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KBS2 드라마 <공주의 남자>.
 KBS2 드라마 <공주의 남자>.
ⓒ KBS

관련사진보기


수양대군의 딸과 김종서의 아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다는 내용의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수목 오후 09:55~ 방송)가 지난 20일부터 방송되고 있다. 서로 원수지간인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자녀들이 사랑을 했다니, 줄리엣과 로미오의 슬픈 사랑을 연상케 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공주의 남자> 홈페이지에서는 그 둘의 사랑이 야사에 근거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 말이 정말 사실인지에 관해서는 이 시리즈의 다음번 기사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이번 기사에서는 <공주의 남자> 제1부 및 제2부에 나타난 왕실의 결혼과 관련된 당시의 사회분위기에 주목해보자. 

드라마 제1부·제2부에서 김종서(이순재 분)는 행복하지만 고민스러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수양대군(김영철 분)이 자기 딸 이세령(문채원 분)을 김종서의 아들 김승유(박시후 분)와 결혼시키고 싶다고 제안한 직후에, 수양대군의 형인 문종도 자기 딸 경혜공주를 김승유와 혼인시키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왕과 왕의 동생이 동시에 사돈 맺기를 희망했으니, 김종서의 비명은 행복하지만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 왕실과의 사돈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대목에서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왕실과 사돈 맺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런 기회가 오면 덥석 물었겠지'라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그 같은 분위기를 증명할 만한 사료는 상당히 풍부하다.

왕실의 혼인을 국혼(國婚)이라 했다. 국혼은 가례와 길례로 구분되었다. 가례(嘉禮)는 주상이나 왕세자의 결혼, 길례(吉禮)는 왕자나 왕녀(공주·옹주)의 결혼이다. 국혼은 왕실의 어른인 대비·왕대비·대왕대비의 허락으로부터 시작해서, 결혼준비위원회인 가례도감·길례도감의 설치를 거쳐 금혼령과 간택 등의 절차를 거쳐 진행되었다.

금혼령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발포된 것이 지원서 제출명령이었다. 지원서의 명칭은, 왕녀의 배우자를 뽑는 경우는 동자단자(童子單子, 총각 보고서)라 했고, 그 외의 경우는 처녀단자(처녀 보고서)라 했다.

지원서 제출명령에 대한 당시의 반응을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왕실과 사돈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영광입니다!"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저희는 됐습니다!"라며 기피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지원자를 모집했는데도 응모자가 극히 적었다는 사실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헌종대왕 가례의궤>에 따르면, 1837년 제24대 헌종(정조의 증손)의 국혼 때는 지원자가 전국적으로 12명이었다. 1882년 왕세자 이척(훗날의 순종)의 국혼 때는 지원자가 25명이었다.

또 장서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에 소장된 궁중 서류를 소재로 한 김용숙의 연구에 따르면, 제23대 순조(정조의 아들)의 딸인 명온공주의 부마를 선발하는 간택에는 총 17명이 지원했다. 이런 사례들에서 나타나듯이, 국혼 지원자는 대체로 20명 혹은 30명을 넘지 않았다.

수양대군의 딸 이세령(문채원 분).
 수양대군의 딸 이세령(문채원 분).
ⓒ KBS

관련사진보기

'양반들한테만 기회를 줬으니까 지원자가 적었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에 사농공상의 직업별 차별은 법적으로 존재했어도, 양반·평민의 차별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양반·평민의 차별은 관습상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법적으로 규정된 신분상의 차별은 노비 같은 천민에 대한 차별뿐이었다.

헌종 국혼 때의 사례를 보면, 지원 결격 사유는 ▲ 이씨 성을 가진 사람 ▲ 주상·왕대비·대왕대비와 일정한 친족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 ▲ 결손가정의 자녀 ▲ 중병을 앓는 부모를 둔 사람 등이었다. 천민이 아닌 이상, 이런 결격사유만 없으면 누구나 다 지원할 수 있었다.

그처럼 문호가 활짝 열려 있었는데도 지원자가 적었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에서 벗어난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왕실 홈페이지'가 다운될 정도로 신청이 폭주했을 것 같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런 기회 앞에서 의외로 냉랭했다. 국혼에 지원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면 일단 기피하고 보는 게 그들의 분위기였다.

그들은 단지 지원서를 제출하지 않는 소극적 방법으로만 기피한 게 아니었다. 관청에서 '자식을 숨길 경우 형벌을 부과하겠다'면서 지원서 제출을 독려하면 "우리 딸이 너무 아파서 안 된다"느니 "아이의 부모가 중병에 걸렸다"느니 하는 식의 핑계를 댔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혼도 도피수단의 하나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국혼만큼은 피하고 보자는 분위기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렇게 국혼을 기피하다 보니, 그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도 있었다. 인조 1년 윤10월 27일자(1623.12.18) <인조실록>에 따르면, 사대부 가문들이 국혼을 기피하자 한성부(서울시청)에서는 점쟁이들(사료 표현은 '맹인')까지 동원해서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점을 쳐서 처녀를 색출하도록 했다. 점쟁이까지 동원해 처녀를 색출해야 할 정도였으니, 국혼에 대한 민간의 거부감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정서가 상당히 일반적이었다는 점은 어우당 유몽인(1559~1623년)이 편찬한 민담집인 <어우야담>에서도 발견된다. <어우야담>은 민간에서 유행하는 이야기들을 수집한 것이므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참고 자료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야서(野鼠), 즉 멧밭쥐 한 마리가 있었다. 편의상 그냥 '쥐'라고 부르자. 이 쥐는 새끼를 끔찍이 사랑해서, 자기 새끼를 세상에서 가장 높은 종족과 결혼시키고 싶어 했다. 그래서 쥐는 하늘을 찾아가 양가(兩家)의 혼인을 제안했다. 

하늘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구름이 하늘을 가릴 수 있으므로 구름이 하늘보다 높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름을 찾아갔더니 구름의 답변도 의외였다. 바람이 구름을 흩어지게 할 수 있으므로 바람이 구름보다 높다는 것이었다.

바람을 찾아갔더니, 바람은 과천 교외의 돌미륵을 추천했다. 아무리 센 바람도 돌미륵을 엎어뜨릴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계속되는 뜻밖의 답변에 쥐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돌미륵에게서 쥐는 가장 충격적인 대답을 들었다. 돌미륵이 보기에는 쥐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것이었다. 쥐가 땅을 파내면 돌미륵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종족은 하늘도 구름도 바람도 돌미륵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 쥐는 결국 같은 쥐 중에서 새끼의 배우자를 찾기로 했다. 유몽인은 쥐의 선택을 높이 평가하면서 '분수도 모르고 국혼을 하다가는 재앙을 만날 수 있다'는 말로 이 이야기의 메시지를 정리했다.

김종서의 아들 김승유(박시후 분).
 김종서의 아들 김승유(박시후 분).
ⓒ KBS

관련사진보기

왕실과의 결혼, '사양합니다'

쥐의 이야기를 통해 국혼을 경계하는 민담이 널리 유포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또 위에 소개한 여러 가지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왕실과의 혼인을 극도로 기피했다. 우리의 상식과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그럼, 그들은 왜 그랬을까?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왜 거부한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결코 좋은 기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첫째,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상·왕세자·왕자의 배우자를 뽑는 경우에 지원자는 옷을 새로 맞춰야 했을 뿐만 아니라 몸종·유모·미용사에다가 가마까지 준비해야 했다. 이 정도면 웬만한 집안에서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혜경궁 홍씨(사도세자의 부인)의 회고록인 <한중록>에 따르면, 홍씨가 국혼에 지원하는 바람에 언니의 혼수비용으로 모아둔 재물을 썼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별도로 빚까지 졌다고 한다. 명문 양반가에게도 이처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면, 일반 서민들에게는 오죽했으랴. 합격하리란 보장도 없이 빚까지 내면서 거금을 들일 사람들이 몇이나 됐을까.

둘째, 들러리가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최종 합격자를 미리 내정해 놓은 상태에서 형식적으로만 지원자를 공모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웬만한 지원자들은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들러리를 서는 것도 아니고, 돈까지 들이면서 들러리를 서야 했으니, 어느 누가 좋아했겠는가.

셋째, 위험했기 때문이다. 왕실의 사돈이 됐다가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경우가 흔했던지라, 웬만한 집안에서는 왕실과의 혼인을 죽음보다 더 싫어했다. 물론 왕실과의 혼인을 희망한 집안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가문들은 정치적 풍파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만한 힘이 있는 집안들이었다.

그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집안이 몇이나 됐을까. 분수도 모르고 국혼을 했다가는 재앙을 만날 수 있다는 <어우야담>의 경고가 갖고 있는 의미를 조선시대 사람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왕실은 결혼 기피대상 1순위였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왕실과 사돈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든 잡으려 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들은 형벌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것을 피하려 했다. 웬만한 양반 가문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임금의 배우자나 며느리가 되고 싶어 하고 임금의 사위가 되고 싶어 하는 드라마 속의 인물들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표하지 못한다.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한 특권층 인물들의 정서를 대표할 뿐이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Youtube(시사와 역사 채널).kimjongsung.com. 제15회 임종국상..저서: 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 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 여자 등.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