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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시절인 80년대 중반, 주말마다 돌아오는 CA(동아리 모임, Club Activity)활동의 일환으로 단체영화 관람권을 얻어 난생 처음 극장에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기억 상으로 유추컨대 당시 영화 제목은 '쿼바디스' 즉, '신이여, 어디로 가나이까'라는 부제로 폭군 정치에 의해 평민과 노예들의 인권이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아주 끔찍한 종교영화였다.

당시 중학생 신분이었던 기자의 여린 심성으로는 그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매우 무섭고 잔인했던 상황으로 기억나는데, 왜 학교에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영화를 선정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당시의 어두웠던 시대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포장하려고 했던 정치적 선전선동 수단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찌됐든 그 영화를 계기로 영화관이라는 공적영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작품에 신선한 뇌진탕을 당하며 성인들과 어깨를 다툴 정도의 당당함을 얻었으니 일면 반전의 '트라우마'를 얻게 된 셈이다.

이후 '영웅본색''첩혈쌍웅''천장지구''정전자''도신' 등 당시 영화계를 평정했던 홍콩느와르 부류의 갱스터 작품에 푹 빠져 살면서 담배와 술, 싸움과 포커게임까지 손을 대며 일명 '날라리'의 날개를 달고 청춘을 불살랐던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이렇듯 질풍노도의 시기에 헛된 과욕을 불사르면서까지 영화마니아의 삶을 자처하며 모든 일상이 영화처럼만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시절 희망이 현실이라는 커다란 벽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았을 땐, 이미 영화관과는 너무 먼 사이가 됐음을 알게 됐다.

그러던 중 최근 이왕주 교수가 2005년도에 쓴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라는 책을 통해 저 가슴 속에 숨겨왔던 어떤 '청춘의 호기' 같은 것이 다시금 꿈틀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도 내 남은 삶의 가장 큰 화두로 삼고 있는 '철학'이라는 단어가 영화속 이미지와 묘한 조화를 이루니 그것이 전해주는 감동이야 이루 말 할 수 없으리라.

영화 '굿 윌 헌팅'을 보며 파스칼의 철학을 배우다

저자는 영화 <와호장룡>을 언급하면서 '부드러움이 결국 강함을 이기는 법'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소를 억지는 잡는 사람과 자연스러운 결대로 풀어 내는 사람의 차이와도 같다고 언급한다. 즉, 장자의 철학 '무위'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저자는 영화 <와호장룡>을 언급하면서 '부드러움이 결국 강함을 이기는 법'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소를 억지는 잡는 사람과 자연스러운 결대로 풀어 내는 사람의 차이와도 같다고 언급한다. 즉, 장자의 철학 '무위'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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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풀이 철학 살이><소설 속의 철학>에 이어 철학의 보편대중화를 위한 연민으로 2005년도에 처음 1쇄(2010년 11쇄 발행)를 찍었던 이 책은 그야말로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삶을 통해 철학이 이미 우리 예술 전반에 걸쳐 그 영역을 시나브로 확대해 왔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책의 저자인 이왕주 교수는 "영화의 한 살이가 너무나도 짧음"을 탄식하며 흥행논리만을 앞세워 철지난 영화로 퇴행시키는 시장논리 속 영화작품의 소멸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는 영화와 만나고 사귀는 법을 새롭게 이야기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즉, "이젠 영화를 작품(work)이 아닌 텍스트(소통)로 만나야 한다"며 말이다.

책 틀거리를 먼저 살펴보면, 저자가 감명 깊게 보았던 대표영화 29편의 작품과 그에 상응되는 철학자 29명의 대표적 잠언록을 대비시키며 옴니버스식 장면 설명으로 서술해 내려간다. 이를테면 영화 '트루먼 쇼'를 통해 철학자 들뢰즈의 '유목민'을 상기시켰고, 영화 '굿 윌 헌팅'을 통해 파스칼의 섬세한 정신을 투영시켰다.

덧붙여 설명하면, '트루먼 쇼'라는 작품에서 (결정적 동기부여자인)실비아가 트루먼(짐 캐리 역)에게 문자로 알려주었던 찰나의 깨달음을 통해 의식화된 억압기제에서 해방의 탈출구를 찾아 즉시 떠나야 한다는 들뢰즈식 유목민의 삶을 천착시켰다. 이어 '굿 윌 헌팅'에서는 천재청년 윌 헌팅(맷 데이먼 역)이 사회적 편력기제에서 벗어나 세상과 화해하는 법을 통해 파스칼이 강조했던 내면의 눈, 즉 영혼의 눈을 바라봐야 한다는 관점을 대비시켰다.

'중경삼림'을 통해 니체와 만나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현재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삶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 과거에만 집착하거나 미래에만 매달리는 몽유인을 '역사적 인간'이라고 불렀다.(중략)우리가 만일 행복해지려면 두 가지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망각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다. 망각해야 하는 것은 이미 없는 과거, 아직 없는 미래요, 사랑해야 하는 것은 현재 그리고 그 지평 위에서의 삶이다"

영화 '중경삼림'을 통해 니체를 만나야 한다며 저자가 강조했던 한 대목이다. 여기서 니체가 강조한 것은 '망각이야말로 인생사 가장 큰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를 방증하듯 '중경삼림' 내용을 잠시 들여다보면, 경찰관 633(양조위 역)과 아비는 서로 다른 벼랑길 위에서 사랑을 갈구하다 1년의 이별 뒤에 다시 만난다. 이 이별의 시간동안 그들이 배운 것이 바로 망각의 지혜였다. 비로소 이 연인은 과거와 미래를 망각하고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능력을 체득해 해피엔딩의 결말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저자는 작품 '슈렉'을 통해 칸트의 숭고함을 전하고, 무림 액션 영화 '동사서독'을 통해 베르그송의 '심층자아'를 발견하라고 설명한다. 또 '매트릭스'를 보며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실존의 인간'을 분석하며, 영화 '피아노'를 통해 에리히 프롬의 '소유와 존재'의 관계의 미학을  명확히 깨달아야 한다고 언급한다.

물론, 혹자는 이 책을 보며 영화를 보고 분석하는 것조차 어려운데 거기에 철학적 깊이까지 더한다면 누가 읽겠느냐고 손사래 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선입견과는 다르게 책의 텍스트에 몰입(소통)하다보면 어느새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현실의 삶과 자신의 내면, 그리고 억눌러 왔던 자신만의 삶의 철학과 맞닥뜨리게 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저자 이왕주 교수는 이 책의 에필로그를 통해 영화 같은 추억놀이의 흔적을 찾아 (철학적)삶의 텍스트를 완성시켜야 한다고 갈무리한다. 그러며 그는 추억을 통한 삶의 진지한 성찰을 끊임 없이 강조한다. 

"시대정신을 투영하며 영웅과도 같았던 영화들이 사라져가면서 남기는 안타까운 흔적들을 찾아 하나의 텍스트를 완성해나가듯, 삶도 그러함을 느끼며 자신만의 삶의 철학을 완성해나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추억이 있는 동안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 그 놀이의 흔적, 추억은 우리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환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효형출판(2005)


태그:#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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