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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대로의 결과라 전혀 놀랍지 않다!"

고교선택제에 따른 서울시내 학군 내 학교간 성적 격차가 크게는 7배까지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대다수 교사들의 반응이다. 이태 전 교육의 만족도와 질을 높이겠다며 도입된 고교선택제가 취지와는 달리 심각한 부작용만 남긴 채 폐지 수순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공교육의 근간을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번 결과는 공고화된 학벌구조를 허물어 뜨리기 전에는 백약이 무효라는 우리 교육의 현실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사례라 할 만하다. 반대 목소리에 아예 귀를 틀어막은 불통 정부의 '정책 실험'은 늘 그렇듯 애꿎게 아이들에게 큰 생채기를 입힌 채 끝나가고 있다. 노는 학교, '날라리' 학교, '똥통' 학교라고 낙인찍힌 곳에 다니는 아이들의 마음을 정녕 그들은 알까.

'똥통' 학교로 불리는 곳에 근무하는 후배 녀석과 오전에 우연히 전화 통화를 하게 됐다. 전화를 건 용무는 다 젖혀놓고 다짜고짜 소식 들었냐며 고교선택제를 성토하고 나섰다. 수십 분 동안 하소연 들어주느라 전화기가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서울이라고 다 같은 서울이 아니에요. 워낙 문제아들이 많아 수업보다 생활지도가 급선무이긴 하지만, 정부가 그들을 어르고 달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는커녕 아예 '확인 사살'하는 식이잖아요. 그렇잖아도 자존감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정부가 나서서 '꼴통'이라고 꾸짖는 꼴이에요.

나름 공부 깨나 하는 아이들조차 뭐라는지 아세요? 이렇게 된 바에야, 매일 입고 다니는 교복이 자색과 비색, 청색, 황색으로 철저하게 구분됐던 과거 신라시대 골품제도 복장과 뭐가 다르냐며 씁쓸하게 웃어요. 교복을 입으면 애교심이 생긴다는 말, 그런 헛소리, 개나 주라고 하더군요."

좋은 학교로의 전학만 꿈꾸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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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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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공립학교인데도 지역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란다. 좋은 학교와 나쁜 학교의 차이가 부모의 소득 수준 등 사회경제적 배경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교사들조차 단지 어느 학교에 근무하느냐에 따라 학부모들에게 A급과 B급으로 나뉘어 평가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똥통학교는 교사들 사이에서도 기피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발령을 받게 돼도 아이들을 만나기도 전에 지쳐 버리기 일쑤다. 고교선택제 시행 전까지만 해도 교사의 체벌 등 별도 간섭 없이도 수업이 그런대로 진행됐다고 한다.

공부하려는 아이들과 엎드려 조는 아이들이 뒤섞여 있다 보니 서로 눈치 보며 조심하기도 하고, 드물게는 깨우고 격려해가며 공부를 도와주려는 친구들도 있었다. 가끔 학교신문이나 아침 방송 시간에 '미담 사례'로 소개되며 아이들의 박수를 받는 광경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지금은 '과거완료형'이 돼 버렸다. 가난하고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 주로 몰려 있다 보니 교실은 시나브로 '여관'이 돼 간다.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조차 늘 좋은 학교로의 전학만 꿈꾸며 학급 친구들을 소 닭 보 듯한다. 후배는 잘라 말했다. 고교선택제가 남긴 유산은 딱 두 개, 학교와 학생에 대한 '낙인' 효과와 '불량 학생' 지도를 위한 체벌에 대한 강렬한 유혹.

교문 앞 체벌 모습(자료사진).
 교문 앞 체벌 모습(자료사진).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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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반'이라는 낙인을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

그렇다면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이른바 좋은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는 고교선택제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 후배의 말에 따르면, 교사들마다 그저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이 따른다고 답할 뿐 긍정적 효과보다 부작용이 훨씬 크다는 데엔 모두가 동의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학교에서 시행 중인 수준별 수업을 들여다보라고 충고했다. 고교선택제의 '스몰 버전'이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교육의 수월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며 도입한 수준별 수업이 껍데기만 남은 채 휘청거리고 있다. 학교 내에서 성적에 따라 순서를 매긴 다음 반을 따로 편성해 그 수준에 맞게 수업을 진행시킨다는 방안이었다. 물론, 수업만 따로 할 뿐 평가 방식이 동일하고, 심지어 수업 교재조차 같은 게 현실이다.

과목별 상위권 학생들이 모인 반에서는 딴청 피우거나 조는 아이 한 명 없을 정도로 수업 분위기가 좋아 교사로서 '가르칠 맛' 난다지만, 맨 하위권 반은 조는 애들 깨우다가 한 시간 다 간다고 하소연한다. 정부에서는 그들의 낮은 수준에 맞는 수업 방식을 개발하라고 강조하지만, '꼴찌 반'이라는 낙인을 안고 사는 아이들에게 그것들이 무슨 소용일까.

아직도 정부는 '열심히 공부해서 상급반에 올라갈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교사들의 충고와 격려가 그들에게 먹혀들 것으로 믿는 것 같다. 실제로 수준별 수업 결과를 살펴보면 반별 이동이 기대한 만큼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하위권 반 40명 중에 1년 내에 과목별로 '탈반'하는 경우는 채 10명이 안 된다. 한 번 꼴찌는 영원한 꼴찌인 셈이다.

더욱이 수준별 수업은 모둠별 토론 학습이나 협동 학습 등 새로운 수업 방식 도입도 방해한다. 대놓고 공부를 거부하는 하위권 반은 말할 것도 없고, 하위권 반으로 내려가는 걸 '치욕'으로 느끼는 상위권 반 아이들은 그런 수업 방식들은 점수 올리기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가장 손쉬운 문제 풀이 수업이 대세다.

실패로 끝난 '정책 실험', 이쯤에서 거둬들여야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사들도 하위권 반 수업하는 걸 꺼려 한다. 그래서 대개는 학기별로 로테이션(순환근무)하는데, 갓 부임한 교사들에게 젊다는 이유로 하위권 반을 떠맡기는 학교도 더러 있다. 하위권 반의 수업의 질이 낮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상위권 아이들의 좋은 학습 환경을 위해 하위권 아이들의 양보를 강요하는 것이라며, 교사들은 수준별 수업이 아닌 '격리 수업'이라고 자조한다.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을 두고, 체벌 없이 수업이 불가능하다며 하소연하는 것도 하위권 반을 수업하고 생활지도하는 교사들의 입에서 주로 나온다. 말하자면, 매를 못 들게 하면 공부를 포기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뭘 하든 방치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푸념도 '격리 수업'에 기인한 탓이 크다.

고교선택제 시행 2년. 손가락질 받으며 똥통학교에 들어와 다시 수준별 수업이라는 이름으로 꼴찌 반에 배정된 아이와 그들의 부모,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심정을 아는가. 그들은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서, 그것도 교육을 통해 좌절을 경험하고 시나브로 열패감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또, 수준별 수업이라는 이름으로 명문학교 내에서조차 똑같은 고통을 겪는 아이들, 부모들, 교사들 역시 적지 않다. 상위권 학생들이 몰린 학교는 필연적으로 경쟁 위주의 입시 교육이 강화될 것이고, 성적에 따른 서열화는 당연한 수순일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로 끝난 '정책 실험', 이쯤에서 거둬들이고 새로운 방안을 시급히 고민할 때다. 기성세대는 그렇다 치고, 더 이상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 좌절감과 열패감이 어린 그들의 가슴에 쌓이고 쌓이다 보면 우리 사회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증오로 돌변할지도 모른다.


태그:#고교선택제, #수준별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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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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