근안은 7년 형을 마친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초대교회를 핍박하던 사도 바울은 회심한 후, 기독교가 전 세계에 퍼지는 사도의 역할을 감당했다. 깡패 두목이었던 김익두가 목사가 되어 1900년대 한국교회를 부흥시킨 중요한 인물이 된 예가 있으니 고문기술자라고 목사의 자격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터이다.

 

조폭·고문기술자에서 목사로... 회심을 상품화하는 '또다른 범죄'

 

이런저런 범법자들이 회심했다며 기독교로 귀의한 후 목사가 된 예는 많다. 1970~1980년대 폭력조직의 대부였던 조양은도 18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었다. 언론은 이런 이들이 목사가 되었다며 대서특필 했고, 교회에서는 신앙 간증 강사로 초청했다. 신앙 간증의 소재로 얼마나 반전적인 삶인가? 이렇게 얄팍한 한국교회를 그들은 철저하게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목사가 된 것이 어쩌면 이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또 그가 목사가 되었기에,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목사직이 자신이 이전에 저질렀던 악행을 포장하고 덮는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며, 영화 <밀양>에서 처럼 피해자의 삶은 나락에 떨어졌음에도 가해자는 '다 용서 받았다'는 식의 현실이 된다면 이는 부조리한 것이다. 후에 이근안은 자신이 고문기술자가 아니었다고 항변(?)했으며, 전기고문도 단순히 겁을 주려는 것일 뿐이었다고 밝혔다. 일말의 기대를 했지만, 김근태 고문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장례식장에도 그는 나타나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나라를 위한 구국의 행동이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고문기술은 고문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한 바 있다.

 

그가 목사안수를 받을 때에는 이제 남은 삶은 고문기술자가 아닌, 목회자로 살아가겠다고 결단했을 터이니, 개인적으로 그 순간 많은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신앙적인 결단도 했을 터이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가해자 스스로 혹은 신에 기대거나 피해자에게 강압적으로 "용서하라!"고 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용서를 하고자 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 때에도 가해자가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평생 그 짐을 자신이 지고 가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용서의 길, 화해의 길이 열린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잘못 감추는 가면이 된 '교회 직분'

 

목사, 우리 시대의 목사와 한국교회는 장로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덕분에 수난을 당하고 있다. 물론, 목사 중에 그들의 수족이 되어, 떡고물이라도 챙기려는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름 수많은 목사들은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인간적인 약점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 나약함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분토와 같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겠사오니 받아주옵소서' 하는 심정으로 목사안수를 받고, 그 길을 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이근안 역시 안수를 받는 순간 그런 심정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고민을 진지하게 하지 않은 것 같다. 누구라도 들어 쓰시는 분이요, 살인자라도 들어 쓰시는 분이라고 고백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철저한 회개와 반성 없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하나의 가면을 덧씌우는 일일 뿐이다.

 

개인적인 신앙고백이 진정성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만족적인 차원이 아니다. 자신과 신만의 관계가 아니라, 특히 한 개인이나 사회 혹은 단체에 큰 상처를 준 경우라면 거기에 멈춰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한평생 헌신하셨던 그 분은 추운 날 이 땅을 떠나가고, 그를 사지로 내몰았던 이는 성직자가 되어 있는 현실이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그가 성직자로서의 삶을 잘 걸어가고 있는지에 관계없이 우리가 목도하는 장면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리고, 이해할 수 없기에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 교세 확장 위한 '목사직 남발' 그만둬야

 

이런 시점에서 그가 김근태 고문의 무덤가에서라도 땅을 치며 회개하고 통곡한다면, 아니 그런 진정성이 있다면 어떨까? 그것까지도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수 있을까? 아마도, 김근태 고문의 죽음으로 그의 마음도 편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편치않음이 곧 회개는 아닐 터이다. 너무 무거운 짐을 그에게 지우려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가 진정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목사직을 분토처럼 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가 놓을 의도가 없다면, 그에게 목사안수를 준 교단에서 목사직을 박탈하는 것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앞에서 언급한 이들이 목사가 되는 과정은 너무도 쉬웠다. 신학교만 졸업해 목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고 하는데, 정규과정을 거쳐서 목사가 된 내가 봐도 속전속결이다. 아마도 자기 교단의 세를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 목사안수를 남발한 것일 터이다.

 

대부분의 정규 신학교는 목사안수를 받기까지의 과정이 그리 쉽지 않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속한 교단(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내가 목사안수를 받기까지는 1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신학교 4년, 대학원 3년, 군대 3년(휴학까지 계산), 수련과정 3년이었던 것이다. 개인에 따라 1~2년 차이는 있지만, 적어도 10년 이상을 공부해야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목사안수를 받기까지의 기간은 그야말로 속전속결이다. 이런 목사들을 양산해 내었기에 한국교회의 질이 떨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고 김근태 고문의 죽음, 영화 <밀양>, 고문기술자와 조폭의 목사로의 변신에서 한국교회의 현실을 본다. 교회의 직분을 너무 쉽게 주고받는 현실, 그것이 하나의 감투나 가면이 되어버린 현실을 보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건강해지려면, 성직자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목사안수를 너무 남발해선 안 된다. 물론, 장로 임직도 마찬가지다. 종교적인 직분이 자신의 잘못을 감추는 수단이 될 때, 종교는 그만큼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태그:#김근태, #이근안, #목사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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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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