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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8일 목요일, 서울교육연수원에서 서울시교육청이 만든 학생인권조례 초안에관한 공청회가 있었다. 하지만 공청회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서울교총', '한국교총'이라는 글자가 쓰인 피켓을 든 사람들이 단상 앞에서 "2억 준답니다!"라고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공청회를 시작해야 하니 이제 그만 들어가 달라는 요청에 계속 불응했기 때문이다. 그 분들은 결국 한참을 실랑이 한 끝에 자리로 들어갔다.

이 작은 해프닝(?)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학생인권조례 초안을 서울시교육청이 지금 발표한 것에 관해서 학생인권조례 자체에 대한 논의와는 별개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현재 상황이 또 다른 쟁점이 되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지금 다른 후보자를 매수했다는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판국에 서울시교육청이 학생인권조례를 추진하려고 하는 것은 염치없다는 생각들이다. 그러나 과연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거취는 학생인권조례라는 정책에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칠 문제인가? '학생인권조례'는 과연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것인가?

곽노현이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었다고?

9일 오후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9일 오후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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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조례의 역사는 길다. 조례에 담긴 내용들은 1998년 중고등학생복지회의 학생인권선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학생인권조례"라는 정책 자체만 봐도 2005년 무렵 광주에서 처음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추진했으니 6년이 넘은 셈이다. 그 안에는 우리도 사람이라고 외쳐온 수많은 학생들과 그들을 지지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녹아들어 있다. 때문에 교육감 직선제가 실시되자마자 대부분의 개혁적 후보들은 학생인권 보장, 학생인권조례 등을 공약으로 걸었다. 어른들의 표를 잡기에는 어려운 정책이었는데도 굳이 그렇게 했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은 후보 시절, 교육감 선거에 출마할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2009년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자문위원회 일을 하면서 교육 현장과 학생들의 삶을 보게 되었고, 교육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던 관심과 고민을 구체화하게 되었노라고. 즉 곽노현이 학생인권조례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학생인권조례가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후보'를 만들고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을 만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서울은 바로 올해, 서울시민 1%를 상회하는 청구인 서명을 받아 주민발의를 성사시켰다. 그건 서울시민들 중 상당수가 학생인권조례를 원한다는 표현이었고, 지역이지만 지역이 아닌, 전 인구의 1/4이 모여 있는 서울에서, 세 번째로 주민발의를 성사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관제 서명, 위조 서명 논란이 이는 무상급식 주민투표 서명과는 달리, 서울시교육청이나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으로부터 부당한 도움 같은 건 하나도 받지 않고 여러 단체들과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일구어낸 성과였다. 서울학생인권조례가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것이 아니라 교육과 학교의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적 목소리의 반영이고, 교육감의 거취와 무관하게 추진되어야 한다는 데 이보다 더 명확한 근거가 어디 있겠는가?

지금 시점에서 서울시교육청이 서울학생인권조례 교육청 초안을 발표한 것 역시 이런저런 사정이 겹친 결과일 뿐이다. 본래 서울시교육청은 7월에 서울학생인권조례 초안을 발표하고 공청회를 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내부에서의 신중론과, 교사들에게 학생생활지도 대체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자는 보완 의견 때문에 추가로 의견을 수렴하고 준비하게 됐다. 그러다가 주민발의가 최종 수리된 게 8월 초였고, 지방자치법상 아무리 늦어도 10월 초엔 서울시의회에 주민발의안을 상정해야 하기 때문에, 교육청안도 함께 상정하기 위해 9월에 공청회를 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공직자의 흠결이나 부도덕성이 그 공직자의 정책을 철회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는 공직자가 자리에서 물러나면 정책 추진이 어려워지니 그 둘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따져보면 공직자의 흠결이 그 정책의 정당성 또는 부당성을 판별하는 기준은 아니다.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이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수십억 선거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재산을 차명계좌로 숨겨 신고에서 누락한 것과, 인사 청탁으로 뇌물을 받은 문제로 유죄 판결을 받고 물러났지만, 그것을 이유로 일제고사, 학교선택제 등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이 강력 추진한 정책들을 철회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 적도 별로 없지 않은가?

집회는 안 된다고? 솔직해지시라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 관련된 논쟁과는 별개로, 서울학생인권조례 교육청 초안이 발표되면서, 과거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제정 당시에 있었던 일들이 재현되고 있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이, "집회의 자유"를 들어 학교를 정치 선동의 장으로 만들려 한다는 논리로 대표되는 "빨갱이/운동권 양성 음모론"이다. 가끔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을 보면 "집회 = 데모질 = 빨갱이/운동권"으로 자동 연결되는 뇌내 회로를 가지신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집회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집단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한 방식이다. 집회의 자유는 헌법을 가져올 것도 없이 한국이 비준하여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고 있는 UN아동권리협약에도 아동의 권리로서 명시하고 있다. 사람들이 개개인으로 원자화되어 있지 않고 모여서 공론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표현할 수 있는 것, 거기에서부터 민주주의 정치가 시작된다. 대외적으로 요구하는 시위 형태이든, 내부적으로 토론을 하는 토론회나 대회의 형태이든, 집회는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이다.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2010년 10월 5일 수원 영통에 소재한 청명고등학교에서 열린 '경기도학생인권조례 공포 및 학생 인권의 날 선포식'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 취지 등을 설명하고 있다.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2010년 10월 5일 수원 영통에 소재한 청명고등학교에서 열린 '경기도학생인권조례 공포 및 학생 인권의 날 선포식'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 취지 등을 설명하고 있다.
ⓒ 경기도교육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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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해선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진정 금지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집회가 아닌 듯하다. 학생들을 운동장에 줄 세워 놓는 운동장 조회도 집회이고, 선도부 학생들이 금연합시다, 지각하지 맙시다, 라는 피켓을 들고 교문에 서있는 것도 일종의 시위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금지하고 싶어 하는 집회에는 그런 모습은 쏙 빠져 있을 것이다. 즉 그 사람들이 금지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집회'가 아니라 '자유'이다. 학생들이 학교의 명령에 문제제기할 자유, 다른 목소리를 낼 자유를 금지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일부 교사들이 학생들을 세뇌시키거나 선동하는 것이 걱정된다면, 교사가 공식적인 발언권을 독점하고 있는 교실의 모습, 수업의 형태를 바꾸어야 할 일이다. 학생들이 그만큼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힘을 길러줘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런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자신과 관련된 일에 대해 의견을 표현하고 토론하고 참여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학생회를 통해서든 다른 조직이나 행동을 통해서든 토론하고 판단하는 데 능숙해져야만 한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금지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학교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교육정책들에 입 닥치고 순응하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좀 더 솔직해지시라. 학생인권조례에 반대하는 것은, 학생들이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말 잘 듣는 인형이 아닌 인간이라고 인정하기가 싫기 때문이라고. 집회의 자유 뿐 아니라 학생인권조례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는 학생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대화하고 실천할 줄 모르며 명령에 따르기만 하는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지는 않은가?

무엇보다 그 분들은 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 초안 내용을 제대로 읽으실 필요가 있다. 서울시교육청의 초안은 오히려 "학교 내의 집회에 대해서는 교육상 목적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학교규정으로 시간, 장소, 방법을 제한할 수 있다"라는 안을 제시하여, 학교가 마음대로 집회를 금지할 여지가 있는 독소조항을 담고 있다. 집회의 자유를 줘선 안 된다고 거품을 무는 분들이 좋아할 만한 안이다.

주민발의를 한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 서울본부는 집회의 자유에 관한 이 조항을 포함하여 두발복장에 대한 규제나 휴대전화 소지에 대한 규제를 학교가 학칙을 통해 할 수 있도록 한 조항, 차별금지 사유에 '성적 지향 및 성별정체성'이 없는 차별금지 조항 등에 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나는 교육청 초안에 묻혀서 더 중요한 주민발의안에 대한 얘기는 거의 나오지도 않는 것이 불만스럽다.

미성숙한 어른들이 인권의 수혜자

지난 2008년 7월 21일 한 학교의 남녀 학생들이 어깨를 겯고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체벌을 받고 있다.
 지난 2008년 7월 21일 한 학교의 남녀 학생들이 어깨를 겯고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체벌을 받고 있다.
ⓒ 임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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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조례에 관한 논쟁이 붙은 게 경기도 때부터 생각해보면 3년째다. 학생인권 자체에 대한 논쟁의 역사는 더 길다. 하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좀 논의의 수준을 업그레이드 하면 안 되겠냐는 것이다. 우리 교육이 어떤 교육이 되어야 할지, 학생들의 민주시민으로서의 정치 능력을 어떻게 배양할지,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의 학교 운영 참여는 어떻게 해야 실질적으로 보장이 될지, 입시교육의 모순을 어떻게 넘어설지, 학생들 사이의 차별과 폭력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교육예산은 얼마나 어떻게 확보하고 어떤 우선순위로 배분해야 하는지….

이런 논의를 하기도 부족할 판에, 우리는 학생이 인간인지 아닌지, 매로 때릴지 뺨을 때릴지 아니면 기합을 줘서 굴릴지, 염색을 하면 학교가 무너지는지 안 무너지는지, 전교조와 북한의 음모가 있는 건지 아닌지,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이 어떤 종교가 믿는 신의 뜻을 거스르는지 아닌지,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2억을 박명기 씨에게 줬는데 학생인권조례를 추진할지 말지, 그런 걸 가지고 논쟁 아닌 논쟁을 벌이고 있다. 수년 동안, 아무 발전도 없이.

아, 이토록 미성숙한 어른들에게 맡겨놓아서 우리 사회와 교육이 이 모양인 것일까? 아니, 그 어른들도 이런 교육을 받고 성장해서 이런 것일까? 20대 중반의 나이에서 어른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청소년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나는 이것저것 답답하기만 하다. 일단, "미성숙한 애들한테 인권은 무슨 인권?"이라고 큰 소리 칠 만큼 자기가 '성숙'하다고 자임하는 사람이야말로, '미성숙'하더라도 말할 자유는 보장해야 한다는 인권 원칙의 수혜자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공현 기자는 청소년 인권운동가로 '아수나로'(‘아름답고 수줍은 나의 로망스’의 줄임말이 아니라 무라카미 류의 소설에 나오는 나무 이름)에서 활동하고 있다. 올해 6월 <인권, 교문을 넘다>를 공동집필했다.



태그:#학생인권조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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