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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공산 가산산성 진남문의 복원된 모습
 팔공산 가산산성 진남문의 복원된 모습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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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역사유적으로 '남아 있는' 성(城)의 대표는 가산산성이다. 가산산성은 가산에 있다. 그런데 가산은 팔공산의 서쪽 비탈에 있다. '산(팔공山)'의 '가[邊]'에 붙어 있다고 하여 '가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봉우리를 둘러싸고 축조된 성이 가산산성인 것이다.

가산산성은 국가 사적 216호이다. 복원 상태가 원형에 많이 미치지 못한다는 전문가들의 평판을 얻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국가사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그만큼 역사적 의미를 지닌 덕분이다. 산 아래 평지에 외성(外城)을 쌓고 중턱에 중성, 산 정상부에 내성(內城)을 쌓는 산성 축조법의 전형적 면모를 보여주는 사적이 바로 가산산성이란 말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에 시달린 끝에야 '유비무환'의 교훈을 깨달은 조선 정부가 1640년부터 1741년에 걸쳐 내성, 외성, 중성의 순으로 축조했다.

 가산산성의 동문. 가산산성의 성문들 중에서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리고 진남문에서 등산을 할 때 가장 먼저 만나는 문이기도 하다.
 가산산성의 동문. 가산산성의 성문들 중에서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리고 진남문에서 등산을 할 때 가장 먼저 만나는 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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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산성은 본래 가산바위를 거쳐 주등산로를 타고 팔공산을 일주하는 등산객들의 애호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근래 들어 도로 개설 등으로 접근성이 좋아지자 일반 방문객의 발길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역사학습지로서 각광을 받아 가족 단위 답사자들이 끊임없이 찾는 추세이다.

이곳은 가장 보기 좋게 복원되어 있는 진남문부터 구경한 다음, 성곽 안으로 들어가 임도를 계속 오르면 동문, 중문, 서문, 북문에까지 도달한다.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관리된 넓은 임도를 주욱 걷기만 하면 중문까지는 단숨에 도달하기 때문에 길을 찾는 데 어려움이 없고, 급한 경사나 잡목이 우거진 숲을 헤맬 일도 없이 아주 편하다. 길이 구불구불하면서도 오르막이 아주 완만한 임도인 덕에 누구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등산을 겸해 걸을 수 있는 답사로이니, 유난히 인기를 얻게 된 것은 당연지사일 듯하다. 

보존 상태는, 등행길에 만나는 문 중 제일 먼저 마주치는 동문이 가장 좋다. 중문은 비록 복원이 완료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옛맛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서문과 북문은 거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수준으로, 특히 북문은 눈이 내린 날에는 찾기조차 어려우므로 억지로 그 길까지 답사할 필요는 없다. 짐승들이 다닌 '무서운' 발자국만 잔뜩 확인하게 될 뿐이다.

 대구읍성의 남문(정문)이었던 영남제일관. 지금은 망우공원에 복원되어 있다.
 대구읍성의 남문(정문)이었던 영남제일관. 지금은 망우공원에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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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산성을 대구에 '남아 있는' 성의 대표라고 말하는 것은, '남아 있지 아니한' 것까지 합할 때의 대표가 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역사에 가정을 두는 것이야말로 너무나 허망한 일이지만, 없어진 것의 안타까움까지 포함한다면 더욱 그렇다. 대구을 대표하는 성의 유적은, 없어졌으니 유적이랄 것도 못 되지만, 대구읍성(邑城)이다.

가산산성이 외적의 침입에 대한 대책으로 축조된 것처럼, 대구읍성 역시 왜의 준동에 대비하여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토성(土城)이었는데 왜란으로 무너진 것을 1736년에 석성(石城)으로 재건축하였다. 본래 대구읍성의 정문이자 남문이었지만 지금은 망우공원에 복원되어 있는 영남제일관 앞에 옮겨 세워져 있는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의 기록에 따르면 대구읍성 재축조는 1736년 1월 8일부터 6월 6일까지 연 인원 7만8534명이 동원되어 일했다.

그러나 북경성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대구읍성은, 왜의 침입에 대비해 재축조된 탄생 이력과는 역설적이게도 왜인들과 친일파에 의해 부서지는 비극을 맞는다. 1906년 (광역시 이전의 대구시장에 해당되는) 대구군수 박중양은 야밤에 왜인 부랑자 등을 동원하여 막무가내로 대구읍성 파괴를 시작한다. 그 후 조정에 대구읍성 철거 허가를 신청하지만, 왕의 명령으로 '불허'를 통보받는다. 하지만 박중양은 1907년에 이르러 마침내 성곽 전체를 모두 무너뜨려 버린다.

 침산 정상부의 정자 '침산정'이 멀리 보이는 풍경. 침산 일대는 인근 주민들을 위해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침산 정상부의 정자 '침산정'이 멀리 보이는 풍경. 침산 일대는 인근 주민들을 위해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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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인들은 대구읍성 밖에서만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일인들은 성곽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최대의 걸림돌이라 여겼다. 그들은 대구군수 박중양에 대구읍성을 철거해줄 것을 요청했다. 친일파 박중양은 그들의 청탁을 받고 '국보' 대구읍성을 무참하게 파괴한 것이다.

하지만 왕명까지 거역한 박중양이지만 처벌은커녕 평안남도 관찰사(지금의 도지사)로 승진한다. 이등박문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자였기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이듬해인 1908년 박중양은 경북관찰사로 '금의환향'한다. 그는 점점 승진가도를 달려 1943년에는 마침내 중추원 부의장까지 오른다. 일제가 1935년에 펴낸 <조선 공훈자 명감>에 "이토 이하 총독부의 대관으로부터 역량 수완이 탁월하다고 인식되고 비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지사 급에서는 박중양뿐이다"라는 찬사(!)를 받는 인물이 바로 박중양이다.

박중양은 대구 출생자가 아니다.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했다. 그는 이등박문의 천거로 대구군수가 되고 대구읍성을 파괴한 이후 아예 대구로 원적을 옮겼고,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신천 옆 오봉산 기슭에서 거주하였다. 오봉산은 원명이 침산인데, 박중양이 사유지로 만든 이후 봉우리가 다섯 개 있다 하여 그렇게 새로 작명을 하였다. 따라서, 아직도 대구시민들 중에 침산을 오봉산이라 부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신천 하류 침산 아래는 옛날 사람들이 빨래를 하던 곳이다. 그래서 '빨랫돌[砧]'이 많은 강가의 '산'이라 하여 산봉우리에 '침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것을 친일파의 거두 박중양이 친일행위의 소득으로 사들여 제 마음에 드는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을 안다면, 지금이라도 마땅히 "오봉산"을 버리고 "침산"을 복원해야 한다. 박중양이 고향인 경기도 양주 대신 대구에 정착해서 살면서 해방 이후에도 줄곧 큰소리를 탕탕 치고 행세했다는 것만으로도 대구의 치욕일진대, 아직도 그가 사유화하여 작명까지 새로 한 산의 이름을 우리가 두고두고 부른다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어불설성이기 때문이다.

 침산공원 정상 '침산정' 아래 큰 바위에 새겨놓은 서거정의 침산 노을 찬시
 침산공원 정상 '침산정' 아래 큰 바위에 새겨놓은 서거정의 침산 노을 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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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13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박중양이 남긴 36억 7110만원 정도의 토지 8만 2082㎡를 국가에 환수한다고 발표했다. 그 토지가 바로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 소재 '침산공원' 일대이다. 정상부에 침산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고, 정자 아래에 서거정의 '대구10경' 중 한 수가 새겨져 있으며, 금호강과 신천의 경관을 한눈에 즐길 수 있으며, 와룡산으로 넘어가는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침산 땅이 해방 이후 62년만에야 나라의 소유로 되돌아온 것이다.

우리나라 옛 토성 건축의 방식을 잘 보여주는 달성

없어진 대구읍성 타령은 이 정도로 마치고, 남아 있는 유적에 한정하여 살펴보자. 가산산성과 더불어 대구의 '살아 있는' 2대 성 유적은 단연 달성(達城)이다. 우리나라 고대 토성 축조의 기술을 강력히 증언하는 달성은 그 공로로 국가사적 62호로 인정되어 있다. (달성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오마이뉴스 2011년 1월 11일자 기사 <구제역 때문에 폐쇄된 국가사적 62호 달성공원> 참조)

 독좌암. 봉무정 바로앞 개울가에 있다. 1875년에 지어진 봉무정은 개인(최상룡)이 건축한 대구 유일의 공공기관 건물이다.
 독좌암. 봉무정 바로앞 개울가에 있다. 1875년에 지어진 봉무정은 개인(최상룡)이 건축한 대구 유일의 공공기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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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남아 있는 성터 중에서 가장 그 규모가 작은 것이 봉무토성이다. 봉무토성은 신숭겸 유적지로 들어가는 파군재 삼거리 바로 아래의 작은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 토성 흔적은 비록 대구시 기념물 4호이기는 해도 답사할 만한 자체 매력은 별로 발산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웃 잘 둔 덕에' 망외의 유명세를 만끽하고 있다. 견훤군에 대패한 왕건이 옷까지 바꿔입고 도망을 쳤다가 혼자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는 독좌암이 바로 봉무토성 아래의 봉무정 대문 앞 10m 지점 개울가에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깃들어 있는 성터로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인 도동 측백수림 뒤편의 용암산성을 들 수 있다. 용암산성은 정상부 인근에 아직도 물이 솟는 샘을 거느린 특이한 지형의 성이다.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의 샘 자체가 소중한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왜병의 포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 산에 머물며 항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옥천 덕분이라고 하니, 대구시 기념물 5호인 용암산성 흔적은 충분히 답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성터라 하겠다.

 용암산성의 옥천. 이곳은 팔공산의 웅혼한 줄기를 감상하기에도 아주 적격인 지점이다.
 용암산성의 옥천. 이곳은 팔공산의 웅혼한 줄기를 감상하기에도 아주 적격인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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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시내에 현존하는 산성 중 겉모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것은 팔거산성이다. 팔달교와 북대구IC 사이의 다리로 금호강 건너 들어가면 나타나는 작은 마을 노곡동의 뒷산에 위치한 산성이라고 해서 흔히 노곡산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대구시 기념물 6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거산성은 현재 칠곡 읍내 주민들의 가벼운 등산로로 애용되고 있다. 그런데 칠곡 일대의 옛날 이름이 팔거현이었다. 노곡산성을 팔거산성이라 부르는 까닭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849년부터 1851년까지 대구판관으로 재직했던 서유교가 지금의 팔달교 자리 인근인 팔달진에 처음으로 다리를 놓기 이전까지는 모두들 노곡동에서 배를 타고 금호강을 건넜으므로 이 일대는 교통상 및 군사상의 요지였고, 그 결과 신라 이래 계속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외에 대구시 기념물 7호인 대덕산성도 있다. 앞산 일부를 더러 산성산이라 부르는 것을 보고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케이블카 위쪽 승하차장과 앞산 정상부 사이에는 대덕산성을 해설하는 안내판이 두 개나 세워져 있다. 또, 청도와 가창에서 파동을 거쳐 대구 시내로 진입하는 적을 지키기 적격인 용두산성이 있었고, 봉무토성과 마주보는 곳에는 검단토성도 있었다.

대구의 성(城) 답사여행을 요약해서 소개해 보자. 국가사적인 달성과 가산산성을 꼭 살펴보아야겠다. 우리나라 옛날 토성과 산성 구축 방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유적들이다. 그리고 친일파가 없앤 대구읍성의 역사를 가슴 아파하며 그 잔흔인 영남제일관이라도 보기 위해 망우공원도 방문해야겠다. 마지막으로, 용암산성 답사를 권하고 싶다. 임진왜란의 상처도 되새겨볼 수 있고, 특히 팔공산의 웅혼한 줄기를 가슴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점이 바로 옥천 둔덕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말해두고 싶다.

 용암산성 옥천에서 바라본 팔공산의 줄기.
 용암산성 옥천에서 바라본 팔공산의 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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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 <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장편소설 <딸아, 울지 마라><백령도><기적의 배 12척> 등을 썼다. <집> 등 개인 사진전도 10회 이상 열었다.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다. 전교조 활동으로 5년간 해직교사 생활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