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5.16 군사 쿠데타 50년이 되는 시점에 박정희 통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권력자들의 음모와 살생 게임, 야만적 고문과 공포정치, 한강의 기적의 실제 경제성적표, 그리고 대통령의 술과 여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 정도 풀어나갈 예정이다. <기자말>

드라마 <에덴의 동쪽>의 한 장면. 드라마에서 남영동 대공분소로 강제연행되어 물고문 받는 모습.
 드라마 <에덴의 동쪽>의 한 장면. 드라마에서 남영동 대공분소로 강제연행되어 물고문 받는 모습.
ⓒ mbc 화면 캡처

관련사진보기


# 장면 ①

아무런 간판도 장식도 없는 삭막한 콘세트 건물. 군 정보기관 소속의 한 소령이 연행돼 온 남자에게 협조해 줄 것을 나름대로 정중하게 당부한다.

"옷을 다 벗으세요."

그는 속내의만 남기고 겉옷을 모두 벗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4명의 점퍼 차림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속내의를 벗겼다. 점퍼들은 알몸이 된 남자의 팔과 다리를 교차하여 묶더니 그 사이에 큰 막대기를 끼워서는 두 개의 책상 사이에 걸어 놓았다. 마치 통닭구이처럼 사람을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았다. 취조 4인조는 '통닭 남자'의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는 주전자로 물을 붓기 시작했다. 숨을 못 쉬고 거의 질식 상태인 그에게 또 사정 없는 각목 구타가 가해졌다.

고문에 못 이겨 그는 풀어주면 말하겠다고 했다. 점퍼들은 3, 4차례나 다짐을 받고는 그를 풀어 땅에 꿇어 앉혔다.

갑자기 그의 입에서 "우드득, 딱"하는 소리가 났다. 혀를 깨물었으나 의치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취조하던 점퍼들은 당황해 하면서 그를 제지했다.

# 장면 ② 

국가정보기관의 수사 안가에 밤 11시경 한 50대 민간인이 연행돼 왔다. 옷을 벗기고 군 작업복으로 갈아입힌다. 이어 의사가 건강상태를 점검했다. 의사는 책임자에게 "혈압이 높으니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담당수사관은 "사실대로만 얘기하면 곧 나갈 수 있어요"라며 점잖게 취조하기 시작했다. 수사관은 수년 전 잡혀왔을 때도 심문하던 그 사람으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조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수사관이 바뀌더니 2인조 고문자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주먹질과 각목 구타가 이어졌다. 고문자들은 기가 빠진 그를 지하실로 끌고 들어갔다. 의자에 앉혀 손발을 묶고 고개를 뒤로 젖혀 얼굴에 물을 부었다.

그래도 묻는 말에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자 고문자들은 그를 어떤 작은 방에 집어 넣었다. 진공실 고문이었다. 조금 있으니 얼굴과 가슴이 바깥으로 찢어지는 것 같고 몸뚱이 전체가 공중에 둥둥 뜨는 듯했다. 비명을 지르려 해도 목소리가 안 나오고 가슴이 미어 터질 것 같았다.

# 장면 ③ 

체격이 건장한 40세 안팎의 남자 한 사람이 군 헌병대에 연행됐다. 콘세트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2명의 조사요원이 야전 침대용 각목으로 무자비하게 마구 구타했고 남자는 실신해 쓰러져 버렸다. 완력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남자에게 옷을 다 벗겨서 묶으려면 상당한 실갱이가 벌어질 터였다. 그런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 그냥 처음부터 두들겨 패서 기절시켜서 해결해 버린 것이다.

그가 의식을 회복해 보니 알몸이 된 채 손과 발이 묶여 주리를 튼 것 같은 상태에서 두 책상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이어 얼굴에 수건을 씌워놓고 주전자로 물을 부으니 그는 다시 실신했다. 정신이 들어 보니 의사가 혈압을 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죽지 않을 만큼 고문하는 것이다. 고문은 밤을 새우며 여러 차례 반복됐다.

일제 치하도, 아르헨티나도 아닌 박정희 치하의 만행

1977년 10월 7일 국군보안사령부 창설식 장면(자료사진).
 1977년 10월 7일 국군보안사령부 창설식 장면(자료사진).
ⓒ 국군기무사령부

관련사진보기


이 야만적인 고문장면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것일까. 흔히 우리는 일제 식민통치기 고등경찰이나 헌병대가 항일 독립운동가에게나 가하는 악행을 연상한다. 아니면 1970년대 중반 남미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가했다는 고문을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벌인 악행은 '더러운 전쟁'으로 시사용어 사전에도 올라 있으며 지금까지 세계인의 저주 대상이다.

그러나 위의 3개 고문장면은 일제 치하도,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아래서 있었던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도 지금부터 불과 40년 전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가기관에서 벌어진 일이다. '박정희 판 더러운 전쟁'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벌인 '더러운 전쟁'은 1976년부터 시작됐다. 박정희 정권은 그보다 훨씬 앞선 '더러운 전쟁'의 선배 격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유신쿠데타였다. 그러자 중앙정보부, 보안사, 헌병대가 설치기 시작했다. 국가기관이 조직폭력배나 다름없는 불법 폭력을 구사했다. 그것은 가히 히틀러나 일제 치하에서 자행되던 체제폭력이었다. 명색이 국민의 대표로서 국정감사 중이던 국회를 해산하고는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을 붙잡아다 악행을 가했다. 갖은 고문기술을 동원해 비인간적으로 문초했다. 그 고문기술은 일제로부터 전수해 내려 온 것이라고 했다. 

장면 ①은 당시 신민당의 유일한 군 장성 출신 국회의원인 이세규가 당하는 장면이다. 그는 5·16쿠데타 후 군 장성 출신 중에서도 자기 집 한 채 없이 사는 청렴결백으로 소문난 사림이었다. 그런데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안보특보로 정계에 입문한 것이 죄(?)라면 죄였다. 군 장성 출신인 그가 군 내부 사정에 밝은 것은 당연했고 그것이 야당에 매우 긴요하고 드문 역할이었다. 군 내부에서 익명의 제보도 많았다. 박정희에게는 그것이 더욱 눈에 거슬렸다.

박정희는 자신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서인지 특별히 군 내부의 동향 파악에 신경을 썼다. 자신이 과거 남로당의 군내 프락치였다가 그 조직을 밀고하고 살아남아서인지 내부 밀고자와 정보망을 특히 미워했다. 군 장성 출신으로 야당에 간 이세규 의원이야말로 그런 점에서 박정희와 그 주구들이 눈독을 들일만한 표적이었다.

야당의원 자결 시도, 의치 부러져 피투성이... "적군 포로 돼도 이렇게 안 해"

군 정보수사기관에서 인간 이하의 고문에 시달린 이세규는 혀를 깨물고 의치가 부러져 피투성이가 된 입을 겨우 벌려 이렇게 소리쳤다.

"적군의 포로로 잡혀도 장성에게는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장군으로서 최후의 것을 다 잃었다. 더 이상 살아봤자…."

제아무리 악랄한 군 취조관이라 해도 장군의 처절한 저항에 잠시 어쩔줄 몰라했다.

"왜 이러십니까…."

이세규는 양쪽 팔을 잡는 놈들에게 입속의 핏물을 내뱉으며 울부짖었다.

"너희 놈들은 군인도, 인간도 아니다!"

이세규는 5일간이나 더 그렇게 고문에 시달렸다. 그들의 요구는 이세규의 군부 내 인맥과 제보자 명단이었고 10·17 유신쿠데타에 지지성명을 내달라는 것. 이세규는 끝까지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그는 더 이상 정치권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고 평생 허리 통증에 시달리며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지난 2010년 10월 6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한반도선진화재단 주최로 열린 한선국가전략포럼 창립기념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최형우 전 의원이 참석하고 있다.
 지난 2010년 10월 6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한반도선진화재단 주최로 열린 한선국가전략포럼 창립기념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최형우 전 의원이 참석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장면 ②는 조연하 전 국회부의장, 장면 ③은 최형우 전 정무장관이 역시 10·17 유신쿠데타 직후 잡혀가 고초를 당한 증언이다. 최형우는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내란 때도 보안사에 끌려가 똑같은 악행을 당한다. 그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 선 후 집권당 사무총장과 내무장관을 지낸 실세가 됐다. 그렇게 못된 악행을 당하고도 가해자들과 손잡고 3당합당을 한 대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김영삼 정부 아래서 내란과 부정축재로 구속된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그들의 체제가 저지른 고문악행을 되갚아 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군부정권이 끝나고 명색이 문민정부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도 3당합당의 대가일까. 

유신쿠데타 당시 이와 똑같은 박정희의 '더러운 전쟁'에 당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20여 명에 이른다. 위의 세 의원 외에 강근호, 김경인, 김녹영, 김상현, 김한수, 나석호, 박종률, 이종남, 조윤형, 홍영기 등이 모두 국가기관에 잡혀가 모진 고초를 당했다.

이들 중 13명의 야당 의원들은 훗날 1975년 2월 28일 합동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들이 겪은 고문에 대해 증언했다. 그러나 종교인과 학생운동 간부들은 아직 이렇다 할 고문악행에 대한 증언을 남겨놓지 않았다. 나 자신도 유신쿠데타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1971년 10월 15일 대학가 위수령 때 교정에서 체포돼 일주일 이상 경찰서와 중앙정보부에서 공포의 고문악행을 당했다. 나는 이제야 그 전모를 증언한다. 

박정희 정권 '한국판 더러운 전쟁'으로 학생운동 소탕... 1889명 연행

취조실과 고문실이 있던 옛 안기부 지하실.
 취조실과 고문실이 있던 옛 안기부 지하실.
ⓒ 권기봉

관련사진보기


당시 박정희는 가장 비타협적인 저항세력이던 학생운동을 소탕하기 위한 '더러운 전쟁'을 벌였다. 전국 대학가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연대장급 지휘 아래 군대를 투입했다. 서울대학교 본부와 문리대 법대 등이 있던 동숭동에는 김복동 대령, 서울대학교 상과대학과 고려대학교가 위치한 종암동 지역에 전두환 대령, 그리고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등이 있는 신촌에 정병주 준장의 부대가 각각 진주했다.

지휘관은 박정희의 친위대인 하나회와 그 후원 장성이었다. 그러나 정병주는 후에 전두환의 12·12군사반란 때 반대하다가 하나회인 부하에 총격 체포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군 부대가 진주하기 전 관할 경찰서는 대학 캠퍼스에 사복형사대를 투입해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그날 하루만 전국에서 1889명을 붙잡아 갔다가 그 중 92명의 간부만 유치장에 구금하고 모두 석방했다. 그후 캠퍼스에서 붙잡히지 않은 학생간부까지 포함해 전국 각 대학에서 모두 177명이 제적당한 채 군대로 강제입영 조치됐다.

우리는 논산훈련소를 거쳐 일선 철책부대에서 34개월 내내 행정반 근무가 금지된 채 소총수로만 군 복무를 했다. 박정희에 의한 '더러운 전쟁'의 희생자들은 당연히 남다른 유대를 갖게 됐고 제대 후 '71동지회'를 결성해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서울대학교 개교기념일인 10월 15일, 나는 이틀 전 1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연합 학생총회의 사회자였기에 일단 서울의 교외에 숨어야 했다. 그런데 대학본부에서 열리는 총장 주재의 개교기념 행사에 학생 대표가 참석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전갈이 왔다. 당시 나는 서울대 문리대 대의원회 의장으로, 그리고 김상곤(현 경기도 교육감)은 총학생회장으로 개교기념 행사장에 가야 했다. 그때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제적과 강제입영은 못 면하더라도 모진 고문을 경험하진 않았을 텐데….

대학본부 총장실에 막 들어가려 하자 안에서 보직 교수들이 밖으로 나오면서 "김군, 큰일 났네. 곧 10시에 정부가 위수령 발동을 발표한다고 하네"라고 전한다. 교수들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나왔다. 나는 위수령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겠다며 대학 본부를 나서다가 건너 편 의과대학 구내에서 동대문 경찰서 형사 팀에 체포되고 말았다.

경찰서에 들어가자마자 두 형사가 뺨을 때리면서 욕지거리와 함께 일종의 '야료'가 시작됐다. 평소에는 그렇게 못 하던 정보과 형사들이 위수령 발동에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 후에 김상곤이 붙잡혀오고 이어 다른 몇 동료들이 또 잡혀왔다. 김상곤도 벌써 뺨을 몇 대 맞았는지 벌겋게 부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는 당시 관할이던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 그리고 성균관대 학생 간부들이 불법 감금됐다.

경찰 조사반, 암실서 폭행 고문... 새벽녘 검정 지프에 실려 간 곳은?

경찰 조사반은 항상 밤 12시가 넘어서야 우리를 불러냈다. 지하 취조실이었다. 맨 뒤에 조사반장이 있고 그 앞쪽에 취조 형사의 책상이 자리했다. 취조 형사의 책상에는 각목이 하나씩 준비돼 있었다. 취조 형사는 수시로 그것을 들어 어깨와 팔을 두들겨 패며 "빨리 불어 인마!"라고 소리쳤다.

그러다가 "아, 이 자식 안 되겠네. 어이!"하고 부르면 건장하고 늘씬한 사내가 나를 끌고 컴컴한 암실로 들어갔다. 사내는 나에게 온갖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그러고는 녹초가 되게 폭행당한 나를 다시 취조 형사 앞에 앉힌다.

"야 인마. 너 버텨봐야 고생만 해. 불지 않으면 절대 안 끝나. 우리도 죽겠어."

경찰서에서 그렇게 시달린 지 한 사나흘쯤 되는 날 새벽 2시경. 취조 형사는 책상에서 몽둥이를 들어 나를 다시 후려 팰 기세였다. 그때 뒤쪽의 조사반장이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예? 아 예, 그 놈 여기 있습니다. …"

그러더니 반장은 나를 노려보며 몽둥이를 드는 형사에게 말했다.

"어이, 그 놈, 그냥 놔 둬라. 그 놈 A에서 올려 보내라고 한다 야."

나는 그 A라는 말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이게 과연 시중에서는 남산이라 불리는 중앙정보부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당시 중앙정보부는 공포의 화신이었다. 제발 그곳만은 피해야 하는데….

그때 내 앞의 취조 형사가 그것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말했다. 그는 몽둥이를 내려놓으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너 인마, 거기 가면 진짜 고생하는데. 내가 뭐라고 그랬어. 여기서 빨리 불라고 할 때 끝내 버리지 참…."

그의 짐짓 동정어린 말투가 나를 더욱 공포 속에 몰아 넣었다. 순간 그래도 경찰이 내 편이고 중앙정보부는 악의 소굴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악행의 정도가 다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나에게 취조반 한쪽에 앉아 쉬라고 했다. 그리고 서너 시간이나 흘렀을까, 새벽녘에 나는 검정색 지프차에 실려졌고 두 사내가 양쪽에서 팔을 잡았다. 차가 퇴계로 쪽을 향하자 그들은 내 머리를 앞 의자 등받이 밑으로 쳐박았다. 나는 바깥을 내다 보지 못한 채 끌려가 그 '남산'의 어느 독방에 던져졌다.

덧붙이는 글 |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자가 반대자들에게 고문하고 압살한 '더러운 전쟁'은 시사용어 사전에도 올라 있으며 세계인의 저주 대상이다. 그러나 그 '더러운 전쟁'은 사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치하의 대한민국에서 먼저 자행됐다. 부끄러운 역사다.



태그:#박정희 , #고문, #더러운 전쟁 , #체제폭력, #박정희의 더러운 전쟁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서울대 정치학과 학사 석사 박사, 하버드대 니만펠로십 수료. 동아일보 논설위원, 오마이뉴스 논설주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제17대 국회의원, 방송통신위 상임위원-방송평가위원장, 서울디지털대 총장 등 역임. 현재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저서 : '한국정당과 정치지도자론' '군부와 권력' '우리시대의 정치와 언론' 외 10여권.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