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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오후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지난 9일 오후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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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은 이렇게 물었다. "진중권의 정의는 무엇인가?" 건국대 법대의 한상희 교수는 이렇게 묻는다. 정의라는 말 앞에 이렇게 소유격을 붙이면, 더 이상 정의는 정의일 수 없다. 네 정의가 다르고, 내 정의가 다르다면, 정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의란 네 편, 내 편을 떠나 공정함을 의미한다. 정의가 눈 가린 여신의 손에 든 천칭으로 상징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교수의 물음은 법학이 아니라 차라리 정치학의 영역에 속한다.

'정의'를 대체한 것은 몇 가지 새로운 가치들이다. 하나는 '의리'. 어떤 이에 따르면 곽노현 교육감을 내치는 이들은 "장세동만도 못하다." 마침내 장세동이 진보의 롤모델이 됐다. 둘째는 '우정'. "친구를 내치는 게 진보라면 그런 진보는 하지 않겠다." 진보는 이제 동창회가 될 모양이다. 셋째는 '인간애'. 이제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강용석 의원을 치라는 김형오는 졸지에 숭고한 휴머니스트가 된다. 넷째는 '용기'란다. 세상에 집단의 분위기에 편승하는 데에 그렇게 많은 용기가 필요한가?

곽노현 사건 초만 해도 진보매체들은 올바른 스탠스를 유지했다. 하지만 '나꼼수'의 선동 방송 한 방에 대중의 분위기가 바뀌자 태도를 180도로 바꾸었다. 더 한심한 것은 진보적 학자들마저 이 분위기에 편승해 곡학아세를 한다는 것. "도덕은 보수에게 줘 버리라"는 윤리적 자살 테제(관련글 보기), "상식에 맞지 않는 진실도 있다"는 논리적 자살 테제(관련글 보기), 심지어 "진중권은 <조선일보>에 세뇌됐다"는 '박헌영 미제간첩 테제'(관련글 보기)까지. 읽지도 않는 신문에 세뇌까지 당한다는 이 심오한 이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근데 <조선일보>는 아직도 나오나?).

한상희 교수의 반론

그 허접함 속에서 그나마 읽어줄 만한 것은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한상희 교수의 글(기사 보기)이다. 거기서 논점으로 삼은 만한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행위의 도덕성에 관한 논란이다. 한상희 교수는 내가 곽 교육감의 사퇴를 말하며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어떤 경우에 그리고 왜 '돈을 줘서는 안 되는' 것인지 그 판단의 기준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미 돈을 건넨 이상 곽 교육감은 마땅히 도덕적 책임을 져야 했다"라는 명제도 공허한 말장난 내지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돈을 건넸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내가 제시한 이유를 미처 못 들어보신 모양이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한상희 교수를 위해 그 이유를 반복해 제시할까 한다. 또 하나는 도덕과 법률의 관계에 관한 문제다. 위의 글에서 한상희 교수는 나의 견해를 이렇게 요약한다.

그(진중권)의 주장은 '법률(혹은 검찰이 말하는 법률 또는 지레짐작되는 가상의 법률)에 위반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로 압축된다.

물론 잘못된 압축이다. 나는 곽 교육감의 유무죄에 대해 판단을 내린 적 없다. 다만 '법률과 도덕은 규제하는 범위가 다르기에, 유무죄의 법률적 판단 이전에 곽 교육감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 미래의 법률적 판단에서 도덕적 판단을 이끌어낸 적은 없다. 법률과 도덕을 동일시하는 것은 외려 곽 교육감을 옹호하는 측이다. 그들이야말로 판결 전까지 사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한상희 교수가 제기한 마지막 논점은 법률('사후매수죄')의 적합성에 관한 문제다. 한 마디로 곽 교육감을 처벌하는 법 자체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한상희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물론 후보자에게 금전이나 어떤 직책을 내 걸며 후보를 사퇴하게 만드는 행위는 선거에서 유권자의 의사를 왜곡할 수도 있기 때문에 법으로 규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검찰의 주장처럼 후보사퇴와 금전·직책의 제공이 서로 시간적으로 연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획일적인 처벌에 나서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인상적인 것은 "후보사퇴와 금전-직책의 제공이 서로 시간적으로 연속되었다"는 표현. 한 마디로 후보사퇴와 금전제공은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으로 그저 시간적으로 연속된 우연한 결합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반박은 잠깐 미루어 두고, 일단 이것이 '선결문제 전제의 오류'임을 지적해 둔다. 이제 세 가지 논점으로 들어가 보자. 어차피 언론도 못 믿고, 검찰도 못 믿고, 법원도 못 믿고, 오직 곽 교육감의 '선의'만 믿겠다니, 곽 교육감도 인정하는 사실에서 출발하기로 하자.

사건의 재구성

사실은 다음과 같다. 지난 교육감 선거과정에서 곽노현 캠프와 박명기 캠프의 두 관계자가 구두로 후보 사퇴의 대가로 선거비를 보전해주기로 약속했다. 그 후 박 교수는 사퇴했고, 덕분에 곽 교육감은 근소한 차이로 선거에 승리했다. 그 후 박 교수는 약속의 이행을 요구했다. 그 후 강경선 교수를 통해 2억의 돈이 박 교수 측에 전달됐고, 그 과정에서 강 교수는 자신과 박 교수(혹은 동생)의 명의로 작성된 차용증을 주고받았다. 그 차용증은 채권과 채무의 관계를 서로 바꾸어가며 이중으로 작성됐다.

이 사태에 대한 곽 교육감의 생각은 어떤가? '최후진술문'(글 보기)에서 곽 교육감은 단일화 과정에 있었던 약속을 이렇게 규정한다. "동서지간인 실무자들 사이의 약속 같지 않은 구두약속", "위임한 적도, 보고 받은 적도, 승인한 적도 없는 동서지간의 독단적인 충정에 입각한 해프닝", "권한 없는 사람들의 비진의 의사표시의 편의적 결합." 곽 교육감은 이를 10월 말에야 인지했으며, "자체 조사과정을 통해 인지하고 나서는 법적 도덕적 의무가 없음을 명백히 하고 추인한 적이 없"다.

2억의 돈을 건네준 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강경선 교수의 지혜로운 노력으로 박 교수의 오해와 원망이 풀리고 화해와 일치가 찾아왔을 때, 다시 말해서 박 교수의 자세가 해프닝에 기초한 권리모드에서 형제애에 기초한 구제모드로 바뀌었을 때, 비로소 이 원칙이 충족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그러면서 긴급부조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냥 도와줄 수는 있을지언정("구제모드) 후보사퇴의 대가로는("권리모드") 돈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후에 돈을 건넸다는 얘기다.


한편, '최후진술'에 차용증에 관한 언급은 빠져 있다. 하지만 차용증이 오갔다는 사실은 당시 상황이 이른바 "구제모드"가 아니라 여전히 "권리모드"였음을 함축한다. "구제모드"였다면 돈을 주며 굳이 차용증을 받을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그 차용증은 이중으로 작성됐다. 물론 곽 교육감측에서 차후에 문제의 차용증을 근거로 돈을 되돌려 달라고 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장치다. 이 모든 정황은 곽 교육감의 주관적 믿음과 상관없이 당시의 상황은 여전히 "권리모드"였음을 말해준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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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과 해석

곽 교육감은 얼마 전 다시 한 번 '3무 원칙'을 강조했다. "사퇴 대가를 지시한 바 없고 보고받은 바 없고 추인한 바 없다." 객관적 상황은 어떤가? 먼저 두 캠프의 관계자들 사이에 후보사퇴의 대가로 선거비를 보전해주기로 한 구두약속이 존재했다. 그 약속을 믿고 박 교수는 단일화협상결렬 이틀 만에 사퇴했고, 곽 후보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곽 교수 측은 그 약속을 술자리 만담으로 치부하나, 적어도 박 교수는 ("권리모드"를 취할 정도로) 그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곽 교육감은 그것을 "동서지간의 독단적인 충정에 입각한 해프닝"이라 부르나, 그가 "지시한 바 없고 보고 받은 바 없고 추인한 바도 없다"는 그 약속은 실제로 후보사퇴가 이루어지고 그 후에 권리요구가 따를 만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곽 교육감이 이를 당시에 인지했다는 직접적 증거는 없다. 따라서 곽 교육감의 해명을 믿는다면, 결국 곽 교육감 캠프의 한 관계자가 결과적으로 후보사퇴를 유도하기 위해 곽 교육감의 이름을 팔아 박 교수를 기만한 셈이 된다.

차용증은 어떤가? 그에 대해서도 곽 교육감은 역시 그것의 작성을 "지시한 바 없고 보고 받은 바 없고 추인한 바도 없다"고 할 것이다. '최후진술문'을 보면 곽 교육감이 당시의 상황을 권리모드에서 구제모드로 전환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결국 강 교수가 곽 교육감에게 상황에 대해 거짓말을 한 셈이다. 다시 말해 강 교수가 곽 교육감의 허락도 받지 않고 차용증을 주고받음으로써 사실상 후보단일화에 관련한 거래를 성립시켜 버린 것이다.

곽 교육감이 모르는 사이에 캠프의 관계자에 의해 후보사퇴를 대가로 한 금전 제공의 약속이 이루어졌고, 곽 교육감이 모르는 사이에 그 대가의 지불이 실행되었다. 이것이 존재하는 객관적 상황이고, 남은 것은 이에 대한 곽 교육감의 '주관적 해석'뿐이다. "지시한 바 없고 보고받은 바 없고 추인한 바 없다." 곽 교육감의 선의를 믿는다면, 이제 곽 캠프와 측근의 행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들은 왜 남의 돈을 자기가 약속하고, 왜 남의 돈을 자기가 꿔주었을까?

박탈당한 유권자의 권리

선거비 보전의 구두약속이 있었고, 단일화를 위한 후보사퇴가 있었고, 차용증과 더불어 2억의 돈이 전달됐다. 이로써 거래는 사실상 이루어진 것이다(이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돈을 절대로 줘서는 안 되는 이유다). 다만 정직하지 못한 측근들을 둔 탓에 곽 교육감은 이 중요한 사실들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그 일을 저지른 것은 그의 캠프에 속한 사람이며, 그가 직접 일을 위탁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가 이 모든 사태에 아무런 도의적 책임도 없다고 해야 할까?

박 교수의 사퇴는 곽 후보의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선거비를 보전해주기로 약속이 없었다면, 박명기 교수는 사퇴를 하지 않았을 테고, 선거의 결과 역시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은 그게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라 느낄 게다. 하지만 보수성향이나 중도성향의 유권자들도 그럴까? 그들은 자신들이 귀한 시간을 쪼개서 참여한 투표의 결과가 부당하게 왜곡됐다고 느낄 게다. 한마디로 그들은 권리를 침해당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하나?

곽 교육감이 모르는 사이에 진행된 그 일은 유권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하는 심각한 반칙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곽 교육감의 옹호자들은 이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아예 없어 보인다. 사태가 이러한데도, '나는 몰랐기에 결백하다. 따라서 내가 저야 할 도의적 책임이라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설사 자신은 몰랐다 하더라도, 자기 캠프에서 저지른 일 때문에 정정당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당선됐다면, 당연히 당선을 반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긴급부조'에 대하여

곽 교육감에게 선택의 기회는 있었다. 가령 작년 10월 말 선거비 보전의 약속이 있었음을 인지했을 때, 그는 그 사실을 정직하게 밝혀야 했다. '나 모르게 단일화 과정에서 약속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약속은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박 교수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 하지만 내 캠프의 실수에 대해 책임을 회피할 의사는 없다. 다만 유권자들의 판단을 바라며, 그에 따라 사퇴 여부도 결정하겠다.'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다. 이렇게 솔직하게 밝혔다면, 그는 외려 여론의 지지를 받았을 게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박교수에게 몰래 2억의 돈을 건네는 방법을 택했다. 곽 교육감의 옹호자들은 그게 무슨 숭고한 휴머니즘의 발로나 되는 것처럼 얘기한다. 가령 한상희 교수의 말을 들어 보자.

공직자로서 동료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한 온정주의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냉혈한이 아니어서 부도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곽 교육감이 박 교수를 냉대함으로써 박 교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면 그는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진보가 공사 구별했다가는 졸지에 '냉혈한'으로 몰릴 판이다. 과연 그럴까? 곽 교육감이 정말로 친구를 돕고 싶었다면 선관위에 문의하여 합법적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친구를 돕는 데에 도덕적으로 지극히 의심스러운 방법을 택했고, 위탁을 받은 강경선 교수는 돈을 건네며 이중차용증까지 주고받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는 뇌물사범들의 전형적 수법이다. 왜 그래야 했을까? 이화여대 조기숙 교수(관련글 보기)는 그것을 이렇게 정당화한다.

그가 어떤 사회적 비용을 초래했다 한들 나는 감히 그를 비난하지 못하겠다. 박명기 교수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싶어 했을 그의 배려심, 금품 모금이 엄격하게 제한된 우리의 제도를 고려하면 더 좋은 방법이 나오기 어려웠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돈을 몰래 건넨 것은 친구의 곤궁을 밖으로 알리지 않기 위한 섬세한 배려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논리는 곽 교육감 자신이 반박한다. '최후진술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오해할 만한 해프닝이 없었더라면, 즉, 정말로 조건 없는 단일화가 성사되었다면 (줄임) 보다 일찍 공개적인 방식으로 박 교수에게 긴급부조를 행해서 급한 불을 꺼줬을 겁니다.


친구를 도울 "공개적인 방식"이 존재함은 곽 교육감도 인정한다. 그 역시 특정한 조건("정말로 조건 없는 단일화가 성사되었다면")에서라면 "공개적인 방식으로 박 교수에게 긴급부조"를 행했을 것이라 말한다. 한마디로 그가 비밀리에 돈을 건넨 것은, 단일화에 "조건"이 달렸기 때문이다. 이 경우 '주관적으로' 선의를 주장하더라도 '객관적으로는' 단일화를 위한 거래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그는 친구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세간을 의식해서 비밀리에 돈을 건넸다. 잘한 선택일까?

'무죄추정의 원칙'

최대한 호의적 해석을 통해 곽 교육감의 '선의'를 그대로 믿어주자. 그때조차도 그의 캠프와 그의 측근이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점,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유권자의 권리가 침해당했다는 점, 이른바 '긴급구제'에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곽 교육감은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하지만 곽 교육감 측은 사안을 정치 문제화하는 가운데 도의적 책임의 문제를 법률적 유무죄로 환원시켜 버렸다. 이 환원을 통해 사라진 것은 윤리적 책임의 영역이다.

앞에서 한상희 교수는 나의 주장을 "'법률에 위반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로 압축"했다. 물론 이는 내 주장의 왜곡이다. 하지만 그 왜곡의 바탕에는 곽 교육감 옹호론자들의 뒤틀린 논리가 그대로 깔려 있다. 가령 한상희 교수의 말을 뒤집어 보자. 그럼 '법률에 위반되지 않는 한 도덕적으로 책임질 일이 없다'는 명제가 얻어진다. 그것이 바로 곽 교육감을 옹호하는 측의 논리다. 그들이 '유죄판결 전까지 절대로 사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판결 이전에 윤리적 문제제기를 틀어막는 데에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된 것이 이른바 '무죄추정의 원칙'. 원래 이 원칙은 '기소 전까지 곽 교육감의 피의사실을 흘리지 않는 것'이나, '곽 교육감의 보석이 허용될 경우 당연히 그가 직무에 복귀하도록 보장하는 것' 따위를 의미한다. 하지만 곽 교육감의 옹호자들은 이를 '판결 전까지는 어떤 도덕적 비판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왜곡했다. 판사만이 사회적 사건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내릴 자격이 있단 말인가? 이 역시 도덕을 법으로 환원시킨 데서 비롯된 궤변이다.

이와 연관된 또 하나의 궤변이 있다. '사퇴는 판결이 내려진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이 역시 문법적 오류다.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사퇴'다. 유죄판결이 내려지면, 곽 교육감은 자동적으로 면직되기 때문이다. 유죄판결을 받고 나서야 '아, 이제 사퇴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인가? 대부분의 경우 법은 도덕의 극단적 경우만을 규제한다. 법이 규제하는 그 좁은 영역 밖으로 넓디넓은 윤리의 영역이 존재한다. 자칭 '진보'라는 이들이 내다버린 것은 그 넓은 영역에서 책임의 윤리적 주체가 되려는 자세다.

진중권 교수
 진중권 교수
ⓒ 최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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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실증주의자?

한상희 교수의 마지막 논점은, 곽 교육감에게 적용된 법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 확신에 입각하여 그는 나를 "악법도 법이니 지키라"고 우기는 "법 실증주의자"로 규정한다. 한상희 교수의 말을 다시 인용해 보자.

물론 후보자에게 금전이나 어떤 직책을 내걸며 후보를 사퇴하게 만드는 행위는 선거에서 유권자의 의사를 왜곡할 수도 있기 때문에 법으로 규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검찰의 주장처럼 후보사퇴와 금전·직책의 제공이 서로 시간적으로 연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획일적인 처벌에 나서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분명한 것은, 한 교수가 "검찰의 주장"을 잘못 압축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후보사퇴와 금전-직책의 제공이 "시간적으로 연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기소한 게 아니다. 그들은 두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를 주장하고 있다. 정말 현행법이 "그저 시간적으로 연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선의를 처벌할까? 만약 그렇다면, 대가성 여부에 관한 다툼은 애초에 벌일 필요가 없을 게다. 두 사건이 시간적으로 연속되어 있음을 누가 부정하는가? 결국 한 교수의 말이 맞는다면, 곽 교육감은 재판 기다릴 것 없이 이미 유죄일 것이다.

한상희 교수의 논리를 재구성해 보자. '① 후보사퇴와 금품제공 사이에는 시간적 연속만 존재할 뿐이다. ② 그런데도 법률은 곽 교육감을 처벌하려 한다. ③ 그렇다면 법률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④ 잘못된 법률로 곽 교육감을 단죄하는 진중권은 법 실증주의자다.' 이 논증에서 대체 뭐가 잘못됐을까? 당연히 ①이다. 즉 한상희 교수는 곽 교육감의 "선의"를 너무 굳게 믿은 나머지, 입증되어야 할 명제를 미리 전제한 채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그래서 앞에서 '선결문제 전제의 오류'라 했던 것이다).

앞으로 법정에서 두 사건의 관계가 그저 "시간적 연속"으로 드러날 경우 (즉 두 사건 사이에 인과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날 경우), 곽 교육감은 무죄판결을 받을 게다. 이는 법률 자체에는 문제가 없음을 말해 준다. 그 법이 어디 사형제나, 양심적 병역거부나, 국가보안법처럼 인권을 침해하는 악법이던가? 아마도 그는 '후보단일화를 쉽게 하도록 선거비 정도는 보전해주도록 법을 고쳐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단일화는 보수도 하고, 진보도 하는 것. 단일화를 쉽게 하는 게 왜 공익에 부합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한 교수는 '친구를 도와주려는 선의마저도 처벌하는 법은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곽 교육감이 가진 지극히 특수한 개인적 교우관계를 배려하기 위해 법 자체를 바꿀 수는 없잖은가. 게다가 정말 법 자체가 문제라고 보았다면, 돈을 건네기 전에 '정말로 선의에서 친구를 돕고 싶은데 현행법에 저촉된다'며, 사전에 그 문제를 공론화 했어야 한다. 일단 돈부터 건네고 나중에 걸리고 나서 '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따지는 것처럼 우스운 일이 또 있을까?

'선의를 처벌하는 법은 나쁘다'는 주장에는 어떤 판단이 깔려 있다. 즉 이미 단일화에 조건이 붙은 이상 곽 교육감이 박 교수를 도울 합법적 방법은 없었다는 판단. 그래서 그는 '고로 법이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으로 비약한 걸 게다. 하지만 그 말을 뒤집으면, 당시 상황에서 곽 교육감은 자신의 주관적 선의가 객관적 범법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돈도 몰래 건넨 게 아니겠는가? 게다가 진보진영의 대표로서 공사의 구별도 제대로 못 한 것도 결코 잘한 일이라 할 수 없다.

세 번의 기회

판결은 법원이 내릴 것이다. 벌써 시효가 쟁점이 되는 모양이다. 곽 교육감은 옥중 메모에서 "시효가 지난 후에"라는 표현을 썼고, 그의 변호인들 역시 사건의 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한다. 시효가 지났다면 기소 자체가 기각될 것이다. 반면, 아직 시효가 지나지 않은 것이라면, 단일화를 위한 약속이나 이중차용증의 존재를 곽 교육감이 인지하고 있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될 것이다. 하지만 법률적 판단은 법원의 일이고, 도덕적 판단은 사회의 몫이다. 후자를 전자에 맡겨 놓을 필요는 없다.

곽 교육감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첫째는 단일화에 조건이 있었음을 인지했을 때. 그때 그는 사실을 털어놨어야 한다. 둘째는 박 교수에게 돈을 건넬 때. 그 돈은 절대로 줘서는 안 됐다. 단일화에 조건이 붙어 있고, 그 사실을 인지한 이상,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 돈은 객관적으로 대가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판사보고 궁예처럼 관심법을 하란 말인가?). 셋째는 사건이 세간에 알려졌을 때. 그때 그는 사퇴했어야 한다. 그래야 윤리적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판결 후에는 그저 법률적 처분의 '대상'일 뿐이다.
 
이는 미래를 위한 약속의 문제다. 당신이 곽 교육감의 참모라면, 앞으로 이와 같은 일, 혹은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도덕성을 시험하는 계기마다 곽 교육감에게 '정도를 걸으라'고 권고하는 것. 다른 하나는 이번에 곽 교육감과 그의 캠프에서 했던 것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 어느 쪽이 옳은가? 과거를 판단하는 것은 그것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약속을 하는 것이다. 과연 진보의 길은 무엇인가?

윤리에서 선동으로

혹자는 검찰을 탓한다. 우리는 검찰의 피의사실 유포를 비판할 수 있고, 이번 수사의 정치적 배경을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검찰의 잘못에서 논리적으로 곽 교육감의 결백이 추론되는 것은 아니다. 둘은 논리적으로 독립된 사안이다. 그러므로 검찰을 비판하기 위해 곽 교육감의 행위를 정당화해줄 필요는 없다. 미국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고 들었다. "Two wrongs doesn't make a right(두 개의 잘못된 것이 하나의 올바른 것을 만들지는 못한다)." 검찰의 잘못은 잘못대로 따지면 될 일. 곽 교육감의 잘못까지 덮어줄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대중들이 양자를 혼동하는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한명숙 전 총리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이 혼동을 바로 잡아야 하나, 그 일을 해야 할 지식인들이 외려 그 혼동을 부추기고 있다. 가령 이화여대 조기숙 교수의 말을 들어 보자.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한명숙 전 총리, 정연주 전 <한국방송>(KBS) 사장에게 가해진 검찰의 편파수사, 기획수사, 그리고 우리가 치른 희생으로부터 배운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이 주장은 '곽 교육감 사건의 성격이 노 전 대통령이나 한 전 총리의 사건과 동일하다'는 부당전제 위에 서 있다. 실제로 그런가? 앞으로 곽노현 교육감이 유죄판결을 받으면, 그때는 뭐라고 할 건가? 노 대통령도 살아계셨다면 곽 교육감처럼 유죄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아무리 정치적 선전선동이 급하다 해도, 돌아가신 분 모셔다가 주책없이 아무 맥락에나 마구 집어넣으면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그분을 욕되게 하는 짓이다.

정치인들이 하는 짓과 뭐가 다른가? 정치인들은 자신의 비리가 들통 나면, 일단은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그것이 '권력의 탄압'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그들이 이렇게 윤리적, 법률적 사안을 툭하면 정치 문제화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정치에는 늘 두 개의 파당이 있어, 그렇게 하면 인구의 절반이 제 편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속으로 그의 유죄를 믿는 이들까지도 정치적 담론의 장에서는 그가 가련한 권력의 희생양라고 우겨준다. 진보가 이런 것까지 닮아야 하나?

평소에 황우석, 심형래에 이어 그런 사태가 한 번쯤 더 일어날 거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그 일이 '진보진영'에서 반복될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다. 어차피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면, '논'객이 할 일은 없는 셈. 진보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요구가 "개 풀 뜯어먹는 소리"(정희준)가 되는 곳에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선동은 몇 마디로 되지만, 그것을 논박하는 데에는 몇 페이지가 필요하다. 이 긴 글의 스크롤 압박을 인내할 대중이 얼마나 될까? 친애하는 대중이 선동가를 원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

다만, 아무리 비루하고 허접해도 내 영혼은 최소한 그런 짓에 동참하지 않을 정도만큼은 고결하다.


태그:#곽노현 , #한상희 , #무죄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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