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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크베르게 국립공원의 그림같는 풍경
 녹크베르게 국립공원의 그림같는 풍경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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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이제 줄리앙 알프스의 북쪽 사면을 내려간다. 빌라흐와 슈피탈을 지나자 해발 2440m의 로젠록크산을 끼고 있는 녹크베르게 국립공원이 나타난다. 이곳의 아이젠트라텐 로젠베르거 휴게소에서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한다. 산이 높고 공기가 맑은 전형적인 산간지역이어서 그런지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곳은 구르크탈 알프스와 연결되어 있다.

휴게소에서 사람들은 감자와 소시지, 슈니첼 등 오스트리아 음식을 먹는다. 언어뿐 아니라 음식도 독일적이다. 이곳에서 잘츠부르크까지는 계속해서 산악지대가 이어진다. 먼저 구르크탈 알프스가 나타나고 곧 이어 타우어른 산악지대가 나타난다. 타우어른에서 가장 높은 산은 그로쓰글록크너(Groβglockner: 큰 종치기)로 해발이 3798m나 된다. 이 지역에는 길이가 6546m에 달하는 타우어른 터널이 있다.

터널을 나오자 날이 흐리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1시간쯤 가자 잘츠부르크 시내가 나온다. 그리고 잘차흐강 남쪽 강변의 헬브룬 거리에 이르자 산 위에 호엔잘츠부르크 성과 그 아래 대성당이 보인다. 우리는 구시가지에 저녁이 예약되어 있다. 도착해 보니 중국음식점이다. 보통 점심으로 중국음식을 먹었는데 이번에는 저녁에 중국음식이다.     

저녁식사에서의 사소한 해프닝

호엔잘츠부르크 성과 그 앞의 대성당 돔
 호엔잘츠부르크 성과 그 앞의 대성당 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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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엘 들어가니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단체관광객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몇 안 돼, 음식점에 가면 한국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고 가이드가 말해준다. 우리는 식당 지배인이 안내하는 자리로 가서 앉는다. 그런데 벌써 한 팀이 식사를 하고 있어 공간이 조금 협소하다. 우리 30명이 앉기에는 자리가 조금 부족한 듯하다.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보니 4인 식탁 바깥 통로 쪽에 사람이 앉아야 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두 명이 좁게 앉은 것이 좀 마음에 걸렸는지, 함께 여행하던 우리 일행 중 한 분이 자리를 따로 하나 마련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우리 홀에 자리는 없지만 옆 홀에는 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이드가 변명을 하며 그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마음이 상한 그 분이 식사를 하지 못한다. 사실 우리가 음식점을 다니면서 만족스런 대접을 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음식의 질이나 수준도 그랬고, 음식점의 시설이나 서비스도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참다 참다 여행의 막바지에 이처럼 조금은 강하게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미라벨 정원 옆의 삼위일체교회
 미라벨 정원 옆의 삼위일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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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가이드가 그 정도는 수용을 했어야 하는데, 그걸 슬기롭게 처리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 분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밖으로 나간다. 우리는 잠깐 나갔다 오겠지 하면서 밥을 먹는다. 부인도 조금 걱정을 하면서 우리와 함께 식사를 마친다. 이제 숙소로 갈 시간이다. 버스가 식당 근처에 있기 때문에 모두 차로 간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비 때문에 기온도 상당히 내려갔다. 추위를 조금은 느낄 정도다.

차에 올라 인원을 점검하는데 한 명이 부족하다. 저녁을 먹지 않고 밖으로 나간 그 사람이다. 산책을 하거나 잠깐 구시가지를 둘러보겠지 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우리는 잠시 기다린다. 그래도 그가 나타나지 않자 부인과 가이드가 찾으러 나간다. 한 10분쯤 후 세 사람이 들어온다. 여행사의 서비스가 불만스러워 다른 곳에 가서 식사를 했다고 그가 말한다. '왜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거냐'며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보면 관광객과 가이드는 항상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다. 특히 가이드가 베테랑일 경우 그러한 일이 더 자주 발생한다. 이번 해프닝도 가이드의 강한 자존심 때문에 발생한 측면이 있다. 가이드가 관광객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는 건 사실이지만, 안 된다는 가정 하에 일을 처리하는 것은 편견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여행기간 그의 지나친 제제와 잔소리에 나도 조금은 마음 상한 측면이 있다.  

밤에 찾아간 잘츠부르크 구시가지

호텔 앞의 농장들
 호텔 앞의 농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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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마음을 좀 누그러뜨리고 시내에서 15분쯤 떨어진 슈포르트 호텔로 간다. 호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실내외 운동시설이 잘 갖춰진 호텔이다. 실내외 테니스장이 15면이나 있다. 호텔 프런트에서 방을 배정받다가 회원들 사이에서 밤에 잘츠부르크 시내로 나가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 나왔다. 절반 정도의 사람이 호응을 한다. 그래서 8시 30분에 프런트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호텔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25번 버스가 8시 53분에 있기 때문이다.

모두들 약속시간에 나온다. 16명이다. 이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야 한다. 그런데 완전히 시골길이다. 가까운 들판에서 소똥 냄새가 풍겨온다. 주변에 농가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잘츠부르크는 알프스 산맥의 가장자리 해발 424m 정도의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농토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정확하게 버스가 도착하고 20분쯤 후 버스는 우리를 모차르트 광장 주변에 내려준다.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누가 뭐래도 모차르트고, 광장 이름으로까지 사용한 모차르트이다.

모차르트 광장의 모차르트 동상
 모차르트 광장의 모차르트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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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6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차르트는 1781년까지 25년간을 잘츠부르크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6살인 1962년부터 유럽 전역으로 연주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잘츠부르크에 머문 시간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그는 거의 매년 연주여행을 떠났고, 1763년 6월부터 1766년 11월까지 무려 3년이 넘게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길에서 산 음악가였다. 그가 연주여행을 한 주요 도시로는 서쪽의 뮌헨과 파리, 동쪽의 빈, 남쪽의 밀라노와 로마, 북쪽으로 프라하와 베를린이 있다.
 
모차르트는 1781년 요셉 2세의 황제 즉위식 참석차 빈으로 여행했고, 그 후 고향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에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 빈은 유럽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모차르트는 빈에서 고정된 일자리를 찾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프리랜서로 활동하게 된다. 그가 빈 궁정악단에 자리 잡지 못한 것은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프리메이슨 같은 진보적인 단체에 가입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는 <피가로의 결혼><돈 지오반니><마술피리> 같은 대작 오페라를 남기고 1791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다.

대성당과 분수
 대성당과 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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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광장 한 가운데는 모차르트 동상이 서 있다. 동상 뒤로는 잘츠부르크 박물관과 종탑이 보인다. 우리는 건물을 돌아 서쪽의 레지덴츠 광장으로 간다. 광장 서쪽에 있는 레지덴츠 때문에 그런 이름이 생겨났다. 레지덴츠는 주교관으로 주교가 근무하고 살던 집을 말한다. 광장 가운데는 바로크 양식의 분수가 있고, 그 남쪽으로는 바로크 양식의 대성당이 있다.

이처럼 잘츠부르크에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많은 것은 볼프 디트리히(1559-1617) 대주교 때문이다. 그는 성당을 바로크 양식으로 지을 계획을 세웠고, 알프스 북쪽에 바로크 양식의 건축을 전파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의 계획이 결실을 맺어 1628년 건축가 산티노 솔라리에 의해 대성당이 완성되었다. 볼프 디트리히는 또한 잘츠부르크의 신교도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떠날 것을 강요해, 잘츠부르크를 가톨릭의 도시로 만들었다.

레지덴츠 박물관 앞 조각상
 레지덴츠 박물관 앞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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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레지덴츠 광장에서 돔 광장으로 옮겨간다. 1920년 이곳 돔 광장에서 막스 라인하르트의 연출로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연극 <예더만>이 공연되면서 잘츠부르크 축제가 시작되었다. 1924년에는 궁정 마구간이 축제극장으로 개조되었고, 이후 오페라 전용극장으로 활용되었다. 축제 규모가 커지면서 1962년에는 새로운 축제극장을 짓게 되었고,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 기존의 것을 소축제극장으로, 새로 지은 것을 대축제극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소축제극장은 모차르트 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대축제극장과 함께 잘츠부르크 축제의 중심 공연장이 되었다.

축제가 시작된 7월 27일부터 축제가 끝나는 8월 30일까지 이들 공연장에서는 하루도 빼지 않고 연극과 오페라 그리고 음악 공연이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공연으로는 돔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호프만스탈의 연극 <예더만> 공연, 대축제극장의 빈 필하모니커 등 음악 공연, 모차르트 기념관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돈 지오반니> 공연이 있다. 우리는 잠시 축제극장엘 들어가 본다. 이미 공연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모두 나온다.

사실 나는 국내에서 이번 잘츠부르크 축제 7월30일 공연을 예약했었다. 29일까지는 단체 패키지여행을 하고, 30일부터는 아내와 둘이서 우리만의 여행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렌트카를 이용해 단독으로 오스트리아, 체코, 독일을 여행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30일 공연을 예약했던 것이다. 그런데 비행기표를 단체로 끊은 것이어서 연장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여행사로부터 받고 예약을 취소한 바 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하루 전인 29일 것을 예약하는 건데 정말 아쉽다.

모차르트 생가 앞에서 부른 <피가로의 결혼> 한 자락

마굿간임을 알리는 말 동상
 마굿간임을 알리는 말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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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궁정마굿간 거리를 따라 있는 말바위 건물을 지나 곡물 거리(Getreidegasse)로 간다. 이곳은 잘츠부르크의 전형적인 상가 거리로,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거리를 따라가면서 보니 의류점, 생활용품점, 양조장, 여관, 식당, 카페 등이 즐비하다. 그 중에는 한국인 김씨가 운영하는 태권도장도 보인다. 태권도가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까지 진출해 있다. 이를 통해 한국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이 문화와 예술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마침내 이 거리 9번지에 있는 모차르트의 생가에 이르게 되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당시 여러 가정이 살던 이 건물의 방 세 칸짜리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사내자식을 낳아 정말 행복하다고 편지에 적고 있다. 사실 기뻐해도 될 것이 그의 아들 볼프강이 고전주의 최고의 음악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또한 음악사의 중심을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로 옮겨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차르트 기념품
 모차르트 기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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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바로크 음악의 전형적인 형식을 유머라는 기교를 통해 깨뜨렸고, 이탈리아어로만 써야 했던 오페라를 독일어로 써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모차르트는 혁신주의자고 진보주의자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죽은 지 200년이 지난 지금도 대중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로 남아 있다. 밤이라 생가 안으로 들어갈 순 없어 우리는 밖에서만 집을 구경한다. 다락방까지 포함해 6층이며, 3층 위에 모차르트 생가(Geburtshaus)라고 쓰여 있다.

여전히 빗방울이 떨어진다. 우리는 잠시 휴식도 취할 겸 잘츠부르크의 밤 분위기도 느낄 겸 생가 앞의 오일렌슈피겔(Eulenspiegel) 레스토랑으로 간다. 마침 레스토랑 앞 광장에 탁자가 있고, 그 위로 파라솔이 처져 있다. 이곳에서는 모차르트 생가를  바라보며 술을 먹을 수 있다. 우리는 맥주를 한 잔씩 시키고 이야기를 나눈다. 비가 와 조금 쌀쌀하기는 하지만, 밤 분위기와 여행 기분에 들떠 모두들 즐거워한다.

모차르트 생가
 모차르트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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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분당에서 한의원을 하는 최용석 원장이 흥에 겨워 <피가로의 결혼> 1막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피가로의 아리아 "Non piu andrai, farfallone amoroso"를 부른다. 사실 이 아리아의 멜로디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딴따다 딴따다 딴따다다, 딴따다 딴따다 딴따다다"로 표현할 수 있다. 마침 성악을 전공한 분이 있어 모두 그에게 노래를 부탁한다. 그러자 잘 해야 본전이라면서 정중하게 사양을 한다. 우리는 가사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다같이 그 멜로디를 따라 부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잘츠부르크 사람들도 미소로 화답한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지적·예술적 수준이 이제는 세계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잘츠부르크의 밤에 우리는 그렇게 젖어들고 동화되어 간다. 이 아리아의 처음을 우리말로 옮기면, "그곳에서는 은밀한 속삭임이나 달콤한 애무는 잊어라"가 된다. 여기서 그곳은 군대를 말한다. 알마비바 백작이 수잔나의 신방에서 케루비노를 발견하고는 그를 군대에 보내도록 한다. 이때 피가로가 케루비노에게 충고를 하면서 부르는 아리아가 바로 이것이다.

덧붙이는 글 | 발칸 지역 여행은 끝났다. 이제 잘츠부르크와 뮌헨을 거쳐 귀국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잘츠부르크에서 1박2일을 지내며 자연과 문화유산에 대한 다양한 체험을 했다. 그래서 그 내용을 3~4회 더 연재할 예정이다.



태그:#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축제극장, #바로크 양식, #<피가로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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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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