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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페로 가는 고속도로 상에 갑자기 먹구름이 생겼다. 여행이 시작된 지 사나흘로 못돼 아들 셋의 행동에 서서히 불만이 일기 시작했다. 여행에서 동반자 사이의 갈등보다 불행한 일도 없다.
▲ 갑작스럽게 형성된 먹구름 산타페로 가는 고속도로 상에 갑자기 먹구름이 생겼다. 여행이 시작된 지 사나흘로 못돼 아들 셋의 행동에 서서히 불만이 일기 시작했다. 여행에서 동반자 사이의 갈등보다 불행한 일도 없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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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실 알코올 중독이었던 적이 있었다. 1년 반 전쯤인가, 당시에 5개월가량 술에 절어 살았지. 매일 보드카 같은 걸 한 병씩 사들고 집에 갔으니까. 먹고 싶어서 술을 먹는 건 아무리 자주 먹어도 알코올 중독은 아니라고 봐.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병을 집어 든다면 그건 알코올 중독이야."

그랜드캐니언에서 야영할 때, 텐트에 먼저 들어가 잠을 청하던 내 귀에 들어 왔던 병모의 말이다. 텐트 밖 간이식탁에서 같이 술잔을 기울이던 윤의가 병모의 말을 받았다.

"나도 요즘 사실 알코올 중독인지도 몰라. 매일 술을 찾게 되거든."

윤의와 병모는 내가 보기엔 애주가 수준을 넘어섰다. 가톨릭 신자로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는 선일이도 그 자리에서 "술이 처음으로 맛있다"고 했던 것 같다.

'이 놈들 대륙 횡단여행이 아니라 완전히 대륙 이동 술판여행을 벌이게 됐구먼.'

난 속으로 아이들의 건강 걱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행태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술 한 방울도 못하는 나로서는 무엇보다 매일 저녁 술 생각이 솟아오르는, 바로 그 심리를 가늠할 수 없었다. 시대가 젊은 그들을 몹시 즐겁게 혹은 화나게 할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집안에 어떤 크나큰 고민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매일 술병에 손이 가는 걸 이해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요 며칠 달리는 차 안에서나 혹은 술자리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전혀 그런 게 없는 아이들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아들 셋'의 얘기는 거의 다 슬쩍 주워듣거나, 본의 아니게 훔쳐 들은 것이니 솔직한 그들의 흉중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대화는 대략 80%가 '여자'로 귀결되는 얘기였다. 누가 어떻고, 헤어지고, 만나고, 짝사랑하고…. 수많은 여자아이들의 이름이 등장했다, 사라지고, 또 나타났다.

산타페의 유스호스텔에서 한 아이들의 밤중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대략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아버지 오늘 여러 가지로 피곤하실 테니 먼저 잠자리에 드세요. 저희들은 얘기 좀 하고 잘게요"라고 말할 즈음에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얘기 좀 한다는 말은 곧 술을 마시겠다는 뜻이고, 술 마시면 여자 얘기를 할 것이라는 걸.

아이들은 유스호스텔의 마당을 가로질러 나 있는 작은 쉼터 같은 곳에 '대화의 마당'을 폈다. 텐트에서 자게 된 것도 아닌 데다, 흘러나오는 얘기를 전혀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숙소가 먼 거리여서, 이날 밤 실제 어떤 말들이 그들 사이에 오갔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내 생각엔 뻔하다.

'얘들아, 미안하다. 하지만 너희들 얘기는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니겠니.'

미국 서부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산타페의 성당에서 아이들이 성상의 모습을 따라 기도하고 있다. 인생도 그렇지만 여행의 동반자들도 기도하는 심정으로 여행에 임해야 서로의 마음을 살 수 있다.
▲ 기도를 받아 주소서 미국 서부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산타페의 성당에서 아이들이 성상의 모습을 따라 기도하고 있다. 인생도 그렇지만 여행의 동반자들도 기도하는 심정으로 여행에 임해야 서로의 마음을 살 수 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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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횡단 여행은 생생한 수업...아들들이 그 의미 알았으면

피 끓는 젊은 수컷들의 여자 얘기를 나무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대화의 촉매제가 맥주든 도수가 높은 술이든, 음주 자체를 문제 삼을 생각 또한 내겐 없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만 마신다면. 다만 이번 여행에 좀 충실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각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에는 늦잠을 자고, 이동 중에는 틈만 나면 역시 잠에 떨어지는 패턴이 여행 내내 고착될까 신경이 쓰였다. 

여행에 충실하라는 말은, 짐을 잘 챙기거나 이동 때 굼뜨게 움직이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의 기회는 자주 맞기 어렵다. 미국에서 수십 년씩 살아온 한국 교포들도 그렇고, 주류 미국인이라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생업에 쫓기고, 건강이 허락하지 않고, 때로는 경제적으로 형편이 되지 않아 장기간의 대륙 여행을 꿈꾸면서도 정작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아들 셋'의 이번 북미대륙 횡단여행은 이런 점에서 그들 나이에 흔하게 잡을 수 없는 귀중한 기회다. 짧은 시간에 꽤 큰 폭으로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계기는 살면서 그리 자주 오지 않는다. 변화무쌍하고 장쾌한 대륙 구석구석의 풍광들, 다양한 사람들의 면면, 한국과는 사뭇 다른 사회 시스템…. 이 모든 것이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다.

북미대륙 횡단여행은 그래서 일종의 현장실습 수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도 대학교 학과목으로 치면 서너 학기 분량에 해당할 만큼 빡빡한 코스다. 요컨대 생생한 현장실습, 이게 내가 이번 여행을 시작하면서 속으로 은근히 바랐던 바였다.

하지만 위락이 이번 여행의 테마가 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내 심사가 약간 뒤틀어졌다. 물론 처음부터 아이들이 내 의도를 읽고 착착 따라주길 바라는 게 나의 욕심일 수도 있다. 충청도 사람으로서 자부심이 유별난 아들 셋은 그들 특유의 기질을 발휘, 여유만만하게 스스로들 서서히 여행의 궤도에 오를지도 모른다.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경제적으론 빠듯한 여행인 까닭에 내가 아이들의 행태를 조급하게 판단하고 또 그것이 아이들과 불편한 관계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속으로 몇 차례 되뇌었다.

'참아야지, 다 큰 아이들인데 강요하지 말아야지. 같이 여행을 시작하지 않았던 게 아예 나을 뻔한 결과가 되어선 안 되지.'

이제 여행 초반인데 벌써부터 세대 차를 확인하며 갈등을 만든다면 언제 화약고가 터질지 모를 일 아니겠는가.


태그:#갈등, #마찰, #산타페, #여행,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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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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