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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 돈 때문에 목숨을 저울질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바로 무상의료다. 영국은 국가가 재정을 조달하고 의료 서비스를 관리하는 대표적인 무상의료의 나라다. 의료 서비스의 질과 재정 문제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60년 넘게 무상의료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의료 불평등과 의료시장 민영화 등의 한국사회 의료 문제의 해법을 영국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나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지난 3년의 영국 유학 기간 동안 심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을 만큼 강철 체력을 자랑했다. 그러던 올해 5월의 어느날 아침, 혈뇨(피오줌) 현상이 보였다. 비몽사몽간에 혼자 아침에 일어나서 검붉은 피오줌을 누게 되면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아무도 없는 타지에서 그런 일을 겪으니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너무 놀라서 하루 종일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봤다. 그에 따르면 나는 거의 오늘 내일 하는 죽은 목숨이었다.

급한 마음에 유학 온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그 유명한 영국 NHS의 GP(General Praticioner, 영국에서 1차 진료를 담당하는 일반의)를 찾게 됐다. 사실 유학 오기 전부터 주위에서 NHS에 대해서는 안 좋은 얘기를 꽤 들었기 때문에 주저했다. 하지만 실제로 영국 NHS를 이용해 보니 최소한 세 가지 점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① 당일에 검사까지 완료... 특급대우, 알고 보니

첫째, 목숨과 관계 있는 급박한 사안일 경우에 NHS는 한국의 의료 체계 못지않게 환자를 검사하고 치료한다. 한국에서 나는 영국에서 진료를 받으려면 과거 구소련에서 빵 배급 받느라 줄 서는 것처럼 엄청난 인내가 필요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진료가 필요하면 환자 본인이 아침 8시경에 GP 사무실에 전화를 하거나 직접 방문하면 선착순으로 당일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 역시 당일 진료를 신청해 그날 오후 1시로 예약 시간을 잡았다. 그리고 예약 시간 10분 전에 가서 1시 20분경에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의사인 동생의 말에 따르면, 사실 혈뇨는 요로결석처럼 경미한 경우부터 급성 신우염 같이 긴급한 병까지 다양한 증상에서 비롯된단다. 그래서 일단 혈뇨가 나왔다는 것 자체로 그 환자는 우선 응급환자로 분류된다고 했다. 실제로 내가 만난 GP는 간단한 소변 검사로 혈뇨를 확인한 후 그날 바로 내가 대학병원 응급실로 갈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영국 런던의 2차 진료기관인 세인트 조지스 병원(St. George's Hospital)의 치과 전문의 리차드 포터(Richard Porter)씨가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영국 런던의 2차 진료기관인 세인트 조지스 병원(St. George's Hospital)의 치과 전문의 리차드 포터(Richard Porter)씨가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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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정해진 검사를 마치고 최종 결과를 받은 것이 대략 오후 5~6시경이었으니까 결국 한 나절, 길게 잡아도 하루 만에 필수적인 모든 진료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요로결석 때문에 응급실을 이용한 적이 있었는데, 그에 비해도 크게 길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② 생명에 지장만 없으면... 세월아 네월아

둘째, 일단 검사 결과상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걸로 판명나면, 그 치료 기간은 상상을 초월한다. 당일 응급실 의사는 신장 기능에는 전혀 이상이 없고, 단순한 요로결석으로 추정되니 혹시 재발하게 되면 다시 GP와 상담하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몸에서 돌이 아직 안 빠졌는지 몇 주 후에 다시 복통과 함께 혈뇨 현상이 보였다. 다시 GP를 찾았더니 GP는 그때서야 정밀한 검사를 해볼 필요가 있겠다며, 엑스레이 촬영과 CT 촬영을 하도록 조치를 취해 주었다. 엑스레이 촬영은 GP의 상담 후 약 3주 후에 진행됐고 CT 촬영은 약 2달 후로 잡혔다.

한국에는 어지간한 규모의 병원에는 꼭 있는 엑스레이도 그 큰 에딘버러 시내에 몇 군데 밖에 없었다. 어쨌든 GP는 그 사이에 혹시 모를 통증을 위해서 진통제를 처방해 주었다. 그렇게 CT 촬영을 기다리는 동안 나의 방광에서는 결석이 자연배출됐다. 하지만 CT 촬영 이후에 작은 부스러기가 두 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결과도 CT 촬영 당일 날 안 게 아니라, 그 촬영 결과가 내가 사는 곳 GP 사무실로 이송된 후 1주일 있다가 겨우 알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병의 경중은 하루 만에 파악할 수 있었지만, 일단 경미한 병으로 분류된 후에 최종 결과가 나온 시간까지를 감안하면 거의 3개월이 걸린 셈이다. 솔직히 그 시간이 좀 답답하기는 했다. 하지만 초기 검사에서 특별히 급하거나 목숨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확답을 얻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견딜 만했던 것 같다. 

③ 줄줄이 검사는 안돼... 한국 의사도 인정한 합리성

셋째, 생각보다는 합리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급한 마음에 의사인 동생에게 전화했을 때 동생은 일반적인 혈뇨 환자에 대한 검사 지침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영국 의사들은 정말 그대로 진행했다. 환자인 내 입장에서는 돈을 좀 더 내고라도 확실하고 신속하게 진단을 받고 싶었지만 영국 의사들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며, 더 이상 병의 진행이 없는 한 추가 검사를 거부했다.

첫날 응급실에 갔을 때, 나는 불안한 나머지 기왕 대학병원까지 왔는데, 결석이 아직 남아 있는지 없는지 엑스레이 촬영 같을 것이라도 할 수 없냐고 했다. 하지만 응급실 의사는 그것 역시 GP하고 상담 후에 결정할 문제이며, GP의 소견서가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심심하면 찍는 엑스레이도 결석이 다시 재발했을 때, 그것도 몇 주 후에 겨우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역시 관련 지침에 따른 것인 듯보였다. 솔직히 환자인 내 입장에서는 확실한 결과를 신속하게 알 수 없으니 좀 답답하긴 했다.

하지만 의사인 동생은 내 전체 진료 과정을 듣더니,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평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감기든 백혈병이든 일단 피검사부터 하고, CT, MRI부터 들이미는 것보다는 합리적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불안하다고 불필요한 검사를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필요한 검사를 빼먹지도 않는 듯보였다.

물론 여전히, 나는 NHS 의료 서비스가 한국의 의료 서비스에 비해서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사설 의료 시설을 마음껏 이용하는 소위 'Lord(경)'들처럼 돈이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살 정도는 되는 나로서는 영국의 의료 서비스가 다소 답답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돈만 있으면 알아서 척척 해주어서, 며칠 만에 모든 검사가 신속하게 끝난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지간히 돈이 많거나, 응급환자가 아니고서는 그런 서비스를 기대할 수 없다. 또 아무래도 국가 주도하에 운영되다 보니 관료주의와 비리 같은 문제에 취약한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얼마 전에 BBC 시사 프로그램은 무허가 의료기구 업체가 수술 도구를 납품해 왔다고 폭로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많은 중산층들이 영국의 의료 제도에 대해서 비판적인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매번 총선에서 NHS 개혁은 정치권의 단골 메뉴다.

여왕은 포기해도 NHS는 절대 못 내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국민들은 왕정을 거부할지언정, 누구도 NHS의 '무상의료' 원칙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바로 NHS 체계가 교묘한 정치 공학적 균형점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영국 사회를 상류층, 중산층, 빈곤층으로 나누면, 당연히 돈이 없는 빈곤층의 입장에서는 NHS는 감사할 따름일 것이다. 한편, 사설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소수의 상류층은 무상 의료는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문제다. 오히려 언제 폭동을 일으킬지 모르는 위험한 빈곤층의 불만을 잘 다독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은 통치 수단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반면 여론 주도층인 대다수 중산층 입장에서는, 나처럼 불평을 하기에는 저렴하고, 마냥 좋다고 하기에는 조금씩 아쉬운 듯하다. 많은 영국 사람들이 매일 매일 영국 NHS를 비판하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이 제도를 버리지 않는 이유는 이 의료 시스템이 바로 절묘한 계급간의 타협 위에 서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떤 유학생분이 몇 달을 기다려서 탈장 수술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분은 미국에서도 어렵게 공부를 하셨는데, 미국에서 아팠으면 큰일이었을 거라고 가슴을 쓸어 내리셨다.

영국에서는 여왕이나 은행장처럼 돈이 아주 많지 않는 한, 재산에 비례해서 더 치료를 잘 받을 수도 없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저질 치료를 받거나 아예 치료 기회조차 박탈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한국에서 소문이 난 것처럼, 치료를 기다리다 죽어간다던가 하는 말은 정말이지 과장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영국 NHS 시스템은 "싼 게 비지떡"이라는 한국 속담처럼 "싼 비지떡"일지는 모르지만, 돈이 있든 없든 모두에게 최소한 "먹을 만한 비지떡"은 되지 않을까 한다.


태그:#NHS, #유러피언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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