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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싸움은 끝나가는 듯했다. 투쟁에 앞장섰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다. 수많은 집회와 토론회, 한 겨울 아스팔트에서 잠을 잤고 수십 일을 굶는 일도 다반사, 바다에 뛰어 들어야 했던 적도 있었다. 결국 '날치기'로 마침표를 찍은 한미FTA. 그 지난했던 6년의 싸움에 자신을 던졌던 이들은 지쳤고 그 마침표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을지도 모른다.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은 노무현 정부가 FTA를 시작했던 2006년 노동계와 학계, 영화계와 문화예술계, 여성계, 소비자단체 등 사회 전반을 망라한 300여 개 단체로 구성됐다. 그리고 협상이 타결되기까지 1년여 동안 줄기찬 투쟁을 벌였다. 그후 돌아 온 것은 주요 단체 지도부의 구속과 벌금, 국민적 관심이 사라짐에 따른 조직력 약화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이후 한미FTA 국회비준이 급물살을 탔던 지난 10월 초. 범국본은 서울 대한문 앞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박석운 공동대표는 20여 일 동안 단식을 하며 국민들의 관심과 투쟁 참여를 호소했다.

안지중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공동집행위원장.
 안지중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공동집행위원장.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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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서울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만난 안지중 범국본 공동집행위원장은 당시 농성과 관련해 "범국본에 조직된 대중들은 6년 동안 싸우면서 동력은 고갈됐고 피로감, 패배감에 쌓여 있었다"며 "농성에 돌입할 때만 해도 현실적으로 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농성을 강행했던 이유를 그는 "한미FTA 투쟁의 마지막 지점에 아무 것도 안 한다면 역사적으로 호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안 위원장은 최근 벌어지는 한미FTA 반대 집회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물론 최근의 집회가 특정 단체 주도가 아닌 '조직된 시민'들에 의해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주인공이라거나 배후, 핵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큰 시위와 투쟁에는 의례 누군가가 그 책임자로 지목되기 마련이고, 그는 범국본 집행위원장으로서 그 총대를 멨다.

안 위원장은 한미FTA 반대 촛불이 불붙기 전부터 관련 집회에서 계속 사회를 봐 왔고, 최근까지도 촛불의 행진을 외치는 목소리는 그의 몫이었다. 때문에 국회 앞 시위의 책임을 물어 영등포경찰서에서, 을지로 일대 시위는 남대문서에서, 광화문광장 집회는 종로서에서 연일 그를 호출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서 체포와 구속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이날 인터뷰에서 안 위원장은 "현재 한미FTA 저지 투쟁은 운동의 장기성을 요구하고 있다"며 "총선과 대선을 바라보고 대기해야 한다거나 선거로 심판하겠다는 의식을 경계하고 현 시기에 대중투쟁이 끓어올라야만 그때까지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5000명 조직한 트위터, 대단하다"

28일 오후 여의도공원 부근에서 열린 '한미FTA 국회비준 저지 범국민대회' 참가자들이 경찰 저지선을 피하기 위해 한강 둔치를 통해 국회의사당으로 행진하고 있다.
 28일 오후 여의도공원 부근에서 열린 '한미FTA 국회비준 저지 범국민대회' 참가자들이 경찰 저지선을 피하기 위해 한강 둔치를 통해 국회의사당으로 행진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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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함께 그간의 투쟁을 정리했다. 지난 10월 28일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여의도공원에서 개최된 한미FTA저지범국민대회에는 3000여 명이 참여했다. 평일 오후 2시에 열린 집회에 일반 참가자는 찾기 어려웠다. 상경한 농민들과 민주노총을 비롯한 각 단체 회원들이 주를 이뤘다.

이날도 역시 사회를 본 안 위원장은 집회를 진행하는 대신 "국회를 점령하라"고 외쳤고 경찰 병력을 따돌린 일부 시위대가 국회에 진입하기에 이른다. 행진에 앞장 선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이강실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이 연행되기도 했다.

그 뒤로 이어진 본회의 때마다 범국본은 매번 수천 명의 참가자를 조직했고 이들은 또 매번 국회를 향해 몸을 던졌다. 안 위원장은 "첫 범국민대회에서 국회에 진입한 것은 조직대중들에게 더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며 "투쟁을 끝내야겠다는 나약한 마음을 극복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더 큰 변화가 생긴 것은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가 작성한 한미FTA 비준과 관련한 합의문이 나오고 실제로 국회통과가 유력시 됐던 본회의가 개최된 지난달 2일과 3일. 범국본은 어김없이 오후부터 집회를 개최했고 국회로 향하다 결국 물대포를 맞았다. 본회의가 취소됐지만 집회는 저녁 촛불집회까지 이어졌다.

3일 오후 여의도에서 열린 한미FTA 비준저지 촛불문화제에 30대 주부가 두 아이와 함께 참여하고 있다.
 3일 오후 여의도에서 열린 한미FTA 비준저지 촛불문화제에 30대 주부가 두 아이와 함께 참여하고 있다.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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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저녁 촛불집회에 1000명이 넘게 왔다. 날씨가 추웠고 잘해야 100명 정도 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 시점부터 대중들이 폭발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와 트위터 역할이 컸다. 조직운동은 되고 있었지만 대중운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1만, 5만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 돌파구가 보였다."

안 위원장의 말대로였다. 2일 촛불집회에는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때 거리로 나왔던 여성들이 대거 참여했다. '쏘울드레서', '쌍코'와 같은 인터넷 카페들이 중심이었다. 급기야 3일에는 여고생과 아이를 동행한 유모차부대도 재등장했다. 한미FTA 비준이 가져올 파장의 예고편이 상영된 것이다.

"11월 22일에 한미FTA 비준안이 한나라당의 날치기로 통과됐지만 전혀 예상을 못했기 때문에 대비책이 없었다. 그래도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촛불을 밝혔고 당시 1000여 명이 모였다. 비준안이 날치기 통과된 마당에 '여의도는 끝났다. 명동으로 가자'고 외쳤다.

1000명이 명동으로 가는 한 시간 사이에 트위터가 엄청난 조직력을 발휘했다. 지하철에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사람들이 트위터에 글을 올리더라. 명동에 도착하니 5000명? 아니 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민주노총도 그 정도의 집회를 조직하려면 한 달 전부터 현장 순회하고 토론해야 한다. 정말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이 물대포에 굴하지 않고 싸웠다. 그것이 날치기 이후 모든 게 끝났다고 하는 절망감을 되받아쳤다."

"아고라는 트위터, <PD수첩>은 <나꼼수>가 대신한다"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팟캐스트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의 한미FTA 반대 특별공연이 열린 가운데,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채 공연을 즐기고 있다.
▲ <나꼼수> 여의도 공연 "이제 니들이 쫄 차례다"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팟캐스트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의 한미FTA 반대 특별공연이 열린 가운데,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채 공연을 즐기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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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미FTA 저지 투쟁은 2008년 촛불을 재현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안 위원장은 당시와 현재의 공통점을 제시했다. 사회운동의 새로운 경험이었던 2008년과 현재가 닮아 있다는 것이다.

"2008년 촛불을 일으킨 건 여러 의견이 있지만 세 가지의 궁합이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가 아고라를 통한 소통, 둘째는 <PD수첩>, 마지막으로 시민사회가 조직된 광우병대책회의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각성과 미디어, 거기에 조직력이 결합하면서 촛불이 폭발할 수 있었다.

아고라의 역할은 지금 트위터가 대신한다. 광우병대책회의는 범국본과 야5당이 맡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꼼수>가 <PD수첩>이다. 현재의 한미FTA 투쟁이 2008년 촛불에 비해 약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아직 평가할 단계가 아니다. 한나라당의 날치기로 폭발했고 그 폭발성은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에 따라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가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넘기 쉽지 않은 장애물도 있다. 기온이 내려가 추워진 날씨와 떨어진 조직력이 그것. 엄동설한 바람 부는 광장에 자주 모이기란 쉽지 않고, 자발적 시민들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지만 조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집회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안 위원장은 이러한 지적에 "조직을 동원하고 전국집중 집회를 잡는 건 이미 판 자체가 대중적 국면으로 넘어 갔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며 "조직 대오가 집회의 양적인 부분을 차지하기는 어렵다"고 반박했다.

"조직된 대중은 5000명을 넘지 못했다. 민주노총이 파업을 하지 않는 이상 만 단위를 넘기 어렵다. 앞서 10월 28일 행진에서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싸울 수 있는 힘을 확인했다는 뜻이다. 사실 그 이후로 계속 모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대중들이 편안하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고민이 깊다. <나꼼수> 공연에 모인 수만의 인파를 보면 더욱 그렇다. <나꼼수>는 여의도의 넓은 공간을 마련해 대중공간을 열었다. 편안한 공간이 있으니 많이 모일 수 있는 것이다. 광장이 열리면 시민들은 모인다."

안 위원장은 "대중들이 모이는 지점에 편안하고 유쾌한 주제가 있어야 한다"며 "매주 주말로 집중점을 잡아 그때마다 새로운 콘셉트로 즐겁고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방에 올인'이 아니라 끈질긴 싸움을 하겠다는 뜻이다.

"한미FTA 반대 운동의 성질을 보면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 대중들이 가지는 반감이 존재한다. 시민들은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긴 후 그 반감을 한미FTA 반대로 분출했다. FTA 자체가 싫다는 것도 존재하지만 이명박, 한나라당을 향한 반감이 크다.

그 점에서 이 운동이 장기성을 요구한다. 총선과 대선까지 이 흐름이 갈 수 있어야 한다. 범국본에서는 시기를 기다리자는 '대기론'이나 선거로 하자는 '심판론'을 경계하고 있다. 현 시기 대중투쟁이 끓어올라야만 총선과 대선까지 갈 수 있다."

오늘 3일 오후 4시 범국본과 야5당은 광화문광장에서 10만 명 참가를 목표로 '한미FTA저지 범국민 촛불대회'를 개최한다. 이에 앞서 서울역 광장에서는 진보진영의 상설연대체인 '민중의 힘(준)'에서 민중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경찰은 광화문광장을 원천봉쇄하고 촛불대회 개최 자체를 막을 것으로 보인다.

이날 대회에서는 범국본이 선언한 한미FTA투쟁 장기전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도를 확인할 수 있을 전망이다.


태그:#한미FTA, #날치기, #한미FTA 범국본, #안지중,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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