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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주가 50도까지도 치솟는 한 여름 불모의 사막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피로감, 나아가 일종의 절망감 같은 걸 불러 온다.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네바다 등 3개 주가 만나는 이른바 트라이 스테이트(Tri-State) 지역의 사막 모습.
▲ 징그런 사막 수은주가 50도까지도 치솟는 한 여름 불모의 사막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피로감, 나아가 일종의 절망감 같은 걸 불러 온다.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네바다 등 3개 주가 만나는 이른바 트라이 스테이트(Tri-State) 지역의 사막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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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까지 여행 코스는 이미 확정을 해둔 터였다. 코스를 잡으면서 감안했던 주요 포인트는 자연과 도시를 적절하게 버무리는 거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해 그랜드캐년, 산타페, 덴버, 드모인, 나이아가라 폭포, 보스턴, 워싱턴 DC를 경유해 뉴욕에 일단 횡단의 종지부를 찍는 거였다. 아들 친구 둘은 거기서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귀국한다. 아들과 나는 다시 갔던 길과는 다른 코스를 택해 서부로 돌아갈 것이다. 돌아올 때 경유할 곳들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

서쪽에서 출발, 동쪽으로 향하는 여름철 대륙 횡단 여행은 대략 오후 2~3시까지는 해를 안고 가야 한다. 해를 정면에 두더라도, 아침 시간에는 그래도 덜 더운 편이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해 첫 경유지인 그랜드캐년까지 가자면, 아침을 지나 한낮에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를 통과해야만 한다.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는 미국 남서부 특유의 사막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살인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곳이라는 뜻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랜드캐년까지는 15번 주간 고속도로를 타다가 40번 주간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가는 게 가장 빠르다. 캘리포니아의 바스토우(Barstow)라는 도시에서 40번으로 옮겨 타는데, 바로 이 지점이 40번 주간 고속도로의 서쪽 시점이다. 주간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는 말 그대로 주들을 관통하는 고속도로이다.

40번 고속도로가 막 시작되는 지점에 녹색 바탕에 주간 고속도로를 가리키는 특유의 왕관 문양이 들어 있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노스 캐롤라이나, 윌밍턴 2555 마일'이라고 쓰여 있다. 이 길을 끝까지 타고 가면 대서양에 접한 윌밍턴이라는 도시가 나온다는 말이다. 4000km가 넘는 만만치 않은 거리이다. 하루 1000km씩 달려도 만 4일 차를 몰아야 한다.

"우와, 여기는 다 이런 가 봐요."

그랜드캐년의 남쪽 입구 도시인 플래그스태프가 멀지 않은 곳의 하늘이 갑자기 형성된 먹구름으로 덮혔다. 시커먼 구름으로 인해 배경의 산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반면, 강한 햇빛이 내리 쬐는 바로 앞의 사막은 대지에서 반사된 빛으로 주변이 환하다. 고원 사막 지대는 날씨가 언제 어떻게 변덕을 부릴지 모르는 곳이기도 하다.
▲ 변덕스런 사막 그랜드캐년의 남쪽 입구 도시인 플래그스태프가 멀지 않은 곳의 하늘이 갑자기 형성된 먹구름으로 덮혔다. 시커먼 구름으로 인해 배경의 산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반면, 강한 햇빛이 내리 쬐는 바로 앞의 사막은 대지에서 반사된 빛으로 주변이 환하다. 고원 사막 지대는 날씨가 언제 어떻게 변덕을 부릴지 모르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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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온 아들 친구 둘이 혀를 내두른다. 헐벗은 대지, 풀 한 포기 없는 산들이 험상궂게 여기 저기 솟아 있다.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가 맞닿아 있는 부분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남쪽 말단에 해당한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애팔래치안, 로키 산맥과 함께 북미대륙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3대 산맥 가운데 하나다. 그 가운데 맨 서쪽, 태평양과 가까운 쪽에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있다.

여름철 산천초목이 푸른 한국에서 자란 아들 셋에게 미국 서부 사막은 말 그대로 버려진 땅, 몹쓸 땅이다. 병모가 그런다.

"아프가니스탄 같은 데서 전쟁하는 군인들은 정말 더위에 죽어나겠어요."

맞는 말이다. 미국 남서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사막과 비슷하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파병을 앞두고 유사한 훈련을 이 곳 서부에서 받는다는 얘기도 얼핏 들었다. 여름철에는 온도가 섭씨 50도까지도 오르는데, 우리가 통과할 때는 45도쯤 된다는 예보가 있었다.

애리조나 킹맨의 월마트 주차장. 이글거리는 날씨에 누군가 뿌려 놓은 물 자국 위에 비둘기가 몸을 대고 있다. 사람이 가도 도망가지 않을 정도로 비둘기들도 더위에 지쳐 있었다. 미국 남서부 사막 지역은 여름 불볕 더위의 공포를 실감케 하는 곳이다.
▲ 헉헉대는 비둘기 애리조나 킹맨의 월마트 주차장. 이글거리는 날씨에 누군가 뿌려 놓은 물 자국 위에 비둘기가 몸을 대고 있다. 사람이 가도 도망가지 않을 정도로 비둘기들도 더위에 지쳐 있었다. 미국 남서부 사막 지역은 여름 불볕 더위의 공포를 실감케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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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더위를 에어컨도 켜지 않고 우리는 뚫어야 했다. 많지는 않지만 오르막길도 심심치 않게 있었는데, 요컨대 에어컨을 못 켜는 게 아니라 켤 수 없었다. 적재 중량 기준을 훌쩍 넘어선 배기량 1500cc의 차를 에어컨을 켜고 몬다는 것은 엔진 과열을 재촉하는 길이다. 사방 수십 km, 눈길 닿는 곳 어디서도 그늘 한 점 찾기 어려운 사막에서 차가 서버린다면 그건 차는 둘째치고 우리 스스로 탈진을 자초하는 행위였다.

졸지에 낡은 내 중고 자동차는 컨버터블 비슷하게 돼 버렸다. 자동차 지붕이 있어서 그렇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넷이서 오픈카를 타고 가는 셈이 된 것이다.

"아버지가 얘기하면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뒷자리에 탄 아들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했다. 시끄러운 주행 소음에 맞바람이 사정없이 정면에서 때려대는 통에 귀가 멍멍, 얼굴이 얼얼하다고 했다. 윤의는 아예 웃통을 벗어 제낀다. 본격적인 더위와 싸움이 시작됐던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접경에서도 대략 6시간은 더 가야 그랜드캐년이다.

출발 때부터 우리 네 명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애리조나로 넘어와 선글라스를 잠깐 벗었던 윤의가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른다.

"어휴~, 미쳐버릴 것 같다. 안경을 벗으니까, 눈보다 마음이 더 고통스러워."

한때 서울에서는 선글라스가 멋으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미국 서부에서 선글라스는 필수 건강 휴대용품이다. 강한 햇살에 녹아 있는 자외선을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 받아내겠다는 말은 일찍 눈을 버리게 하고 싶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이토록 햇빛과 눈부심이 강하다 보니 선글라스를 쓰면 사실 심적으로 상당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을 미쳐 버릴 게 할 것 같은 살인적인 더위와 햇빛을 뚫고서, 오후 6시가 다 돼서 그랜드캐년의 캠핑 사이트에 도착했다. 아들 셋은 생전 처음 몸으로 겪은 이국적인 풍광과 더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짜릿함을 느끼기 보다는 몸서리를 쳐댔다. "여기에서 어떻게들 사는지 모르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진절머리를 냈다. 지옥일망정 난생 처음의 경험이라면 무엇이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나와는 적잖게 차이가 있었다.

그랜드캐년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있는 아들과 친구들. 하나 같이 텐트치는 솜씨가 엉성해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 엉성한 텐트 그랜드캐년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있는 아들과 친구들. 하나 같이 텐트치는 솜씨가 엉성해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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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셋은 엉성한 솜씨로 내 지시에 따라 텐트 2개를 쳤다. 도시인 특유의 피로 모세혈관까지 채워진 이십 대 초반의 아들 셋은 캠핑을 낯설어 했다. 그래도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 하늘을 몇 번이고 쳐다보면서 감탄을 토해내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저기 저게 우리가 속해 있는 은하수이지?"
"야, 정말 별이 많다."

어른 덩치의 아들 셋은 마치 초등학생 보이스카우트처럼 머리 위로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얘기를 이어갔다. 나는 운전으로 종일 피곤했고, 긴장했던 탓에 약 10미터 간격으로 쳐 진 2개의 텐트 가운데 한쪽에 먼저 기어들어갔다.

아들 셋은 내가 텐트로 사라진 뒤 숨겨온 술을 꺼내 마시더니, 저희들끼리 텐트 안으로 들어가 연방 낄낄대며 쉬지 않고 무슨 얘기를 해댔다. 사위가 너무 조용해서 10미터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잠들기 전, 아들 셋이 나누는 얘기가 절로 귀가로 흘러 들었다. 가만 보니 '걸'로 시작해서 '걸'로 끝나는 피 끓는 젊은 수컷들의 그렇고 그런 얘기였다.

"자식들, 등록금 문제나 크레인에 올라가서 농성하는 저희 엄마 또래 김진숙씨 얘기는 전혀 없네."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돈 계산을 했다. 기름값 87달러, 점심 피자 15달러, 라면 5달러. 샤워 두 사람 4달러.

"음, 양호하군. 샤워 비용만 빼면."

덧붙이는 글 | 다음 카페 cafe.daum.net/talkus 에도 싣습니다.



태그:#아들 셋, #북미대륙, #횡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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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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