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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칼 주변 숲은 곳곳에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장소가 마련돼 있다.
▲ 모닥불 바이칼 주변 숲은 곳곳에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장소가 마련돼 있다.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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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의 아침은 7월에 두꺼운 봄 점퍼로 갈아입을 만큼 추웠다. 바이칼 호수가 너무 거칠어 배를 못 탄다고 알렸던 세르게이 원장은 아침을 먹자마자 우리를 데리고 바이칼 주변 숲으로 향했다. 비가 뿌리던 날씨는 조금 개었다.

자리를 잡자마자 얇은 여름이불 같은 매트를 3개 깔고 케이크와 아르메니아산 코냑, 보드카, 와인을 꺼내놓았다. 모두 주변에 둘러앉아 바이칼을 내려다보며 작은 잔에 따라주는 코냑을 오전부터 홀짝거렸다. 커다란 칼을 꺼내 케이크를 자르는 세르게이 원장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자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르메니아 코냑의 맛은 훌륭했고 우리는 한잔씩 마신 후 바이칼을 거닐었다.

요술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처럼 술과 음식이 나오고

 세르게이 원장이 칼을 들고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 피크닉 세르게이 원장이 칼을 들고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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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현지인 방문이 끝나자 다시 차는 바이칼 해변가를 따라 달린다. 차가 선 곳은 바이칼이 내려다 보이는 숲 속 캠핑장이었다. 운전기사와 세르게이 원장은 주변의 나무를 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소시지와 햄을 썰었다.

두 사람은 소시지와 햄을 모닥불에 굽고 나타샤 부원장과 타니아니 가이드는 빵, 과일을 썰고 치즈를 내놓는 등 테이블에 푸짐한 음식을 차렸다. 바이칼에서 두 번째 소풍이다.

세르게이 원장은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 보드카를 꺼냈다. 쉴 새 없이 요술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처럼 술과 음식이 나오는 세르게이 원장 차에 뭐가 더 있는지 궁금해졌다. 매트리스에 각종 나이프, 소시지와 햄을 꿰는 도구, 심지어 나무를 패는 도끼까지 들어있으니 말이다.

  음식을 차리고 있는 세르게이 원장과  나타샤 부원장.
▲ 소풍 음식을 차리고 있는 세르게이 원장과 나타샤 부원장.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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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는 우리 외엔 아무도 없이 한적했고 일행은 음식과 와인을 먹거나 자갈이 깔린 바이칼을 내려다보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바이칼에 내려가 차가운 물에 몸을 적시는 사람도 있었다. 곳곳에 불을 피울 수 있는 장소가 있는 야생 캠핑 공원이었다.

나는 숲으로 들어가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가문비나무와 바이칼의 작디작은 꽃을 달고 있는 야생화를 사진을 찍었다. 오후의 시간은 러시아 숲을 다니며 나무와 숲, 꽃을 바라보는 동안 천천히 흘러갔다. 멀리 알혼 섬이 엷은 하늘빛으로 길게 보였다. 여기서 40km 거리란다.

사예나는 러시아 사람들은 가문비나무 열매를 따서 목욕물에 넣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솔방울 비슷한 가문비 열매를 따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송진향이 퍼지는 가문비 열매는 호주머니에서 끈적끈적한 진을 내뱉었다. 아마도 나는 이 바이칼의 여름, 이 한가하고 아름다운 소풍을 즐겼던 이 순간을 못내 그리워 할 것이다.

몇 시간 동안 바이칼을 내려다보며 누가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나는 홀로 숲과 캠핑장을 오갔고 바이칼을 바라보던 순간순간의 장면만을 기억할 뿐이다. 까르르 웃는 나야와 똑순이, 미소를 보내는 나타샤 부원장과 타니아니 가이드, 예쁜 사예나, 홀로 벤치에 앉아있던 세르게이 원장, 바이칼로 내려가 밀려오는 파도에 기겁을 하고 피하던 사람들의 영상만 남는다.

 두번째 피크닉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햄과 소시지를 구웠다. 앞은 바이칼이다.
▲ 바이칼 두번째 피크닉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햄과 소시지를 구웠다. 앞은 바이칼이다.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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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걷고 차에 다시 올라 투르가 마을을 지날 때 바이칼 항구 건설 현장을 봤다. 얼마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문해 세계뉴스에 올랐을 때, "내가 갔던 곳이구나"하고 비로소 알았다. 여러 번 지나쳤던 투르가 마을이었다. 세르게이와 동행했던 H교수가 세르게이와 나눴던 얘기를 들려줘서 러시아가 이곳을 세계적인 휴양지로 개발 중이란 것도 들었다.

 ☞  관련기사 : 러시아 간 김정일 위원장이 먹은 빵, 먹어봤더니

 자작나무에 어무이를 꿰어 굽고 닭고기 샤슬릭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냄비에는 감자를 삶았다.
▲ 모닥불 자작나무에 어무이를 꿰어 굽고 닭고기 샤슬릭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냄비에는 감자를 삶았다.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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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화려한 피크닉

투르가를 지나 달린 차가 도착 한 곳은 역시 바이칼 해변 근처였다. 차에 내려서 오늘이 세르게이 원장 생일이라는 걸 사예나에게 듣고 알았다.

세르게이 생일 만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안타까워하며 생일케이크라도 사고 싶어 했지만 이곳은 가게도 드문 곳이다. 그루지야인, 러시아인 등이 모닥불을 피우고 어무이(오물)와 닭고기 샤슬리를 구우며 비닐로 바람을 막고 야외 테이블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무의 자연을 살려 만든 벤치와 테이블에 러시아의 감각에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모래밭으로 나가 다리를 걷고 호수 물에 적시거나 의자에 앉아 쉬면서 즐거운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바이칼 주변 캠프장에는 저렇게 자연 곡선을 살린 벤치와 탁자가  곳곳에 놓여있다.
▲ 벤치 바이칼 주변 캠프장에는 저렇게 자연 곡선을 살린 벤치와 탁자가 곳곳에 놓여있다.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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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니 집시 일행과 러시아 가족이 놀러온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한적하고 여유로운 느낌은 마찬가지다. 주변을 산책하다가 양동이를 들고 호수로 물을 뜨러 가는 러시아인을 보았다. 모래밭 근처에 있는 작은 목재 움막을 들여다보니 빈 술병과 테이블이 있다. 파도가 치거나 날이 험하면 이곳에 들어와 피하는 곳인가.

테이블에 상이 차려지고 모두 모였을 때, 윤조덕 수석부회장이 "오늘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할 생일임에도 우리를 위해 시간을 같이 해준 세르게이 원장께 감사드린다"고 건배를 했고 "너무 환대를 받아 (세르게이 원장이)한국에 오면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맛있는 어무이 구이, 닭고기 샤슬리, 찐 감자, 빵, 케이크, 와인, 과일과 야채샐러드 등 음깃들이 야외 테이블에 올랐고 모두 생일을 축하하며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웃음과 즐거움, 숲의 싱그러움과 작은 야생화, 맛있는 음식이 바이칼의 화려한 휴일이다.

  세르게이 원장 생일 파티에 초코파이 생일케이크를 받고 즐거워하는 세르게이 원장. 와인과 샴페인으로 '건배'를 제의했다.
▲ 생일파티 세르게이 원장 생일 파티에 초코파이 생일케이크를 받고 즐거워하는 세르게이 원장. 와인과 샴페인으로 '건배'를 제의했다.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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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을 즐기며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슬쩍 사라진 똑순이가 촛불이 켜진 초코파이 생일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뜻밖의 생일케이크에 놀란 세르게이 원장이 기뻐하며 함박웃음으로 맞이하자, 일제히 박수를 치며 '해피 버스데이'를 불렀다.   

"케이크를 살 수가 있어야지. 궁여지책으로 초코파이를 사고 초를 사서 만들었어." 
"참 잘했다."

똑순이는 바이칼에서 생일케이크를 만들어내는 대단한 여자다. 화려한 휴일을 빨리 끝나지 않겠다는 듯, 저녁 9시가 넘었어도 어두워지지 않았고 생일파티는 계속됐다.

  캠프파이어를 하러 나간 밤 10경, 바이칼에 노을이 지고 있다.
▲ 노을 캠프파이어를 하러 나간 밤 10경, 바이칼에 노을이 지고 있다.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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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해변의 캠프파이어

숙소로 돌아와 펜션 앞에서 차를 세우자마자, 세르게이 원장은 쌓여있던 장작을 집어 차에 싣더니 "해변으로 캠프파이어 하러 간다"고 말했다.

"또! 휴우…."  

거듭된 피크닉에 윤 부회장이 피곤한 듯 가늘게 한숨을 지었다. 첫날 쉰다고 화장실에서 갇혀 캠프를 구경도 못했던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몇 명은 쉬고 나머지는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해변으로 걸어 내려갔다.

밤 10시 즈음, 황금 노을이 물결 위로 깔려 있었다. 바이칼의 일몰은 길고 길다. 저녁 7시 무렵 시작된 황혼은 새벽 1시까지 이어지며 갖가지 색깔로 바뀌며 노을빛의 모든 아름다움을 시시각각 보여준다. 만약, 길고 황홀한 노을이 보고 싶다면 백야의 바이칼로 떠나보라.  

  밤 11시, 바이칼 수평선으로 해가 넘어간 후에도 황금빛 황혼이 사라지지 않았다.
▲ 황혼 밤 11시, 바이칼 수평선으로 해가 넘어간 후에도 황금빛 황혼이 사라지지 않았다.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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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밭에는 모닥불 가에 매트를 깔아놓고 모두 편안하게 기대어 누워 노을 진 호수를 바라보며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세르게이 원장이 틀어놓은 잔잔한 러시아 음악이 울려 퍼졌다.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나라와 사예나, 나타샤 부원장과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세르게이 원장은 또 햄을 굽고 초콜릿, 케이크, 치즈를 꺼내놓았다. 사실 종일 계속된 소풍에서 펼쳐진 음식만 봐도 배가 불러 먹은 것은 별로 없다. 그래도 눈은 즐겁다.

우리밖에 없는 넓은 모래밭에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 노을을 바라보며 간간히 울리는 웃음과 음악, 파도소리를 들었다. 시간이 정지된 듯, 바이칼의 마지막 밤을 나는 꿈결처럼 느끼고 있었다.

서서히 해가 수평선으로 고개를 떨구자 회색 어스름이 밀려들었다. 해가 졌다고 해도 바이칼은 어둡지 않다. 황혼의 남은 여운이 오래오래 바이칼 위에 머물렀다. 천천히 밀려드는 어두움을 보면서 우리는 돌아가면서 러시아, 몽골, 한국 노래를 부르고 와인을 마셨다.

1시가 넘어 어둠이 짙게 덮이자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세르게이 원장과 운전기사는 삽으로 모래를 퍼서 모닥불을 덮었다. 나라와 똑순이, 나는 숙소로 오면서 캠프의 즐거움이 남아 낄낄 웃었다.

"내 평생 하루에 이렇게 많은 소풍 가 본 것은 처음이야. 3년 갈 피크닉 하루에 다 끝낸 거 같아."
"바이칼 너무 좋다, 그지?"

똑순이도 맞장구 쳤다. 숙소로 돌아오자 바이칼의 마지막 밤이 아쉬운 듯, K교수는 2층으로 모이라고 알렸다.

 바이칼의 노을, 모닥불, 음악, 대화가 있던 캠프파이어 밤.
▲ 캠프파이어 바이칼의 노을, 모닥불, 음악, 대화가 있던 캠프파이어 밤.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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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순이가 욕실에 들어갈 때, 아까 땄던 가문비 열매를 건네주며 욕조에 넣으라고 일러주었다. 바이칼의 찬 날씨 때문에 둘 다 감기에 걸렸지만 똑순이가 더 심했다. 똑순이는 아예 겨울 점퍼를 입고 다녔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K교수 방에 L교수, J교수, 똑순이와 내가 차례로 모이자 쉬고 있던 윤조덕 수석부회장이 박순일 부회장과 남은 소주를 갖고 합석했다.

"우린 바이칼에서 모닥불 피워놓고 고래고래 노래 몇 시간 불렀어요!"
"그 놈의 잠이 잠깐…. 부르러 올 줄 알았지. 다시 이제부터 바이칼로 나가자구."
"지금 2신데 이제 어딜 나가요."  
"이제부터 새벽까지 다시 시작하는 거야."

캠프에 참석하지 못한 윤 박사가 분하다는 듯 "바이칼로 다시 나가자"고 하자 모두 웃고 말았다. 창밖에는 비로소 어두운 밤이 깊게 내려앉았다. 일정도 막바지에 접어들었지만 바이칼은 좀 더 오래오래 머물고 싶었고 언젠가는 꼭 다시 오고 싶은 곳이라는 생각을 계속할 만큼 바이칼에 정이 흠뻑 들었다. 내일은 다시 울란우데로 돌아가 하루를 보내고 모레 오전에 울란바토르로 출발해야 한다.


태그:#바이칼 피크닉, #바이칼호, #투르가 마을,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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