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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 돈 때문에 목숨을 저울질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바로 무상의료다. 영국은 국가가 재정을 조달하고 의료 서비스를 관리하는 대표적인 무상의료의 나라다. 의료 서비스의 질과 재정 문제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60년 넘게 무상의료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의료 불평등과 의료시장 민영화 등 한국사회 의료 문제의 해법을 영국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글 : 박순옥 기자

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영국편' 특별취재팀

 

"이 분은 목이 거의 다 잘린 상태였어요. 4월 말인가, 제가 공주에 회의가 있어서 내려가 있었는데... 그런데 수술할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다고 해서 결국 헬기 타고 올라 왔지요."

 

이국종 아주대 외상외과 교수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지난 6월 초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특별 취재팀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당시 삼호 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영웅으로 대서특필되던 이 교수였지만 자기가 한 일은 '2차 치료'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만큼 오만에서의 1차 치료가 완벽했다는 말이었다.

 

"오만 병원이 허름하다고 한국사람들 무시하지요. 하지만 병실 문 열고 들어가면 최첨단 장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또 중증 외상 시스템은 얼마나 잘 갖춰져 있는지 아십니까? 오만이 바로 영국식 중증 외상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요. 길바닥에서 죽어나가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중증 외상'이란 심각한 다중 손상으로 생명이 위험하거나 불구를 유발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심각한 자동차 사고나 산업재해, 추락으로 인한 뇌 손상이나 장기 파열, 칼이나 총으로 인한 손상 등이 이에 속한다. 많은 사람들이 '남의 일'로 여기는 중증 외상은 의외로 빈번하다. 특히 44세 이하의 젊은 연령에서 사망 원인 1위로 꼽힌다. 전체 연령대에서도 외상은 암과 심혈관 질환에 이어 사망 원인 3위다.

 

44세 이하 사망원인 1위 '외상'... 중증 외상 센터가 필요한 이유

 

 

"심장병이나 암, 뇌출혈에 대한 치료는 많이 개선됐지만 영국에서도 외상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다. 외상은 44세 이하 사망 원인 1위다. 1988년에는 외상 사망자 중 1/3이 불필요한 죽음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이후 외상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지난 12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의 워털루로드에 위치한 런던 앰뷸런스 서비스 센터에서 만난 피오나 무어(Fiona Moore) 외상 담당 국장의 말이다. 무어 국장이 말한 불필요한 죽음은 '예방 가능한 사망률'로, 쉽게 말해 의료진의 처치를 받았다면 살릴 수 있었던 사망자 비율이다.

 

우리나라에선 연간 75만 명이 외상 사고를 당하고 이중 3만 명이 숨진다. 그리고 사망자 3명 중 1명 꼴인 1만 명은 적절히 치료 받았다면 충분히 살릴 수 있는 환자로 평가된다. 우리나라의 예방 가능한 사망률은 35퍼센트(2010년)이다. 이마저도 1998년 50퍼센트, 2004년 40퍼센트에서 나아진 수치다. 이에 반해 미국은 15퍼센트, 일본은 10퍼센트다.

 

런던 외상 시스템의 핵심은 4군데의 거점 병원이다. 로열 런던, 세인트 조지, 세인트 메리, 킹스 칼리지 병원. 일반 응급실에서 처리할 수 없는, 생명이 위급한 중증 외상 환자의 경우 24시간 365일 전문 인력이 대기하고 있는 거점 병원으로 즉시 옮겨진다.

 

"평균 20~25분 정도면 응급차량이 현장에 도착하고 16분 정도면 환자를 병원으로 옮긴다. 45분 정도면 환자가 병원에 도착한다는 건데, 이는 '골든 아워'가 잘 지켜지고 있다는 것이다."(피오나 무어)

 

'골든 아워(Golden Hour)'란 중증 외상 환자의 생명을 좌우하는 시간을 의미하는데, 대략 1시간으로 잡는다. 1시간 안에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런던에서 심각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고 하자. 런던 앰뷸런스 서비스 번호인 '999'로 신고하면 앰뷸런스가 출동한다. 현장에 도착한 응급구조사는 의식이 없거나 두개골이 함몰된 중증 외상의 경우, 다른 병원을 거치지 않고 곧장 가장 가까운 외상 거점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한다(이 또한 엄격한 매뉴얼에 따라 판단한다). 이송하는 중에 환자의 나이, 상태 등이 해당 병원에 전달되므로 의료진은 사전에 준비할 수 있다.

 

이국종 교수는 "외상 환자는 빨리 데려오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에는 그런 환자를 받아줄 수 있는 병원이 없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 외상 센터가 없는 유일한 나라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외상 환자들이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 이 병원 저 병원 떠돌다 결국 길바닥에서 사망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24시간, 365일 중증외상환자 기다리는 의사들, 왜? 

 

로열 런던 병원의 경우 연중 2200건의 외상 환자가 이송되며 그중 600건이 중증 외상 환자다. 카림 브로히(Karim Brohi) 로열 런던 병원 교수는 "로열 런던은 유럽에서 가장 바쁜 외상 거점 병원"이라고 소개했다. 중증 외상 센터에는 24시간 365일, 응급의학 전문의와 혈관전문의 등 전문 의료진이 대기한다. 브로히 교수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일주일에 3~4번 수술실에 들어간다.

 

"모든 병원이 비싼 의료 기구를 갖출 필요는 없다. 로열 런던 병원이라는 거점 병원 밑으로 규모가 작은 약 15개의 병원이 있는데 그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는 응급환자가 거점 병원인 이곳에 이송돼 온다."(카림 브로히 교수)

 

응급실에 도착한 외상 환자는 어떻게 될까. 브로히 교수에 따르면 응급실 도착 후 15~20분에 걸쳐 스캔이나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어떻게 수술을 할지,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이러한 초기 진단은 응급실 리더인 시니어 닥터가 한다. 그 다음 곧바로 수술실로 환자를 옮긴다. 브로히 교수는 흉부나 내부 출혈이 심한 경우를 전담한다.

 

1차 수술은 생명 유지와 직결된 응급수술이 주를 이루며 이후 2차, 3차 수술을 하게 된다. 이후 이들은 중환자실(ICU)로 옮겨져 다른 수술을 기다리거나 집중 치료를 받게 된다. 로열 런던 병원 중환자실에는 44개의 병상이 있고 60~70퍼센트가 외상환자들이다.

 

혈압환자는 5만 불, 외상 환자는 2000불... 왜 안 살리나

 

사실 중증 외상 센터는 병원 입장에선 비효율적일 수 있다. 고가의 장비를 갖춰야 할 뿐만 아니라 외상전문의, 응급의학 전문의 등 전문 인력이 24시간 365일 대기해야 한다. 또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외상환자를 의사가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외상 환자는 입원 일수가 길기 때문에 병상 회전율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병원들이 외상 센터에 미온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런던은 중증 외상 시스템 구축에 열심일까. 브로히 교수의 말에 해답이 있다.

 

"중증 외상 센터를 운영하는 것이 몇 안 되는 응급 환자의 목숨을 건지자고 1년 365일 고 비용의 댓가를 치르는 비효율적인 구조라고 치부하면 오산이다. 환자 1년 수명을 늘리는 데 혈압환자는 5만 불, 신장질환은 10만 불, 유방암은 20만 불이 든다. 하지만 외상 환자는 겨우 2000불이다."

 

그는 중증 외상 환자가 생명을 건지고 사회로 돌아갔을 때 기여하는 바를 생각해 보라고 강조했다. 심장질환자의 평균 나이가 60~70세인데 비해 젊은 층이 많은 외상환자의 특성상 완치 후 사회에 노동력 등을 환원할 수 있다는 것. 그는 "가족이 있는 외상 환자가 사망했다면 남은 가족을 돌보기 위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완치했다면 그 값어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중증 외상으로 인해 한 사람이 사망했을 때 사회가 져야 하는 짐, 남은 가족들의 생계 문제 등이 중증 외상 센터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보험 천국' 미국에서도 하는데... 왜 한국은 못하나

 

 

그렇다면 이 같은 외상 시스템은 정부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국에서만 가능한 걸까. 카림 브로히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말도 안 된다. 미국 같은 '보험 천국'에서도 외상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호주에서는 자동차 보험회사가 외상 센터 재정을 일부 부담하고 있다. 이 문제는 비용 대비 효과 문제로 단순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전체적인 안목을 가지고 시각을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센터를 운영하기는 어렵다. 궁극적으로는 정치인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다."

 

'식코'의 나라 미국. 그 미국에도 1000여 곳에 달하는 외상센터가 있고 외상 전문의만 3000여 명에 이른다. 인구의 82퍼센트가 1시간 이내에 중증 외상 센터에 접근할 수 있다. 중증 외상 센터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갖춰졌다는 평을 받는 메릴랜드주의 경우 예방 가능한 사망률은 5퍼센트에 그친다.

 

또 병원이 환자를 거부해 사망하면 법적인 책임을 묻기 때문에 앰뷸런스에 실려온 환자를 거부할 수 없다. 어마어마한 치료비는 나중 문제다. 생명을 구하는 게 먼저이기 때문이다. 브로히 교수는 "미국에서도 환자 거부는 있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국종 교수 또한 최소한 미국은 죽어가는 사람을 내치진 않는다고 했다.

 

"사람 죽어가는 미국이요? '식코'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환자 안 받아서 사람 죽으면 그 나라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폭동 일어나지.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길바닥에서 죽어나가는데... 왜 이런 건 사회 이슈화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올해 1월 가브리엘 기퍼즈 민주당 하원의원이 괴한에 의해 머리에 총상을 입는 치명상을 입었다. 이후 구급차가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분, 이후 응급실로 이송돼 수술에 들어가기까지는 38분이 걸렸다. 당시 수술을 집도한 피터 리 외상전문의(애리조나 투산대학메디컬센터)는 "기퍼즈 의원이 생명을 건질 확률은 101퍼센트"라고 말했다. 이는 피터 리 박사의 오만도, 외상 환자가 하원의원이라는 'VIP' 특권을 누린 것도 아니었다. 잘 갖춰진 중증 외상 시스템 때문이었다.

 

만약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총상을 입었다면? 그의 생명을 장담할 수 있을까. 참고로 미국의 외상 전문의는 3000여 명이고 우리나라는 3~5명에 불과하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영국편 특별취재팀

:  남소연·박순옥 기자, 송주민 시민기자


태그:#유러피언 드림, #N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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