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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스미스 대학 점거 현장.
 골드스미스 대학 점거 현장.
ⓒ 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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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의 윤리와 착취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세상에서 더 이상 무보수 인턴십을 하고 싶지 않다."
"대학생들의 빚더미 속에서 과연 어떤 사람들이 이득을 얻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 꼭 찾을 것이다."
"내가 태어난 지역의 우편번호(postcode)가 내 인생의 여러 기회들에 어떤 실제적 차이를 만드는지 반드시 알고 싶다."
"왜 그동안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서 부자들에게로 옮겨간 거대한 부의 이동을 보고만 있었나? 그리고 폭동은 아직 단 일주일뿐이었다."
(골드스미스 런던대학교 점거 현장에 있는 플래카드 문구들)

점거당하는 영국 대학들

11월 26일부터 12월 3일까지 영국의 대표적인 문화·예술 중심 대학인 골드스미스 런던대학교의 학생과 교직원들이 본부 건물(White Head Building)을 점거했다. '골드스미스를 점령하라(Occupy Goldsmiths)'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번 점거 농성은 올가을 뉴욕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져나간 '점령하라 운동(Occupy movement)'의 일환이었다. 아울러 11월 30일 영국 전역에서 진행된 공공부문 노동자 총파업에 연대하는 투쟁이었다.

이들이 점거한 건물은 대학 재정 삭감과 교육의 시장 편입 및 사유화를 주도해온 영국 신정부의 정책들을 집행하는 이 대학 재정부서들(finance offices)이 입주해 있는 상징성을 가지는 곳이었다. 주최 측은 여기서 영화 상영, 토론 모임, 음악 공연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시위의 공감대를 넓혀 나갔다. 조안나 호지(Joanna Hodge), 사라 아미드(Sara Ahmed) 같은 진보적 교수들도 지지 연설 대열에 동참했다. 심지어 이 학교 문화연구센터(Centre for Cultural Studies)의 경우, 재직 교수들과 스태프들 전원이 참여하여 시위대와 강력히 연대하고 지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점거 농성은 런던대학교 SOAS(동양·아프리카 대학), 브라이튼대학교, 셰필드대학교 등 많은 대학으로 확산됐다. 이처럼 영국의 상당수 대학들에서 점거 농성이 이어지자 급기야 버밍엄대학교와 로열할로웨이 런던대학교는 12월 11일 학생과 교직원들의 캠퍼스 내 점거 행위를 1년간 금지케 하는 내용의 강제 명령서를 관할 법원에서 발부받아 이런 행위를 원천 봉쇄한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공공부문 총파업에 적극 참여한 청년들

<데일리메일>이 실시한 공공부문 총파업 지지 여부 여론조사. 그러나 이 조사 결과는 기사화되지 않았다.
 <데일리메일>이 실시한 공공부문 총파업 지지 여부 여론조사. 그러나 이 조사 결과는 기사화되지 않았다.
ⓒ <데일리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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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노동자로서 이 정부가 추진하는, 대중을 위한 복지와 교육 혜택 축소가 얼마나 부당하며 일방적인 것인지 항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 (11월 30일 거리 행진에 참여한 23세 청년 벤 테일러)

11월 30일, 1926년 이래 영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총파업이 영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일간지 <가디언> 등 주요 매체들은 총 200만 명이 이번 파업에 참가하였고, 90만 명이 가두 행진을 했다고 보도했다. 런던에서만 3만 명이 신자유주의 반대, 복지 축소 반대, 신교육 정책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트라팔가 광장을 비롯한 시내 중심부를 행진하였다.

이날 가두 행진의 중심지였던 트라팔가 광장 인근에선 청년들이 '1%의 99%에 대한 착취'를 대표하는 기업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 광산업체 엑스트라타(Xstrata)사가 입주해 있는 팬톤하우스(Panton House)를 한때 점거했다. 이 과정에서 총 96명이 무단 침입 등의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간지 <데일리메일>이 당일 실시한 총파업 지지 여부 여론조사에선 응답자의 무려 84%가 지지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특별한 이유 없이 기사화되지 않았다. <데일리메일> 온라인판에서 당일 계속 여론조사를 했지만, 그 조사 결과 등 관련 내용이 그날 밤에 사라졌다.

총파업 당시 팬톤하우스를 점거한 시위대.
 총파업 당시 팬톤하우스를 점거한 시위대.
ⓒ 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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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논의되는 영국 청년 폭동

최근, 영국의 주요 언론들은 지난여름 런던 등 전국을 엄청난 혼란에 빠트렸던 폭동 사태의 의미를 다시 짚어보고 있다. <가디언>과 LSE(런던정경대학)가 공동 조사한 결과를 보면 흥미롭게도 당시 큰 공감을 얻지 못했던 주장이 오히려 다시 주목받고 있다.

즉, 이 사태는 정치적 불의에 대한 시민의 반응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 공짜 상품(free goods)을 가질 기회를 얻고자 한 청년들의 열망이 그간 영국 사회가 잉태해 온 신자유주의적 착취에 대응하는 행동이라는 진단이다.

그리고 '폭동 참여자들은 범죄에 심취한 일부 사람들'이라는 당시 주류 언론의 전제가 부정확하다는 점이 증명됐다. 최근 공동 조사 결과는 궁극적으로 당시 폭동이 청년들의 명백한 정치적 행위이자 표현이었음을 보여줬다.

대학 점거, 공공부문 총파업, 폭동. 2011년 영국에서 일어난 이 세 가지 일은 연관되어 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 즉 주체 부분이다. 특히 '폭도'라 불리며 여름부터 계속된 여러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대부분 대학생과 예비 노동자, 즉 청년 세대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들의 목소리에는 국가가 저소득층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지원하는 비용인 EMA(Education Maintenance Allowance) 폐지, 갑자기 세 배로 치솟은 대학 등록금, 그리고 고등교육 혜택 축소에 저항하는 신교육 정책 반대 구호가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폭동 정국 당시 주요 언론은 학생 이외의 참여자 대부분을 중산층 직장인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최근 조사에서 학생 이외 참여자의 59%가 무직자로 밝혀졌다. 이 사실은 지독한 취업난에 따른 청년 실업 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대학 점거 현장.
 대학 점거 현장.
ⓒ 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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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증하는 아시아 출신 유학생

사실 이러한 영국 청년 세대의 고통은 보수당 연립 정부의 등록금 인상 드라이브에 대한 직접적 저항을 계기로 작년 가을부터 꾸준히 표출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영국 대학의 풍경도 바뀌었다는 점이다.

영국 학생들의 대학 진학 비율은 올해 들어 상당히 줄었다. 대학에 대한 국가 보조가 삭감된 것과 맞물려 영국 대학의 학생 구성원 비중마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작년과 올해 들어 대학에서 영국 출신 학생의 비율이 낮아지고 아시아 출신 유학생이 빠르게 늘었다.

예를 들면, 골드스미스 대학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비판적 언론학과 문화 연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학의 간판 학과인 미디어 커뮤니케이션과에서 운영하는 석사 프로그램 중 하나인 '글로벌 미디어와 초국가 커뮤니케이션(Global media & transnational communication)' 과정의 올해 입학생 25명 가운데 무려 20명 이상이 중국 유학생이다.

아시아 출신 유학생이 급증한 것은 본질적으로 영국 청년 세대가 겪는 고통과 맞닿은 현상으로 보인다. 경제적 기반을 갖추지 못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자국 학생들의 자리를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외국, 특히 아시아 출신 유학생들로 대체하는 것이 수익 측면에서는 대학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급격히 늘어난 아시아 유학생들이 장밋빛 현실을 만끽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 중 다수는 영미권 학위가 필요해 영국으로 왔다. 그렇지만 그 속내를 살펴보면 청년 실업, 전망 부재, '스펙' 사회로 인한 '대책 없는 교육 이주(education migration)'인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각 개인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담보로 교육과 이주를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묶어내어 최대 이윤을 획득하는 신자유주의적 교육 산업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걱정스럽다. 현지에서 만난 상당수의 한국인 석사 유학생들의 이야기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에선 대학 졸업하고 취업난이 심하잖아요. 그래서 다들 더 나은 스펙을 쌓기 위해 대학원에 가거나 유학을 떠나거든요. 대학 때부터 토플, GRE 학원은 필수구요. 저도 일단 유학을 오긴 왔는데 여기서 석사를 마친다고 해도 취업에 실질적 도움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마냥 있을 수는 없고 불안하고 하니..."
"대학원이라면 깊이 있게 학문을 연구해야 하는 곳인데 사실 저에겐 또 하나의 경력 같은 의미죠."

이렇듯 신자유주의, 세계화, 교육 시장 논리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영국 대학 교육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저하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처럼 국가가 고등교육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교육을 시장 논리에 맡기는 기조가 확산되면서, 영국 출신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영국으로 유학 오는 이들의 부담도 커지고 있다.


태그:#영국, #대학, #등록금, #신자유주의,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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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문화연구자. 지역의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함. 10여년 전 유학시절 <오마이뉴스> 영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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