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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현재 영국의 대도시 곳곳을 휩쓸고 있는 폭동은 2003년 발표된 영화 <28주 후>와 서로 많이 닮았다.

먼저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다 보니 요즘 만만한 게 '다문화 정책'이라고 지난 세기말 물밀듯이 들어온(참고로 영국은 불과 10여 년 전까지도 난민과 경제적 이민에 관한 한 유럽에서 가장 관용적인 정책을 펼친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출신의 이민자들과 영국 전통사회와의 불화를 지목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폭동... 또 이민자 때문이라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바이러스'의 확산을 담은 영화 <28주 후> 포스터.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바이러스'의 확산을 담은 영화 <28주 후> 포스터.
ⓒ <28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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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쉬운, 그러나 지극히 무책임한 해석이다. 방화와 약탈의 주체나 대상 중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이민자 혹은 기존의 영국인이라면 모를까 지금까지 그런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 화면이나 목격자들의 증언 모두 일관되게 폭도들의 인종 구성은 다수의 백인에 소수의 아프리카, 아시아계 영국인들이 뒤섞여 있다고 한다.

더구나 그들에겐 그 어떤 요구사항도, 구호도 없다. 단지 닥치는 대로 부수고 훔치고 있을 뿐이다. 그 어떤 조직이 개입되어 있는 흔적도 없다. 그저 불특정다수의 개인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연결'되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일부에서 이번 사태의 진원지인 토트넘에서 발생한 지난 1985년의 폭동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설득력을 얻긴 힘들어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엔 영국 최초의 흑인 시의원이던 (그리고 훗날 토트넘에서 국회의원이 된) 버니 그랜트(Bernie Grant)를 주축으로 많은 이민자들이 경찰과 정부의 제도적 인종차별을 지적하며 소요사태를 주도했지만 이번의 경우 같은 지역구의 아프리카계 영국인 국회의원 데이빗 라미(David Lammy)마저 폭도들의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비난 대열에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폭동은 우리 사회의 이른바 '묻지마 범죄'와 상당히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누군가 특별한 이유 없이 길을 가다 갑자기 아무나 흉기로 찌르거나 무차별로 폭행하는 사건들처럼 말이다. 그간 언론과 경찰은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며 늘 한 개인의 정신 문제 정도로 치부해 왔다.

하지만 범죄의 주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세상에 화가 났다'고. 그래서 '영화'와 '현실'의 두 번째 공통분모는 '분노'다. <28주 후>에 등장하는 좀비들이나 폭동의 핵심인 '후디'(주로 후드 티를 즐겨 입는 영국의 10대들을 일컫는 말, 거의 폭도들의 유니폼이다)들 공히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나 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화나게 했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화가 난 것일까? 주체할 수 없는 '분노 바이러스'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먼저 폭동의 출발점과 주요 발생 지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런던, 맨체스터, 버밍햄 모두 하나같이 대도시들이다. 어디나 그렇듯 대도시의 삶은 팍팍하고 버겁다. 특이 영국은 더 그렇다. 게다가 보수당이 주도하는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서민들의 삶은 훨씬 더 버거워졌다. 사회안전망에 투입되는 각종 예산들이 'cut, cut and more cut', 즉 깎이고, 깎이고 또 깎였다. 오죽하면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를 'Axeman(전설속에 나오는 도끼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라 불렀을까.   

좀더 들어가면, 이들 도시가 비록 뉴욕이나 파리처럼 특별 구역을 지정해 슬럼가로 분리하고 있진 않지만 정부에서 제공하는 '공영주택'이 많은 동네들에서 주로 '분노'가 터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번 사태를 인종 간의 갈등보다는 계층 간의 갈등에 더 무게를 두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폭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연령대 또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이 압도적이다. 영국은 우리에 비해 사회진출이 무척 빠른 편이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을 제외하고 만 16세면 대부분 취직을 한다. 문제는 등록금이다. 1년 평균 3290파운드(한화 약 600만 원)의 상한선을 뒀던 대학 등록금도 정부의 '도끼질'로 고삐가 풀려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결국 대학은 있는 집 아이들의 전유물이 됐고 나머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그들에게 일자리가 없다. 만 16세에서 24세까지의 실업률이 20%를 상회하는데 가난한 지역의 상황은 훨씬 열악하다. 예를 들어 이번 폭동이 가장 심한 지역 중 하나인 하크니(Hackney) 지역의 경우 약 33%의 젊은이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나마 무급의 견습공이나 취업학교에 다니는 이들을 제외하고도 그 정도라니 청년실업률에 관한 한 캐머런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우열을 가리긴 매우 힘들어 보인다. 그런데다 실업수당 청구, 수령 절차와 자격 요건도 대단히 까다로워졌다. 어린 친구들의 상실감과 박탈감이 오죽했으랴. 당연히 세상에 화가 날 수밖에.

우왕좌왕하는 경찰 조롱하는 폭도들

분노의 원인이야 그렇게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는 정도지만 발발 뒤 확산하는 과정에서의 문제점은 더 명확해 보인다. 그 중심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한 정부가 있는데 영화와 현실이 닮은 세 번째 모습이 바로 이 점이다. 더구나 이 사회적 분노는 한 군데 머무르지 않고 옮겨 다닌다. 마치 영화 속 인간들이 속수무책으로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되듯 말이다.

경찰의 초동 대응 미숙이 화를 키웠다. 마침 머독의 도청 파문에 연루된 런던 경찰청장과 주요 간부가 줄줄이 사표를 낸 상태였다. 정부가 공공 부문 일자리 50만 개 이상을 없앴는데 그 중엔 수천 명이 넘는 경찰관도 포함됐다. 그러다 보니 런던 같은 대도시에 경찰관 숫자가 고작 6천 명이다. 우리처럼 툭하면 전경 20개 중대 1만 몇 천 명이 동원되는 나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다.

게다가 스마트폰과 그 속에서 구동되는 SNS는 폭도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기동성을 선물했다. 지금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기대할 것 없는 무능한 정부를 조롱하고 있다. 대학 등록금 면제를 장담하며 연정에 참여한 자민당의 배신에서 보듯 유권자와의 약속은 경제 논리 앞에 늘 헌신짝이다.

몇 년 사이 두 차례나 찾아 온 금융위기에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거기다 감세와 공공부문 지출 삭감으로 애꿎은 서민들만 곡소리 나는 상황이다. 이쯤 되면 모든 게 만만해 보이지 않을까. 그러니 너도 나도 '분풀이'를 하러 거리로 나올 수밖에. 어차피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던 차에 말이다.  

진정되는 폭동,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닐 수도

영국 폭동 소식을 속보로 전하는 <스카이 뉴스> 화면
 영국 폭동 소식을 속보로 전하는 <스카이 뉴스> 화면

<28주 후>를 만든 대니 보일은 불과 28일 만에 한 인간이 바이러스에 노출(exposure)되는 것을 시작으로 감염(infection)과 유행(epidemic)의 과정을 거쳐 결국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진 상태에서 모두가 대피(evacuation)한 뒤 온 도시가 황폐화(devastation)되는 5단계로 영국 전역이 마비된다고 설정했다. 겨우 '7일 후'밖에 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성급한 결론일지 모르지만 이번 사태가 3단계를 넘기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와 현실은 여기서부터 조금 다르다. 그리고 달라야 한다.

늦게나마 캐머런 총리가 사태 해결을 위해 경찰에 백지위임(carte blanche)을 했다. 여기엔 물대포(겨우?) 사용도 포함돼 있다고 언론은 전한다. 이미 1300여 명이 넘는 폭도들이 체포됐다. 거기다 곳곳의 선량한 주민들이 커뮤니티를 지킨다며 자경단(vigilance)을 조직하고 있다.

폭도들은 외롭다. 그 누구도 편들어주는 이 없다. 이미 런던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거리로 뛰쳐나온 그들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거나 각기 이유가 다 다르니 하나로 뭉치지 못할 수밖에 없고 그러니 갈수록 커지는 눈덩이가 될 수 없는 거다.

문제는 초국적 자본의 횡포 앞에 맞서지 않고 그들의 논리에 부화뇌동하는 정부가 있는 한, 그리고 그들에게서 힘없는 다수가 끊임없이 소외당하고 배제되는 한 이런 일이 언제든 다시 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땐 4단계를 넘어 5단계로 진행되는 재앙을 멈출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분노, 이 땅에서 재현된다면...

영국은 자본주의 종주국이다. 소설 <리틀 도릿(Little Dorrit)>에서 보듯 찰스 디킨스는 이미 150년 전에 탐욕스런 자본가와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 좇는 무능한 관료들의 폐해를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이후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세계에서 처음으로 보편적 복지 국가를 건설했던 나라가 바로 영국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디킨스의 시절보다 훨씬 정교하고 잔혹한 착취의 세상으로 변했으니 그 사회가 어떤 처방을 내놓을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일이다.

그간 영국은 재난과 재앙에 대비하는 것에 관한 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나라였다. 얼마 전에 공개된 극비 문서에 브리스톨 시 당국이 실제 좀비들의 출현에 대비한 프로그램과 예산을 확보해 두고 있다는 보도까지 있었을 정도다. 이 나라에서 유난히 세상에 대한 분노를 담은 좀비 영화가 많이 제작됐다는 사실은 그만큼 경고를 전하는 메신저가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대니 보일도 좀비의 출현과 확산을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과 탐욕이 만들어 낸 분노 바이러스 때문으로 묘사했다.

먼 나라 얘기지만 실제 우리에게 머잖아 닥칠 일을 목도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으니 무조건 참으라며, 분노를 다스리라며 틱낫한 스님의 책 <화(火)>를 권하는 게 능사는 아닐 것이다. 이 가혹한 자본주의 세상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행복은 욕망 분의 성취인데 분자의 크기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으니 분모의 크기를 줄이란 식의 스토아식(stoic) 해법도 본질적인 처방이 못될 것이다.

결국 국경 없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건 정부뿐일 터, 문제는 '어떤' 정부냐 하는 것이다. 뭔지도 모르고 '세계화'(Globalization)에 목숨 걸다 아차 싶어 'Segewha'로 혹세무민하다 IMF 불러 온 YS 정부나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해봤지만 정작 잘 하는 건 하나도 없는 분이 만들고 있는 이 '경이로운' 신자유주의 왕국에서 화를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 끊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분노가 이 땅에서 영국식 폭동으로 재현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시시각각 소식을 전하는 영국의 한 블로그 기사 아래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 하나가 힌트를 준다.

'어린 친구들이여, 약탈은 분명 범죄행위다. 약탈을 하려면 합법적으로 해라. 은행들이 하는 것처럼'

아무런 대비도 없어 그 누구도 감당 못할 그런 일과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마주하기 싫다면 할 일은 딱 하나, 투표 잘 하는 것뿐이다. 배신당할 수도 있고 기대 이하일 수도 있으나 다른 방법이 없잖은가. 그렇다고 바다 건너 어린 애들이나 우리나 불 지르고 약탈하는 식의 반사회적 행위로 해결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김갑수 기자는 라디오 21 전 대표로 열린우리당 당의장 비서실 차장이자 부대변인을 지냈다. 지난 2008년 영국으로 건너가 셰필드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뒤 작년말 귀국했으며, 현재 경희대와 경희사이버대에 출강중이다.



태그:#영국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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