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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이라 생각하며, 창조론, 예수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와 육체 부활을 믿는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기독교 보수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목사다. 요즘 이런 목사는 지탄의 대상이고, 다원주의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한다.

하지만 내 신분과 사상과 신념을 밝히는 이유는 지난 23일 노르웨이에서 발생한 연쇄테러 때문이다. 테러 직후 서구 언론들은 검은 머리의 이슬람 극단주의자와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추측했지만 범인은 노랑머리의 노르웨이 태생으로 기독교 근본주의자이자 극우민족주의자였다.

언론들에 따르면, 테러범 안드레스 베링 브레이비크(32)의 어릴 적 친한 동무가 이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범행 전 인터넷에 올린 글, '2083 : 유럽 독립 선언'에서 "십자군전쟁 시작하기 전에 유럽 기독교 문명을 파괴하는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없애야 (줄임) 2083은 이슬람 몰아내는 해다. 대화는 끝났다. 무장항쟁이다. (줄임) 1999년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이 무슬림을 구하기 위해 기독교인을 학살한 것"이라고 썼다.

브레이비크는 70여 명을 죽여놓고도, "잔인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고 강변했다. 25일 오슬로 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문화적 마르크시즘'으로부터 노르웨이와 서유럽 사회를 구하기 위해 테러를 저질렀다", "노르웨이에 무슬림을 대거 유입하는 노동당에 죄가 있다. 노동당이 반역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이슬람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증오를 드러냈다.

노르웨이 경찰이 공식 발표한 사망자 수는 수도 오슬로 인근 우토야섬에서 발생한 청소년 캠프 총기테러에서 85명, 이 사건 발생 두 시간 전쯤 발생한 오슬로의 정부청사 폭탄테러에서 7명 등 모두 92명이다.
▲ 연기가 피어오르는 노르웨이 정부청사 노르웨이 경찰이 공식 발표한 사망자 수는 수도 오슬로 인근 우토야섬에서 발생한 청소년 캠프 총기테러에서 85명, 이 사건 발생 두 시간 전쯤 발생한 오슬로의 정부청사 폭탄테러에서 7명 등 모두 92명이다.
ⓒ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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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배반한 2천 년 기독교의 역사

브레이비크 발언을 듣고, 2000년 역사 동안 말로는 사랑을 강조하지만 행동은 잔혹한 행위를 일삼았다는 기독교의 잔혹한 역사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솔직히 그런 역사를 신학교에서는 잘 가르치지 않는다. 사랑과 생명의 종교가 타종교와 타인종에 대해 저지른 잔혹함 범죄를 떳떳하게 가르치기에는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가르치지 않는다고 범죄를 덮을 수는 없다. 대표적인 것이 브레이비크가 말했던 십자군전쟁이다. 십자군전쟁은 11세기~13세기 중세 서유럽 로마 가톨릭이 중동 이슬람 국가에 대항하여 예루살렘을 탈환하려 한 군사원정이다.

십자군은 가는 곳마다 "몇몇 어린아이들은 나무 말뚝에 꽂아 불에 굽고", "어린아이들 팔다리를 찢어 죽였다". 한마디로 신의 이름을 빌어 잔혹함과 만행을 저질렀다.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무슬림과 유대교인 14만 명을 학살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2001년 9월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하면서 "이번 전쟁은 새로운 종류의 악(Evil)에 대항하는 투쟁이며, 테러를 응징하는 십자군전쟁"이라고 말했다. 중세 십자군과 조지 부시, 브레이비크는 놀라운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슬람은 무조건 적으로 죽여도 된다는 논리다. 그것도 하나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지른 살육과 침략

기독교 역사에서 십자군만 잔혹함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1532년 11월 16일은 잉카제국이 에스파냐(스페인)에 의해 역사 속에서 사라진 날이다. 1532년 11월 16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보자. 전날 스페인 탐험가 프란체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병력 160여 명이 안데스 고원을 넘어와 잉카 국왕 아타우알파에게 만남을 요구할 때 아타우알파는 거리낌 없이 응했다.

아타우알파가 피사로를 만나러 가면서 손에 든 무기는 도끼와 돌멩이였다. 하지만 피사로는 총과 대포로 무장했다. 그 옛날 다윗왕이 돌멩이로 골리앗을 죽일 수 있었지만 아타우알파가 든 돌멩이는 피사로가 손에 쥔 총과 대포를 절대 이길 수 없었고, 아타우알파는 잉카제국 마지막 왕이 되어 버렸다. 피사로가 아타우알파를 체포한 죄목은 '십자가와 성경 모독죄'였다.

그런데 피사로 진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잉카제국은 황금제국이었다.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에게 황금을 약속했고, 피사로는 황금을 가져다주면 살려준다고 약속했다. 아타우알파의 충성스러운 병사들은 아타우알파 형 우아스카르가 스페인과 내통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암살했다. 피사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타우알파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내세워 대역죄와 이교도라는 이유로 화형에 처했다. 

피사로의 목적은 황금이었지만 그는 성경과 십자가 이름으로 그 탐욕을 채워가면서 잉카제국의 왕과 인민을 잔혹하게 죽였다. 죄 없는 자를 성경 모독죄로 죽인 것에 대한 신의 심판인지 몰라도 피사로 역시 1541년 6월 26일 리마에 있는 자기 집에서 피살된다. 분명히 말하지만 진짜 죄는 아타우알파와 잉카제국 인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십자가 이름으로 잔혹하게 죽인 피사로와 피로 물든 황금으로 자기 배를 채운 스페인에 있었다.

김홍도 목사(왼쪽)와 조용기 목사(오른쪽)
 김홍도 목사(왼쪽)와 조용기 목사(오른쪽)
ⓒ 권우성/뉴스엔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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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주의를 이식받은 한국 개신교

그리고 그 만행은 아메리칸 인디언과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로 대상을 바꾸어 이어졌다. 호주 원주민인 '애버리지니'는 1788년 백인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드넓은 호주 대륙에서 100만 명이나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백인들은 그들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거기에도 기독교가 있었다.

십자가는 생명과 사랑, 희생의 상징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를 잔혹함으로 만들어 버렸다. 문제는 이것이 19세기 서구제국주의와 20세기 기독교 근본주의가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기독교 근본주의 신학을 이어받은 한국교회도 별다르지 않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는 3월 12일 일본대지진 직후 인터넷 신문인 <뉴스미션>과 한 인터뷰에서 "일본 국민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가기 때문에 (이번 지진은)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고, 강남교회 김성광 목사도 "일본이 보통 나라와 달리 세계에서 제일 교만하고, 우상과 귀신이 많은 나라인데, (이번 지진을 통해) 일본이 체질 개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지진으로 목숨을 잃었는데도 이들에게는 애통함이 없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지난 2004년 12월 26일 쓰나미 때 "8만5천 명이나 사망한 인도네시아 아체라는 곳은 2/3가 무슬림 교도들이고 반란군에 의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했고 학살당한 곳이라"고 했고, "3~4만 명이 죽은 인도의 첸나라는 곳은 힌두교도들이 창궐한 곳인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고 예배당이 불탔다"고 했다.

증오와 정죄밖에 없다. 사랑과 생명은 온데간데없다. 신약시대 하나님은 종교의 이름으로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가 흰두교, 이슬람, 불교라는 이유로 심판받지 않는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목사들 입에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앙을 받았다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이슬람이 기독교를 학살했다고 말한다.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슬람이 기독교도를 학살했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증오와 진보사상에 대한 증오만 있다. 이것은 성경 가르침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왜 증오만 있는가. 기독교 진리는 결코 나와 다른 종교, 다른 사상, 다른 인종, 다른 민족을 정죄하지 않는다. 정죄하면 그는 기독교 진리를 신봉하는 자가 아니다. 성경은 말한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 때문에 희생당한 역사 속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그리고 노르웨이 인민들과 유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죽임이 아니라 살림누리가 이 땅이 임하기를. 기도한다.

덧붙이는 글 | 다음뷰에 실립니다



태그:#노르웨이, #기독교, #근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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