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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민간인학살
 거창민간인학살
ⓒ 위키디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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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국군에 의해 자국 민간인이 집단학살 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공비(공산군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이름하에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노약자를 포함한 719명의 민간인들을 국군을 동원하여 총검으로 집단학살하였다. 이 사건이 '거창양민학살'사건이다. 희생자 분포를 보면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 359명, 16세 ~ 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남자 327명, 여자 392명)이다.

그 후 이 학살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은 국군을 공산군으로 위장시키고, 자국 국회조사단에게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은폐를 시도했다.

그러나 진실은 숨길 수 없는 법이다. 그러한 김종원의 방해 작업에도 국회조사결과 이 학살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그리고 내무·법무·국방장관이 사임하고, 김종원·오익경·한동석·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정의도 잠깐 719명의 민간인을 학살 한 이 가해자들은 곧 얼마 되지 않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두 특사로 석방되어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돌아왔다.

정의보다는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는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래서 통쾌감이나 희열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안타깝고 분노가 치민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은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정신건강에도 안 좋다. 그렇다고 못나고 한심한 우리역사를 공부 안할 수도 없고 참 딜레마다…. 문제는 이러한 비극적인 현대사의 문제가 그저 과거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오늘의 문제로 생생하게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데 있다.

사상가 함석헌은 이런 우리 역사의 문제를 이렇게 한탄했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래도 또 모아대고 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 역사, 이것이 역사냐? 나라냐? 그렇다. 네 나라며 내 나라요 네 역사며 내 역사니라."

이런 함석헌의 글을 위로삼아 진실화해위원회(진실위)위에서 이 거창학살사건을 조사했던 안정애 박사를 만났다. 그녀는 진실위에서 '진실누설죄'로 이영조(당시 위원장)씨에 의해서 해임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다음은 지난 2일 안정애 박사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이승만, '거창사건' 외신에 알려지자 '부끄러운 곳 알리지 말라' 지시"

 안정애 박사
 안정애 박사
ⓒ 안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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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은 '거창사건'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특무대를 이용, 사건의 조작, 은폐·왜곡을 시도하였는데, 이승만이 '거창사건'을 어떻게 그리고 왜 조작, 은폐, 왜곡을 시도하였다고 보나?
"이승만은 소위 '거창사건'이 외신에 알려지자 '부끄러운 곳을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에게 내리고, 신성모는 집단학살현장을 방문, 특무대에게 사건의 조작· 은폐· 왜곡을 전담하도록 '특명'을 내리게 된다. 전쟁기인 1950년 10월에 창설된 특무대는 '상부의 특명사항처리' 업무를 수행했음은 자체 공간사(국군보안사령부, 1978, [대공30년사], 37-38쪽)에서 밝히고 있다."

- 거창사건으로 인해 당시 피해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국가폭력에 의해 파괴되었는지 몇 예를 들어 달라?
"무수히 많다. 대부분 10대 전후의 어린 나이에 부모와 가족이 몰살당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으며, 총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치료는커녕 먹고 살기가 어려워 친척집을 전전하거나 남의집살이를 해야 했다. 부모가 없어 결혼도 좋은 조건으로 하지 못하였고, 심지어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소리도 듣고 살아야 했다. 그 중 몇 분의 증언을 요약하면 이렇다."

최금점 - 사건 당시 13세. 총상 입고 생존. 학살현장에서 총을 맞은 어머니 머리가 부서져서 없는 것을 확인.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산청읍내에서 남의집살이 함. 어린나이에 밥하고 두레박으로 물 긷고 하는 것이 힘들었다. 먹고 살기 위해 안 해 본 거 없이 다 했다. 지금도 악몽에 시달림.

김갑순 - 사건 당시 11세. 총상 입고 생존. 학살현장에서 7세, 4세 남동생을 포함 가족 10명 몰살. 다른 마을로 시집간 셋째 언니 한 명만 생존. 아버지가 구장이었고 우익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차별 학살당함. 어린 나이에 언니네 집에서 소 몰고 꼴망태 지고 온갖 일을 다 했다. 소고삐 안 놓치려고 땅바닥에 넘어져 질질질 끌려가기도 해서 배가 다 쓸리는 일도 있었다.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서울까지 가서 7년 이상 남의집살이 했다.

우기묘 - 사건 당시 12세. 총상 입고 생존. 최근까지 사건 얘기를 안 함. 가족 10명이 다 몰살당함. 사건 현장에서 어머니 죽음 확인, 어머니 등에 업혀 있던 두 살짜리 동생을 빼 업고 나왔으나 이미 죽어 있었음. 결혼 후에도 부모 형제가 없어 무시 받고 살았다. 신경이 날카로워서 경끼를 자주 일으킴. 잠도 편안하게 자 본 적이 없음. 지금도 전쟁영화나 드라마는 학살 당시가 생각나서 볼 수가 없음.

허점달 - 사건 당시 11세. 총상 입고 생존. 아버지, 언니와 함께 학살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 나왔음. 그러나 다시 들어온 군대가 마을 생존자들을 소개시키면서 걸어갈 수 없다는 이유로 군인들이 치료받고 있던 언니를 쏴 죽였다. 아버지도 며칠 후 총상 후유증으로 사망. 부모가 없어 배우지도 못하고 친척집에서 일만 죽어라 했다. 낮에 하도 일을 많이 해서 밤에 야학 갈 엄두가 안 났다. 지금도 후유증으로 웃는 얼굴을 할 수가 없다. 머리 한 쪽이 멍하다. 입이 잘 안 벌어진다.

이정선 - 사건 당시 7세. 어머니 손을 잡고 있던 중 갑자기 국군이 던진 수류탄이 터져 정신을 잃음. 깨어보니 팔, 다리, 머리가 떨어진 시체들이 뒤엉켜 있었음. 연기와 냄새가 지독했는데 어머니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시체 팔도 만지고 하면서 헤치고 나왔다. 구덩이에서 나와 보니 시체들에 불이 붙고 냄새가 났다. 사건 직후 정신착란을 일으켜 1년 동안 학교도 못 갔다. 밥도 못 먹고 깨죽만 먹었다. 진주와 서울을 전전하면서 급사노릇 하면서 야간학교 다녔다. 결혼한 후 빨갱이 가족이라는 소리도 듣고 살았다. 고향엔 지금도 가고 싶지 않다.   

정정자 - 사건 당시 7세. 세 군데 총상입고 생존. 어머니가 밑에 감싸고 앉아 있어 살았다. 죽은 남동생들은 5살, 3살이었다.


- 당시 11사단장 최덕신이 지휘한 '견벽청야' 작전이란 무엇이고 최덕신은 왜 이 작전을 무리하게 구사했다고 보나?
"일본이 만주에서 사용했던 초토화작전과 동일한 것으로 국제법상으로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간도특설대에서 주로 사용했던 이 작전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던 한국군 창군 시기에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되었다. 최덕신은 중국 국민당군에서 복무하긴 했으나 그 역시 일본군이 써 먹던 방법, 즉 "100명의 공비에 대해서 사살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중에 상당한 부분이 양민일 것을 각오해야 한다"(전사편찬위원회, '최덕신증언록')는 초토화작전을 구사하였다.

정식 소개령도 없는 상태에서 소개의 시행과정이 불법적이고 반인륜적인 것이었음은 당시 소개작전을 수행했던 군인들의 직간접적인 증언에 의해 확인된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주민소개 시 시기와 목적 등이 정확히 고지되지 않았고, 가옥 등에 대한 소각사실도 통보하지 않았으며, 노약자나 임산부 등을 대피시키지 않고 전광석화식의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인 소개(당시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중사 박00의 진술, 2007. 4. 29)가 이루어졌다. 

최덕신은 부친 최동오가 납북된 이후 자신이 군에서 출세할 길이 막히자 이승만에게 충성심을 발휘, 전과를 확대하여 출세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그의 증언에서도 '군공을 세우고자'(최덕신, [남한 땅에 30년], 54쪽)했던 것이 확인되었다."

- 당시 산청군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에 국군 헌병대가 조사한 피해자는 1951년 2월 7일 희생자 190명(2월 9일 희생자 30명)으로 나온다. 반면 유족회가 주장하는 2월 7일 희생자는 705명인데 왜 희생자 규모가 이렇게 군과 유족회 사이에 크게 차이가 난다고 보나? 그리고 어느 숫자가 실제 피해자 수에 가깝다고 판단하나?
"헌병조사시 '거창사건'과 달리 '피학살자명부'를 작성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단 헌병이 조사한 것 보다는 많았던 것은 확실하다. 사건 당시 주민(김종성)의 증언에 따르면 서주리를 제외하고도 총 258명이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젖먹이까지 모두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닌 '적'으로 간주"

- 1951년 2월 12일 선청군 대현리에서는, 마을에 진입한 국군토벌대가 닥치는 대로 민간인과 가축을 사살하였다. 그런데 당시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은 대부분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였다. 그렇지만, 군은 이들도 눈에 띄면 무조건 사살하였다. 왜 그랬다고 생각하나?
"닥치는대로 무차별학살을 하겠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이미 산청, 함양, 거창 일대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동일하다."

- 당시 피해자 정정자씨는 사건 당시 8세였는데도 불구하고, 국군에 의해 팔 두 군데, 다리 한 군데 총상을 입고도 생존했다. 당시 국군은 정말로 8세 어린아이도 '빨갱이'로 판단해서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고 보나?
"오익경(11사단 9연대장)의 진술에 의하면 지리산자락에서 빨치산에게 불가피하게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은 모두 '적'이었다. 치안유지의 책임이 국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일 수밖에 없는 곳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남자 장정은 물론 젖먹이까지 모두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닌 '적'으로 간주되었고, 그것은 곧 무차별 학살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특무대 극비문서 문서 내용 "작전명령제5호 부록(단기 4284년 2월 2일부) 환급한 부대출동에 제하여 사령관 각하로부터 좌기와 여한 주의가 유하옵기 하달하오니 철저한 이행으로다 작전에 기대한바 어김없는 성과를 당부대명예 앙양에 적극 노력할 사 
1.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적은 주둔지 급 각기 촌락에서 귀환하지 않고 암암리에 행동을 감행하고 있으니 차를 용허치 못할 것임. 적발 즉시 총살하라"
▲ 특무대 극비문서 문서 내용 "작전명령제5호 부록(단기 4284년 2월 2일부) 환급한 부대출동에 제하여 사령관 각하로부터 좌기와 여한 주의가 유하옵기 하달하오니 철저한 이행으로다 작전에 기대한바 어김없는 성과를 당부대명예 앙양에 적극 노력할 사 1.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적은 주둔지 급 각기 촌락에서 귀환하지 않고 암암리에 행동을 감행하고 있으니 차를 용허치 못할 것임. 적발 즉시 총살하라"
ⓒ 안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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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개인적인 질문을 하겠다. 안 박사가 진실위 근무당시인 2010년 7월 12일 진실위로 익명의 투서가 있었다. 투서내용은 안정애 박사의 논문발표에 인용된 바 있는 "'거창사건 관련자료'를 일반 연구자들에게도 공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김용직 상임위원은 안 박사의 논문발표 경위와 내용을 듣고 "발표논문은 학술용, 연구용에 해당하므로 문제가 없다. 더군다나 익명으로 들어온 투서는 문제 삼을 가치도 없다. 혹시 언론에서 진실위를 상대로 좋지 않은 플레이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걱정할 거 없다. 이영조 위원장에게 알아듣게 얘기 하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안박사 에게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후 이 문제와 관련, 한마디 언급도 없다가 2010년 7월 29일 이영조 위원장이 진실위 고등징계위원장에게 '공무원징계의결요구서'를 발송하여 결국 진실위에서 해임되었는데, 이러한 이영조씨의 조치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나는 진실위 3기는 과거사정리에 실패한 위원회라고 평가한다. 현 정권이 임명한 이영조(위원장)를 비롯,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의 전횡으로 무수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진실위 출범 초기에 국가기관(기무사, 국가정보원, 경찰, 검찰 등)으로부터 법적근거에 의해 입수한 문건은 자료집으로 공개, 출간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치한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본다. 아직까지 가해사실과 가해자를 밝힐 중요한 관련문서들이 공개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유족들은 재판 등에서 아직까지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가슴 아픈 일이다."

- 국가차원의 과거사정리는 종결되었다. 과거사정리기구에 몸담았던 연구자이자 학자로서 개인적으로 과거사정리와 관련하여 향후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국가의 가해사실을 밝히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인 유족분들 중에서 논리가 필요한 분들에게 학문적으로, 그리고 증거제시를 통해서 대응 논리를 제공해 드릴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기 피해자 여성분들의 구술을 녹취하여 자료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한 이런 피해자 분들의 인생을 망친 가해자들과 관련하여서도 자료를 수집하여 가해 지휘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집을 만들 것이다." 

안정애 박사는?
 안정애 박사
 안정애 박사
ⓒ 안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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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정치외교학 전공. 인하대, 육사, 한양대 등에서 '정치학 개론,' '국제정치경제학,' '여성과 정치' 등 강의.

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원.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2과장, '실미도 사건,' '삼청교육대 사건,' '신군부의 언    론통폐합사건,' '재일동포 및 민간인 간첩조작 사건' 등 조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2팀, '한국전쟁 전 거제 민간인집단희생사건,' '한국전쟁 전후 경남 산청, 거창 등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등 조사.

현 산청함양사건희생자유족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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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