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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데타 50년이 되는 시점에 박정희 통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권력자들의 음모와 살생 게임, 야만적 고문과 공포정치, 한강의 기적의 실제 경제성적표, 그리고 대통령의 술과 여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 정도 풀어나갈 예정이다. <기자말>

서울시장 재보궐선거는 20·40의 주도로 새로운 정치를 탄생시키고 마무리됐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 이 시점에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 때문이라고 보아선 안 된다. 반독재, 반부패,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연속선상에서 그 새 바람의 연원을 찾아야 한다.

20·40이라고 하지만 실제 투표참가로 보았을 때 중심역할을 한 세대는 40대, 30대, 20대의 순서다. 그 40·30은 청년기에 1987년 6·10 시민항쟁을 보았다. 정치의식이 가장 치열하게 형성된다는 나이에 격동적인 역사를 체험했다.

당시 이들 앞에서 역사적 역할을 해 보였던 선배 세대는 이른바 '넥타이 부대'다. 그리고 그 넥타이 부대는 정치의식 형성기에 10·26 박정희 권력 타도와 함께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의 회오리를 직접 보았다. 오늘날의 새로운 시대 조류도 박정희 권력의 끝자락에 가 닿아 있다는 얘기다. 역사란 사람들의 삶의 족적이고 사람은 정신에 의해 그 행동이 지배되는 동물이기에 정신사적 맥락을 따라 연결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케케묵은 것 같은 박정희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다시 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지나가 버린 과거가 아니라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는 역사 이야기다.

어린 대학생들에게 자행된 물고문과 구타

SBS 드라마 <자이언트>의 한 장면.
 SBS 드라마 <자이언트>의 한 장면.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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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와 12월 대통령 선거를 좌우할 키워드가 여기에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박정희 권력의 후예가 다름 아닌 한나라당이며 그 딸인 박근혜씨가 그 쪽에서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후예들이 저지른 정치적 죄과와 비자금 도적질 또한 심각하다. 전두환, 노태우만 보아도 그렇다. 그들에게 최소한의 사죄를 통한 '역사적 세례' 절차가 이행돼야 할 것이다.

박정희 권력의 야만적 고문악행은 비단 야당 국회의원들만 당한 게 아니었다. 어린 대학생들을 잡아다 몽둥이 구타와 물고문을 자행한 것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1987년 6·10 시민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도 바로 박정희 정권의 후예들에 의해 저질러진 '계승 사건'이다.

1971년 10월 15일 대학가 위수령 때 교정에서 체포돼 동대문경찰서를 거쳐 중앙정보부로 압송된 나는 처음부터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박정희 공포통치의 본산에 끌려 왔다는 생각에 혼비백산이었다. 압송조 2명이 나를 데리고 들어가자 책상에 발을 걸치고 앉아 있던 사내가 일어선다. 그다지 크지 않은 방은 아무런 비품도 없이 삭막했다. 그들은 나를 벽 앞 가까이에 무릎을 꿇려 앉히고는 앞만 쳐다보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나 지났을까, 다른 3인조로 교대됐다. 이들이 나를 다룰 맹수들이었다.

엎드려 뻗쳐를 시키더니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뭘 묻기도 전에 매질부터 하는 것은 기를 빼놓고 신문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정신적 공포감과 함께 매질에 못이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XX, 엄살이 심하구만."

그들은 나를 붙잡아 앉히더니 정강이에 두꺼운 장작 같은 것을 넣고는 무릎 위를 구둣발로 밟아댔다. 무릎 관절이 절단 나는 고문이었다. 후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나는 무릎 위쪽 대퇴부 뼈를 3분의 1 가량이나 깎아내는 대수술을 해야 했다. 군대에 강제입영된 뒤 관절통에 시달렸지만 군 병원 후송도 허가되지 않았다. 야전 의무대에서 받는 소염진통제로 떼우며 그럭저럭 지내야 했다.

고문은 육체적 고통 못지않은 공포심으로 사람을 항복 시켜 버린다. 나는 모진 고통에 눈물 범벅이 되어 두 손으로 빌었다. 평생에 잊지 못할 가장 처참하고 굴욕적인 몰골이었다.

나는 1993년 이른바 문민정부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뒤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안기부의 수장이 된 권영해씨와 독대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국방부 출입기자 시절 취재원이었다. 그는 나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노라면서 원하는 것을 물었다. 나는 내가 고문 받던 방을 한번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빙긋이 웃더니 "무슨, 쓸데 없이…"하면서 그냥 넘기고 말았다.

"여기서 죽여버려도 자살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1971년 10월 당시 중앙정보부는 무언가를 짜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이라는 해괴한 각본이었다.

"김대중과 김상현이를 만난 게 언제, 어디서지?"

정말이지 이들과 만난 사실이 있다면 불지 않고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학생운동을 하면서 학교밖 정치인이나 종교계와 접촉한 적이 없다. 일종의 역할 분담으로 대외접촉은 주로 선배 복학생들이 맡았으며 나는 학교 내부 장악이 주 임무였다.

그들의 또 다른 요구는 돈 줄을 대라는 것. 포괄적으로 배후세력을 캐기 위한 고문이었다. 위수령 직전 나는 이른바 지하신문이라 불리는 미등록 간행물을 두 번 발행했으며 반응이 좋아 세 번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의단(議壇)'이라는 제호의 이 지하신문은 서울대 문리대 대의원회의 기관지 격이었다. 대의원회 의장이던 내가 발행인으로 유일하게 이름을 내걸었고 편집진은 모두 비밀이었다. 편집위원으로는 홍세화(현 한겨레 기획위원), 임진택(마당극 연출가), 이동진(가야대학교 교수) 등 9명이 활동했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지하신문의 편집진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오로지 돈을 댄 배후를 대라는 거였다. 이 문제도 사실 투명하게 입증되는 내용이었다. 법적으로 등록만 안 했을 뿐 문리대 대의원회 기관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산은 학생 자치경비 중에서 사용했다.

이런 뻔한 사실을 입증하는 데만도 험한 고문악행에 시달려야 했다.

"너, 이 방이 어떤 곳인지 알아? 여기서 죽여버려도 저 산에 던지고 투신 자살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인마."

그해 대통령선거가 있던 4월 직전, 육군 대령 한 사람이 김대중 신민당 후보에 대해 지지하는 말을 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의문사한 사건이 떠올랐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상태가 되는 듯했다.

책상 앞에 앉아 신문받는 동안 옆방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고문하는 자의 저주하는 욕설과 바닥에 나뒹굴고 쿵쾅거리며 절규하는 목소리가 뒤엉켜 정녕 인간 이하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사람이 저렇게 당하고는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동료들과 얘기해 보니 대개 비슷한 경험이었고 공포감을 주기 위한 녹음소리인 것 같았다.

박정희 측근들도 시키는대로 안 하면 고문·폭행

박정희는 자신의 측근 실세들도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항명자로 몰아 중앙정보부를 시켜 고문·폭행했다.

1971년 위수령 직전인 10월 2일, 국회에서는 당시 오치성 내무장관(육사8기, 5·16쿠데타 가담)에 대한 신민당의 해임결의안이 상정됐다. 박정희는 일사불란하게 반대표를 던져 이를 부결시키라고 공화당 지도부에 지시했다. 그런데 표결 결과는 공화당 의원들 중에 상당한 반란표가 생겨 해임안이 통과되고 말았다. 박정희의 이른바 '진노'가 표출됐다.

고 박종철 열사 20주기를 맞이한 지난 2007년 1월 14일 오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509호실에 고인의 영정과 국화꽃이 놓여 있다.
 고 박종철 열사 20주기를 맞이한 지난 2007년 1월 14일 오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509호실에 고인의 영정과 국화꽃이 놓여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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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주동자들을 색출해 징벌하라는 엄명이 중앙정보부에 떨어졌다. 이른바 10·2 항명파동의 시작이다. 그날로 공화당의 거물급 의원인 김성곤 재정위원장(쌍용그룹 창업자)과 길재호 사무총장(육사8기, 5·16 가담) 등이 중정에 잡혀 들어갔다. 집권세력의 중심 역할을 하던 이들도 하루 아침에 고문자들의 먹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성곤은 중정 고문자들에게 온갖 수모를 겪었다. 그는 카이젤 수염을 기르는 정치인으로 유명했고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야, 네가 카이젤이야? 콧수염이 근사한데 그래. 이게 네 위신이냐?"

고문자들은 그의 카이젤 콧수염을 뽑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존심과 인격을 말살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카이젤 콧수염의 절반만 뽑고 한 쪽은 일부러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코미디도 아니고 비열과 야만 말고는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김성곤은 그 후 일절 바깥출입을 금하다가 1975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불과 62세였으니 고문 후유증과 화병으로 병사한 것이다. 동양통신을 창간한 언론인으로, 쌍용양회를 창업한 기업인으로, 집권여당의 중진 실세로 남부러울 것 없던 거물이 불시에 박정희의 '역린'에 걸려 몰락한 것이다.

김성곤과 함께 중정에 연행된 길재호도 몽둥이 찜질을 당했다. 5·16쿠데타 주체세력 중 한 사람이던 그는 여생을 지팡이 짚는 몸으로 지내야 했다.

집권세력 중심인물도 박정희 앞에선 파리목숨

박정희의 측근 실세에 대한 징벌로는 1973년 4월 터진 윤필용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윤필용은 육사8기로 박정희의 오랜 측근이었다. 군대시절 부관으로 인연을 맺은 뒤 계속 데리고 다녔으며 5·16 후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과 육군 방첩대장 등을 거쳐 1970년 수경사령관이 된 오른팔이었다. 그런 그도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말았다. 윤필용 사건은 직계 부하였던 전두환의 밀고를 비롯해서 박정희 권력 내부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을 남겨놓고 있어서 따로 써야 한다.

10·2 항명파동과 윤필용 사건에서 박정희 권력이 측근에게까지 보인 악행은 또 다른 측근의 '배신'을 낳았다. 박정희의 측근들 중에 배신이 많았던 이유는 언젠가 당한다는 불안감과 무서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측근 실세들이 박정희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배신이라고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박정희 권력이 워낙 1인 중심으로 횡포를 부려서 기본적 정당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아래서는 집권세력의 중심인물조차 갑자기 희생양이 되기 일쑤였고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공식적으로 권력의 5대 기둥은 국무총리, 국회의장, 공화당 의장, 청와대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다음의 실제 권력은 언제나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경호실, 그리고 보안사에 있었다. 다른 공식적 자리는 그저 '대독 총리'로 희화화되듯 힘 없는 얼굴 마담에 불과했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권력실세를 찾으라면 중앙정보부장으로 김형욱, 이후락, 김재규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박종규와 차지철이었다. 군부에서는 단연 수경사령관 윤필용이었다.

이중 맨 먼저 박정희에 등을 돌린 사람은 김형욱이었고 그 다음에 이후락은 외국에 도피했다가 박정희의 신변보장 언질을 받은 뒤 귀국했다. 박정희의 측근 중에서 결정적으로 등을 돌린 사람은 말할 것 없이 김재규였으며 그것은 역사적 대의명분을 갖추었다고 보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연재의 글 '박정희 권력 평가'는 그 후예들을 제대로 들여다 보기 위한 시도이다. 박정희의 후예들인 한나라당과 딸인 박근혜 의원, 그리고 수구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히틀러의 악행을 진심으로 청산했던 후대의 독일 민주정부처럼 우리도 과연 해 낼 수 있을까?



태그:#박정희, #고문악행, #측근실세 징벌, #10.2 항명파동, #박정희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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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치학과 학사 석사 박사, 하버드대 니만펠로십 수료. 동아일보 논설위원, 오마이뉴스 논설주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제17대 국회의원, 방송통신위 상임위원-방송평가위원장, 서울디지털대 총장 등 역임. 현재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저서 : '한국정당과 정치지도자론' '군부와 권력' '우리시대의 정치와 언론' 외 1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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