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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선교 한나라당 간사가  민주당의 비공개 회의 녹취록이 적힌 종이를 들고 읽고 있다.
 6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선교 한나라당 간사가 민주당의 비공개 회의 녹취록이 적힌 종이를 들고 읽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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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4일 국회 문방위.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이 "이것은 분명한 녹취록"이라고 말한 뒤 그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밝힌 '녹취록'은 전날 오전에 있었던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참석자 발언 내용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었다. KBS의 '도청 의혹'과, '녹취록'이 한나라당에 넘겨진 '정치 공작'의 스캔들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KBS의 기이한 대응

이후 이 사건에 대해 KBS는 홍보실, 보도본부, 정치외교부, 경영진 등 대응 주최를 바꿔가면서 의견을 밝혔다. 그 내용은 널리 알려진 대로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이른바 도청행위를 한 적은 없다" "제3자의 도움이 있었음을 부득불 확인해 주겠지만 취재원 보호를 위해 밝히지는 않겠다"는 등 기이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장난의 '해명성 대응'도 '도청 의혹'과 관련된 것에만 집중되었을 뿐, 한나라당으로 건너간 '정치 공작'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설령 KBS의 주장대로 '제3자의 도움'을 얻어서 입수를 했다 치더라도, 어떤 경로를 통해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에게 넘겨졌는지, 그런 '정치 공작'이 왜 저질러졌는지 분명하게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도청 의혹'과 '정치 공작'의 스캔들이 터진 뒤 KBS의 분위기는 홍해가 갈라지듯 극명하게 나뉘어진 모습이다. 한 쪽은 수신료 인상의 약속을 어긴 민주당에 대한 분노와, '도청 의혹'을 부추기는 언론 또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운 경찰이, 마치 왜 그런지를 잘 아는 것처럼, 무슨 수로 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칠 수 있겠느냐며 그냥 뭉개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젊은 기자들, "도청했는가, 한나라당에 넘겨줬는가"를 묻다

6월 30일 민주당 '불법도청 진상조사 특위' 위원장인 천정배 의원이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을 고발하기로 했다고 발언하는 장면을 KBS 방송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다.
 6월 30일 민주당 '불법도청 진상조사 특위' 위원장인 천정배 의원이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을 고발하기로 했다고 발언하는 장면을 KBS 방송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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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쪽은 지금 '도청 의혹'을 받고 있는 KBS의 현 상황을 참담하게 받아 들이면서 진실이 적극적으로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자의 목소리는 취재와 프로그램 제작 현장에서 일반 시민과 직접 부딪치는 젊은 기자, 피디들, 그리고 이들이 주된 구성원인 KBS 새 노조로부터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다.

지난 7월 6일 익명의 어느 KBS 기자가 "도청을 했다고 지목받는 기자 집단의 일원이 되고만, 이 말도 안 되는, 치욕적인 상황"을 공개적으로 한탄했고, 그 뒤 KBS의 젊은 기자, 피디들이 잇따라 자기 이름을 내걸고 공개적으로 "진실을 밝히라"며 KBS 지도부를 향해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젊은 기자들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2000년 이후 입사한 기자 166명이 7월 21일 '김인규 사장-고대영 보도본부장, 모든 것을 걸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 도청 의혹 사건에 대해 지금까지 KBS가 내 놓은 해명은 참으로 옹색함을 넘어 어처구니 없을 정도다.… 이건 정말 말장난에 불과하다.…

지금 KBS에 대한 여론은 그야말로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다.… 공영방송 KBS는 처절하게 무너졌다.… 취재현장에서 "KBS 너희들이 그렇지 뭐, 영혼 없는 기자들아 딴 데 가서 취재하라" 이런 식의 조롱과 비아냥이 들려오고 있다. 심지어 취재현장에서 쫓겨나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사회의 부조리와 비리를 파헤쳐 고발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인 언론사가 정작 자신의 문제는 수사기관의 입에만 의존하겠다는 굴욕적인 작태를 지금 KBS 수뇌부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다. 소인배들이나 할 짓이다.

우리 기자들은 더 이상 이런 불편한 침묵과 굴욕을 참지 못하겠다. 김인규 사장, 그리고 KBS 기자 조직을 책임지는 고대영 보도본부장은 자신들의 직책을 걸고 다음 물음에 떳떳이 답하기를 요구한다.

1. KBS 구성원 중 민주당 대표실을 도청한 사람이 있는가?
2. KBS 구성원 중 민주당 대표실 회의녹취 내용을 한나라당에 건네준 사람이 있는가?
3. 또 민주당 대표실 회의 녹취록 작성에 결정적 도움을 준 제3자가 있다면 누구인지 명백하게 밝혀라.

젊은 피디들 "김인규 사장님, '수사기관' 뒤에 숨지 마세요"

166명의 젊은 기자들이 "더 이상 이런 불편한 침묵과 굴욕을 참지 못하겠다"며 사장을 향해 구체적 요구를 하고 난 얼마 뒤인 7월 25일, 이번에는 공채 29기~35기(2~9년차) 피디 148명이 자기 이름을 걸고 지금의 참담한 심정을 밝혔다.

… 자부심을 내려놓은 지는 오래됐습니다. 현장에서는 가끔 (KBS) 로고도 가립니다. 되도록 KBS 다닌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어떤 수모를 당하고 있는지. 이제는 그 조롱과 비아냥을 언급하는 것조차 식상합니다.

그리곤 도청입니다. 그 무게를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언론사로서 존폐를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단어입니다. 그 두 글자가 지금 우리 앞에 붙어 있습니다. 의혹의 중심에 KBS가 있고 사상 초유라는 경찰의 압수수색까지 봐야 했습니다.… 간결해야 할 언론의 단어가 수식어로 가득합니다. '주장하는 방식의 도청' '제3자의 도움… 밝히지는 않겠다'.…

지난 몇 개월간 사내엔 수신료 광풍이 있었습니다.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말을 아꼈고 애써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취재진들이 사병처럼 동원된다는 이야기에도 귀를 닫았고, 누구들이 민주당사 앞에 무리지어 몰려갈 때도 눈을 감았습니다. 오늘의 참담함이 더욱 뼈저린 이유입니다.

결국 우리의 동료들이 불편한 침묵과 굴욕을 참지 못하겠다며 일갈했습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제작현장 역시 도청의 멍에를 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김인규 사장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더 이상 수사기관 운운하며 숨지 마시고 한번쯤 그 직을 걸고 떳떳하게 답하시기 바랍니다.

KBS 경영진, 동문서답을 하다

이런 젊은 기자, 피디들의 목소리에 대해 KBS 수뇌부는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KBS 경영진 일동'의 이름으로 7월 27일에 나온 성명은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청 의혹'과 관련해서는 "정치부 기자들은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도청은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바 있습니다. 우리 직원들의 말을 경영진이 믿지 않는다면 그게 온당한 일입니까?"라고 되묻기까지 했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도청이 없었다"는 그 말이 진정 무슨 뜻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경찰 수사' 뒤에 숨지 말라고 젊은 기자, 피디들이 외쳤는데도, "이른바 <도청> 의혹과 관련해 사측은 현재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수사에 적극 협조하면서 냉정히 지켜보고 경찰의 수사결과가 발표되는 대로 즉각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분명한 입장을 밝힌 바 있으며 지금도 이를 견지하고 있다"면서 그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면서 KBS 새 노조가 "마치 <도청>이 실재했으며, 경영진이 이를 은폐하고 있는 듯한 언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거나, 새 노조가 "악의적인 설문조사를 강행해 사내 구성원의 대부분이 경영진을 불신하고 있다"면서 새 노조에 화살을 돌렸다.

KBS 경영진의 답변은 며칠 전 젊은 기자, 피디 314명이 제 이름을 걸고 던졌던 질문의 핵심을 이렇게 피해갔다. 젊은 기자들이 질문은 매우 간결했다. KBS 구성원 중에 ▲ 도청한 사람이 있는가 ▲ 회의녹취 내용을 한나라당에 건네준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자들도, 피디들도 "더 이상 수사기관 운운하며 숨지 말고 한번쯤 그 직을 걸고 떳떳하게 답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KBS 경영진 일동'은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KBS 새 노조는 바로 반박했다.

무려 한 달 만에 어렵게 나온 4쪽짜리 경영진의 입장에 기대했던 답변이 없다. "도청하지 않았다", "녹취록을 한나라당에 넘기지 않았다" 이 두 마디가 없다. 이 두 마디면 지금의 위기를 넘을 수 있는데 결국 못하고 있다. 본질은 외면하고 주변만 건드린 오늘 경영진의 입장은 그래서 입장이 아니고 변명이다.

최근의 물난리와 산사태, 그리고 워터게이트(水門) 사건

최근 'KBS 수신료 인상안' 추진과 관련해 민주당 대표실 도청 의혹 사건이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7월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별관 로비에 '도청 의혹'관련 설문조사결과가 실린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노보가 놓여져 있다. 설문조사결과에 따르면, 새노조 조합원들은 KBS 사측이 도청과 관련해 내놓은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이른바 도청 행위를 한 적은 없다", "제3자의 도움이 있었다" 등의 입장에 대해 강한 불신을 나타냈다. 응답자 567명 중 545명(96%)이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최근 'KBS 수신료 인상안' 추진과 관련해 민주당 대표실 도청 의혹 사건이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7월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별관 로비에 '도청 의혹'관련 설문조사결과가 실린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노보가 놓여져 있다. 설문조사결과에 따르면, 새노조 조합원들은 KBS 사측이 도청과 관련해 내놓은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이른바 도청 행위를 한 적은 없다", "제3자의 도움이 있었다" 등의 입장에 대해 강한 불신을 나타냈다. 응답자 567명 중 545명(96%)이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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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의 '도청 의혹'과 '정치 공작'이 전개되는 양상을 보면, 최근의 물난리와 산사태가 연상된다. 가래로 막을 수 있는 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봇물이 터지고, 끝내 산사태를 일으켜 엄청난 재난을 불러오는 양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인다. KBS 경영진은  경찰이 도청과 관련된 구체적 증거, 예컨대 민주당 최고위원회 회의 내용을 몰래 담은 장비를 찾지 못할 경우, 사건이 유야무야 될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오산이다. 경찰이 '수사권 독립'의 일부를 얻어내고도 참으로 무능하여 수사결과가 없는 무능을 스스로 드러냈다손 치자. 그러나 KBS가 이미 고백한 '제3자'의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되고, 그 '제3자'를 통해 입수된 '녹취록'이 어떤 경위를 거쳐 한나라당으로 넘어갔는가 하는 이번 사건의 또 다른 핵심 쟁점인 '정치 공작'의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실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터져 나오게 되어 있다.

도청사건의 원조격인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에서도 그렇게 진실을 감추려 했으나, 결국 수문(水門, 워터게이트)은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중도에 사임하는 산사태로 이어졌다. 역사의 엄혹한 교훈이다.


태그:#정연주, #KBS, #김인규, #워터게이트, #산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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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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