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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포 김상순씨가 이주민의료센터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있다. 김씨는 염증치료를 받은 뒤에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중국동포 김상순씨가 이주민의료센터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있다. 김씨는 염증치료를 받은 뒤에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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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살려주세요. 은공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주민의료센터(구 이주노동자전용의원)에 찾아온 김상순(49·중국 길림성 연길시)씨가 간절하게 호소했다. 체구는 건장했지만 눈빛은 처량했다. 김씨는 버거씨병에 걸렸다고 했다. 발은 퉁퉁 붓고 썩어 갔지만 수술비가 없어 병원에도 가지 못했다. 부자들은 해외여행과 명품 쇼핑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지만 가난한 인민들은 병고(病苦)의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도 별 도리가 없다. 인민해방을 외친 사회주의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오늘이다.

김씨는 2004년 10월 아들(당시 15세)과 함께 산에 올랐다고 했다. 아들에게 아버지의 몸을 묶어달라고 부탁했고, 아들은 울면서 아버지를 나무에 묶었다고 했다. 김씨는 독한 술 4병을 마신 뒤에 나무 켜는 톱으로 괴사한 발을 스스로 절단했다고 했다. 핏물이 튀고 살점과 뼈가 찢겨지는 아비규환의 시간이었지만 발가락 절단 이후 괴사 증세는 일단 멈췄다고 했다.

그런데 도졌다. 게다가 우환까지 겹쳤다. 한국에 돈 벌러 간 누님(55)이 치료비용을 대주었는데 그 누님이 자궁암에 걸린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누님 친구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남매의 딱한 사정을 지켜보던 누님 친구가 김씨를 한국으로 초청했는데, 그 이유는 "한국 가리봉에 가면 동포들을(이주민) 살려주는 병원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 때문이다.

이주민의료센터에는 하루에도 수백 명의 환자들이 찾아온다. 특히 일요일이면 500~600명의 환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다. 대다수 환자들은 무료진료를 받고 돌아가지만 김씨처럼 갈 곳 없는 환자들도 종종 찾아온다. 벼랑 끝에 매달린 이들에게 이 병원은 생의 마지막 희망이다. 폐암 말기 환자인 김병록(54·중국 산동성 위해시)씨는 시커멓게 타버린 얼굴로 찾아왔다. 남편을 데리고 온 부인 박영화(50)씨의 얼굴도 사색이었다.

김씨는 2000년 초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 왔다. 열심히 일했지만 임금이 체불됐다. 그리고 돈도 받지 못한 채 강제추방됐다. 출입국 블랙리스트에 올랐기에 정상적으론 한국에 갈 수 없게 된 김씨. 자신은 물론 가족의 목숨까지 사채업자들이 쥐고 있었기에 한국행을 다시 택해야 했다. 브로커를 통해 밀입국했지만 또 다시 임금체불을 당했다. 짓밟힌 '코리안드림', 분노와 원한의 땅에서 치를 떨던 그는 결국 병마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주민의료센터를 지키는 힘은?

서울 구로구 가리봉엔 '기적의 병원'이 있다.
 서울 구로구 가리봉엔 '기적의 병원'이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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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동안 폐업한 의원급 의료기관은 1559곳, 병원급 의료기관까지 합치면 2000곳이 넘는다. 동네 병의원들이 문 닫더라도 동네 환자들은 불편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동네 환자들도 대형병원을 선호하기 때문에 이들 병의원의 폐업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 닫으면 절대 안 되는 동네 의료기관이 있다. 이주민의료센터다. 병원 운영은 수입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주민의료센터는 환자들에게서 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무료의료기관이다. 경영에 사활을 건 병의원들도 문 닫는 판국인데 무료진료에 사활을 건 의료기관이 문 닫지 않은 건 놀라운 일이다. 그것도 2~3년 운영하고 만 게 아니라 7년째 문을 활짝 열고서 환자들을 맞고 있으니 말이다.

서울 구로구 가리봉에 있는 이주민의료센터는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족, 가난한 외국인들을 위한 전용 의료기관이다. 국내 환자들은 받지 않는다. 이 병원의 가장 큰 특징은 돈 없는 이주민 환자를 내쫓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에 사는 가난한 환자들마저 찾아오고 있다.

2004년 설립된 이주민의료센터는 지난 7년 동안 자금난에 의한 폐쇄위기를 반복해 왔다. 매년 10억 원의 운영비가 필요한데 환자에게선 돈 나올 곳이 없고 정부 도움을 받는 것도 아니니 운영난은 당연했다. 그런데 7년째 무료진료를 하고 있다니. 그 힘은 어디서 나올까?

이주민의료센터를 설립한 김해성(51) 목사는 3명의 상근의사를 비롯해 방사선기사와 물리치료사, 간호사 등 모두 20여 명의 직원에게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 이주민들의 생명을 살리자는 소중한 취지로 병원을 세웠지만 임금이 체불되면 김 목사도 노동청에 불려가야 한다. 그런데 개원 이후 7년 동안 한 번도 소환된 적이 없다.

이주민의료센터를 지키는 힘은 후원자에게서 나온다. 그 후원의 줄기는 세 갈래인데 하나는 대우증권, 외환은행, 수출입은행, 한국증권금융, 아산재단, 이원의료재단, 하나제약 등과 같은 기업-기관의 '든든한 힘'이고, 둘째로는 생활비와 용돈을 아껴 모아서 돕는 '개미의 힘'이며, 마지막 셋째로는 이름도 빛도 없는 '익명의 힘'이다.

익명 천사 '여호와이레'를 아십니까?

이주민의료센터의 휴일 접수 표정. 휴일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려온다.
 이주민의료센터의 휴일 접수 표정. 휴일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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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이레'라는 익명의 후원자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년 동안 모두 2억 원을 후원했다. 그는 '여호와이레'라는 별칭으로 통장 계좌에 입금했을 뿐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기부금 영수증을 제출하면 연말정산에서 소득공제 등의 혜택이 있지만 그는 이를 떼어간 적이 없다. 김 목사도 후원 담당자도 누구도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여호와이레'가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는 뜻에서 볼 때 기독교인으로 추측할 뿐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 모르게 한 기부자는 또 있다. '샬롬'이란 별칭의 익명 기부자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매년 수백만 원을 후원하고 있고, '오병이어'는 수십만 원을 꾸준히 후원하고, '헌금드립니다'와 '몽당연필' 등은 100만 원과 10만 원을 각각 익명으로 기부했다.

스리랑카에서 온 이주여성 안젤라(37)는 감사편지를 썼다. 이주민의료센터 7주년 행사에서 이 편지를 낭독할 예정인데 아래는 내용 일부다.

"이주민들은 한국에서 슬픈 일을 많이 겪었지만 그래도 기쁜 일은 천사 같은 후원자님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와 상관없는 이주민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고귀한 사랑을 나눠주신 천사님들을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우리나라에 돌아가면 한국엔 천사가 살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한국은 이제 좋은 나라이고 존경하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이주민의 생명을 살려주는 무료병원이 있기 때문이고, 그 병원을 도와주는 후원자님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원자님과 여호와이레님!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아서 고맙고 죄송하지만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후원자님들의 도움으로 많은 이주민들이 생명을 건졌고, 그 덕분에 고향에 무사히 돌아가 부모형제들과 행복하게 살게 됐고, 행복한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꼭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한편 이주민의료센터는 6일 오후 4시부터 서울 구로구 가리봉에 있는 '한국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5층 강당에서 7주년 기념식을 연다. 이날 기념식에선 익명의 기부자인 '여호와이레'에게 특별감사패를 증정할 예정이고, 주인 없는 감사패를 이주민의료센터에 부착해 뜻을 기리게 된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7년째 이어지고 있는 기적

자원봉사자가 중국동포 환자의 혈압을 체크하고 있다.
 자원봉사자가 중국동포 환자의 혈압을 체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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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사도, 사업가도 아니고, 대형교회 목사도 아닙니다. 능력도 돈도 없는 제가 병원과 학교, 이주민 쉼터와 상담기관 등을 세우고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후원자들의 참여 덕분입니다."


20년째 이주민 돕는 일을 하고 있는 김해성 목사는 한국의 역동적인 기부문화가 27만 명의 이주민 환자들을 살렸다고 밝혔다. 이주민의료센터는 2011년 9월 말 현재 중국, 몽골, 스리랑카, 베트남, 필리핀, 파키스탄, 이집트, 나이지리아 등 30개국 환자 27만334명을 무료 진료했다.

김 목사는 이주민의료센터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했다. 김 목사는 "이 병원의 진정한 주인은 후원에 참여한 기업체와 기관, 개미 후원자, 익명 후원자"라면서 "7년째 이어지고 있는 후원이 힘이 낯선 나라에서 어려움을 처한 이주민들에게 희망을 나누어주고 있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외국인 환자의 검사 모습
 외국인 환자의 검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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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설립 당시에는 주변 분들이 '뜻은 좋지만 무모한 시도'라며 만류했습니다. 병원이 설립되자 '6개월 안에 문 닫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측이 빗나가자 '얼마나 더 버티나 보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입을 모아서 '가리봉의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국내 3D 업종의 인력난 해소를 위해 1991년 산업연수생이 들어오면서 시작된 이주노동의 세월이 20년이나 흘렀다.

세월만 흐르게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의 피눈물이 흐르고 흘러서 강물이 되었다. 특히 의료선진국 한국에서 병들어 죽은 이주노동자들이 수천 명쯤은 충분히 된다. 돈을 번 이주노동자에게 한국은 '코리안드림'의 땅이지만 꿈이 짓밟힌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겐 원한의 땅이다.

예수는 나사렛 출신이다. 나사렛은 누추한 벽촌이다. 유대인들은 천한 목수인데다가 가난한 동네 출신인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여기지 않았다. 구세주가 되려면 적어도 예루살렘 출신에다 상류층이고 학식이 많아야 한다고 유대인들은 믿고 있다. 가리봉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살던 동네였고 지금은 이주민들이 밀집한 동네다. 나사렛처럼 누추한 동네, 서울의 변두리인 가리봉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그 기적의 주인공은 후원자들이다.

그 기적은 그대로 두었으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을 이주민들을 살려낸 것이다. 돈 없으면 쫓겨나는 의료시장에서 무료병원이 운영되고 있다는 게 기적이다. 영리에 사활을 건 병의원들도 문을 닫는 판국에 무료병원이 7년째 문을 활짝 열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기적이다. 그래서 이주민들의 피눈물을 멈추게 하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은 기적이고 기쁨이다.

가리봉의 기적은 계속 되어야 한다.


태그:#이주민, #가리봉, #김해성목사, #무료병원, #후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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