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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일과 병모가 떠나고, 우리 부자는 일단 남행 길을 택했다. 뉴욕에서 남쪽으로 차로 두 시간 거리인 필라델피아의 내 친구 집으로 차 머리를 돌렸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짝이었던 내 친구는 결혼 이후 줄곧 미국에서 살았다.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그의 집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쳐난다. 6년 전 10개월 가량 미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여러 친구 집에서 신세를 졌는데, 이 친구 집은 유독 푸근했다.

"북쪽으로 갈래, 남쪽으로 갈래?"

병모와 선일이를 떠나 보내기 직전 아들에게 물었다.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길은 그가 원하는 경로로 잡을 생각이었다. 윤의는 당초 플로리다의 키웨스트까지 가볼 심산이었다. 키웨스트는 맑은 날 카리브해의 섬 나라, 쿠바가 바라보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북미대륙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열도의 하나이다. 쪽빛 바다, 강렬한 태양, 남국의 여유… 윤의는 처음 키웨스트의 이런 이미지에 잠깐 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북쪽으로 정리했다.

펜실베이니아의 앨리게니 산맥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80번 주간고속도로를 알리는 표지판이 길가에 서있다. 멀리 왼쪽으로 뾰족한 봉우리 없이 마치 삼각프리즘처럼 누워있는 앨리게니의 산맥 줄기가 보인다. 동부를 막 출발했지만, 웨스트(WEST)라는 교통 표지판의 문구가 한결 마음을 가볍게 한다.
▲ 서부로 되돌아 가는 길 펜실베이니아의 앨리게니 산맥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80번 주간고속도로를 알리는 표지판이 길가에 서있다. 멀리 왼쪽으로 뾰족한 봉우리 없이 마치 삼각프리즘처럼 누워있는 앨리게니의 산맥 줄기가 보인다. 동부를 막 출발했지만, 웨스트(WEST)라는 교통 표지판의 문구가 한결 마음을 가볍게 한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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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히 좀 생각해보고 싶네요.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곳이 좋겠어요."

그래서 나는 필라델피아의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바로 정북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아빠 친구네 집 참 분위기 좋지."
"예, 그래요. 엄마가 더 보고 싶어지네요."

친구 집을 떠나오며 차 안에서 윤의는 또 엄마를 찾았다. 크레믈린이란 별명을 가진 내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식구들 모두가 말수가 적은 편인데도 친구의 집은 따뜻한 분위기가 넘쳐 흘렀다. 그런 분위기가 엄마 생각을 나게 한 것이다.

정을 붙이기가 꺼려지는 아빠라는 존재 때문에 윤의에게는 엄마가 항상 더 살갑다. 아이 엄마는 전적인 신뢰와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식들을 대하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필라델피아의 친구와 그 집 아들 셋의 관계는 마치 아이 엄마와 윤의 사이 같다. 내 친구도 말없이 가슴으로 자식들을 안아주는 타입이다.

"우리 서로 너무 기대하지는 말자. 우리 둘이 더 불편해지지만 않아도 이번 여행은 성공이라고 생각하자."

거대한 구릉이 밭고랑처럼 구비구비 펼쳐진 펜실베이니아 주 중부지역의 시골 길을 지나면서 나는 둘 만의 여행에 대한 내 생각을 꺼내놨다. 속된 말로 우리 부자는 평소 한 없이 '뻘쭘한' 사이이다. 헌데 여행에 대해 뭔가 의미를 부여하려니, 말을 꺼내는 순간 참으로 어색한 느낌이었다.

"후웃~, 그래요."

약간의 회의적이기도 하고, 조금은 기대를 내비치는듯한 말투로 윤의가 내 말을 받았다.

세 아들과 별 말도 없이 다정하게 지내는 친구가 서부로 돌아가는 우리 부자에게 직접 싸준 도시락. 부침개와 정성스럽게 깍은 과일, 물, 휴지 등이 들어 있었다. 아들과 사이가 좋은 친구가 부러웠다.
▲ 도시락 세 아들과 별 말도 없이 다정하게 지내는 친구가 서부로 돌아가는 우리 부자에게 직접 싸준 도시락. 부침개와 정성스럽게 깍은 과일, 물, 휴지 등이 들어 있었다. 아들과 사이가 좋은 친구가 부러웠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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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번 주간 고속도로로 접어 드니, 차창 밖으로는 앨리게니(Allegheny) 산맥의 산등성이들이 겹겹이 성처럼 늘어서 있었다. 애팔래치안 산맥의 일부인 앨리게니 산맥은 삼각기둥을 눕혀둔 모양을 하고 있다. 툭 솟아오른 산봉우리가 없이, 산 정상 부위가 일자로 수십 km씩 뻗어있는 형국이다. 로키 산맥처럼 해발고도가 높지는 않지만, 산이 칼끝처럼 끝이 뾰족뾰족하지 않아서 품이 넉넉한 인상이다.

80번 주간 고속도로의 길가로 거의 주기적으로 '웨스트 80'이라는 표지판이 나왔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은 안도감을 준다. 동부를 이제 막 뒤로하기 시작했지만, 웨스트라는 단어가 실로 정겹게 느껴진다. 눈 앞의 저 큰 산만 하나 넘으면, 곧 로스앤젤레스가 펼쳐질 것 같다. 네 명이 탔던 차 안은 탑승자가 2명으로 줄면서 한결 넉넉해졌고, 그 만큼 여유로웠다.

"우리 부자 간인데 참 다르지,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냐."

정색을 하고 묻는 게 아니라, 그저 푸념하듯 윤의에게 말을 붙였다.

"그러게요, 그러게 말이에요."

전 같으면 "그런 말 해서 무엇 하냐" 혹은 "무슨 말 하려고 또 그런 말을 꺼내는 거냐"고 예민해져서 되물어왔을 법도 한데, 윤의는 대체로 잠자코 들어주려는 눈치였다.

"내가 너한테 무릎 꿇고 빌고 싶다는 얘기 했던가."
"아니요."
"네 엄마한테, 이런 내 마음을 1년도 전에 털어놨다. 한번 확인해보렴."
"아니, 왜 꼭 그런 식으로 얘기해요. 나도 엄마도 못 믿는 것처럼."
"미안하다, 미안해. 내 성격이 원래 그렇지 않냐."

윤의는 순간 뜨겁게 달아오르려는 마음을 억누르려는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우리 부자는 이상하게 같은 말도 어감을 크게 다르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서로에게만은 똑같은 말도 상대의 짜증을 돋우곤 한다.

"너 어릴 때 내가 트라우마 남긴 거 인정한다. 그러나 그땐 그게 트라우마가 되리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지금 그때로 돌아가도 나라는 사람은 그렇게밖에 못할 거 같다. 무릎 꿇고 빌고 싶다는 말은, 궤변 같지만 내가 잘못했다기 보다는 결과적으로 네 마음 상처를 남겼기 때문에 하고픈 말이다."
"알아요. 저도 지금은 알아요. 그래도 그 트라우마로부터 저는 지금도 솔직히 자유롭지 않아요."

김치와 라면 등을 사기 위해 시카고에 진입했다. 왼쪽으로 높게 솟아있는 건물이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가운데 하나로 꼽혔던 시카고의 상징, 시어즈 빌딩이다. 이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대도시에는 들르지 않을 작정이다. 대신 우리 부자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데 도움을 줄 경치좋은 시골이나 깊은 산속을 전전할 것이다.
▲ 시카고 김치와 라면 등을 사기 위해 시카고에 진입했다. 왼쪽으로 높게 솟아있는 건물이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가운데 하나로 꼽혔던 시카고의 상징, 시어즈 빌딩이다. 이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대도시에는 들르지 않을 작정이다. 대신 우리 부자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데 도움을 줄 경치좋은 시골이나 깊은 산속을 전전할 것이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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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에야 안 사실이지만, 윤의는 나 때문에 초등학교 5~6학년 때 삶을 내려놓고 싶은 생각을 거의 한시도 내려놓지 않았다고 했다. 아빠 앞에서만 서면, 세상에 제일 못난 놈, 쓸모 없는 인간이 되는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엄마도 없이 미국 생활을 하면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2살 터울의, 역시 나이 어린 누이와 함께 집에 머물러 있던 시간들이 공포스러웠다고 했다. 어린 나이지만 도무지 존재 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던 그 시기 죽음이란 단어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리노이 주의 한 시골 풍경. 이런 풍광을 대하노라면 세상사 다툴 일도, 아들에게든 주변사람들에게든 그리 많은 걸 요구할 일도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 평화로운 시골 일리노이 주의 한 시골 풍경. 이런 풍광을 대하노라면 세상사 다툴 일도, 아들에게든 주변사람들에게든 그리 많은 걸 요구할 일도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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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시 편도 55km쯤 떨어진 도심의 직장으로 출퇴근을 반복하던 때였다. 그 즈음의 나로서는 윤의의 죽고 싶은 심정을 알아차릴래야 차릴 수 없는 실정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밥해주고, 간식과 저녁을 준비해 놓고 출근했다. 오후 6시면 직장상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곧바로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자정이 다 될 때까지 아이들과 놀아주곤 했다. '공부를 잘하라'식의 말은 한 번도 입에서 꺼내지 않았다.

하루 6시간도 제대로 자지 않으면서 집과 직장에 나의 몸과 마음 전부를 바쳤다. 한번은 계산해보니 토요일과 일요일 포함해, 하루 평균 7시간 가까이를 윤의와 윤의 누이와 놀아주는 데 쓰고 있었다. 거의 매일 쓰러질 지경으로 열심히 살았던 나로서는 그 기간 내가 윤의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고 있었다는 걸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아니, 설령 알았다 한들 인정할 수도 없었다.

덧붙이는 글 | cafe.daum.net/talkus에도 올립니다.



태그:#트라우마, #아들, #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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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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