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즐거운 여름 보내고 계신가요? 요즘 대형 마트에선 매미 울음소리를 틀어놓고 수박을 팔더군요. 개인적으로 수박을 그다지 안 좋아하기 때문에 잘 먹을 일이 없었는데, 요즘 과일 값이 엄청 비싸져서 수박 같은 경우는 2만원을 호가하니 여름에 실컷 먹던 수박이란 말은 옛말 같더군요.

 

여러분들은 수박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시원함, 여름, 휴가…. 제게 수박은 어느 여름 일요일 오후, 친구네 집에서 같이 숙제하고 오던 날을 떠오르게 합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여름 같아요. 친구네 집에서 깔깔거리며 함께 웃고 떠들고 숙제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보니 곧 비가 내릴 것처럼 하늘이 거뭇거뭇하더군요.

 

친구가 얼른 우산을 챙겨줘서 그걸 들고 학교 근처까지 왔을 때 비가 후두둑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산을 폈는데 좀 더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뭔가 요란법석의 소리가 나면서 우산 위로 이상한 것들이 와라락 쏟아졌고, 급기야는 저의 맨팔 위로 그 뭔가가 수도 없이 따끔거리며 떨어졌어요.

 

맨팔과 다리에 그것들이 사정없이 내려치는 통에 아파죽겠고, 남자애들이 장난으로 쏘던 땅콩탄에 맞았을 때처럼 너무나 따가워서 연신 '아야, 아야' 하며 빗물이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건너고 집으로 왔죠.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얼음덩어리들이 우박이란 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알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께서는 배 고프겠다 하시며 밥을 차려주셨는데 좀 색다른 반찬이 하나 나왔었어요. 하얀 색깔에 꼭 무나물 볶음 같은 그런 맛이 나는 것이었죠. 너무 맛있어서 그날 그 반찬을 한 두어 번 더 담아 달라 해서 먹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건 제 어린 시절 처음 맛본 여름날의 별미 반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건 수박나물이었죠.

 

 

그 후로 또 다시 수박나물을 먹을 기회는 없었어요. 수박껍질을 깎아내고 쫑쫑 썰어야하는 손이 많이 가는 그 음식을 하시기엔 어머니는 너무 바쁘셨으니까요.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맛이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어요. 특히 여름 오후에 비가 막 쏟아지면 자연스레 그 여름날의 우박을 피해 우산을 꼭 잡고 집으로 뛰어가던 그 기억, 그리고 주방에서 수박 나물을 만들고 계셨던 어머니의 모습, 투명한 접시에 그득히 담겨있던 수박나물의 연둣빛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수박나물의 빛깔은 학교 앞 분수대에 비친 나무의 연초록빛을 떠올리게도 했고, 비오는 날 손등의 피부처럼 투명하고 맑기도 했어요. 그리고 한 입 입 안에 넣었을 땐 꼬들꼬들한 게 꽤 감칠맛이 있어서, 이제는 너무나 그립고 그리운 음식이 되었습니다. 뭔가 특별한 양념이 들어간 것 같진 않았고, 그저 무나물을 볶은 건가하고 먹었는데 그것보다 훨씬 맛있어서 한참을 먹었던 기억, 아버지께서 막걸리를 꺼내시더니 수박나물을 안주삼아 함께 드시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어허, 비가 오니까 막걸리 맛이 더 좋다."

 

그렇게 수박나물과 함께 한여름날의 풍경은 제 기억 속에 잔잔한 색감의 사진처럼 남아있습니다. 한참 젊던 어머니,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이다 크길 기다리셨단 듯이 이후로는 급격히 쇠잔해지고, 야유회가 끝난 여름 새벽의 모닥불이 스러져가듯이 그렇게 늙어가셨습니다. 최근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어머니는 더없이 삶에 대한 갈망이 강해지셨습니다. 그건 도전과 용기로 패배를 꺾으려는 젊은이의 열정이 아니라, 말년에 대한 준비를 더 적극적으로 하는 과정이란 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족과도 더 많은 시간을 가지려고 애쓰고, 전에 없이 보고 싶다는 전화도 자주 하십니다. 외할머니가 자식에 대한 지극 정성을 쏟느라 평생 고생만 하고 가신 걸 보면서, 당신은 절대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하시며 자식들에겐 다정한 말 한 마디 안 하시던 어머니도 이젠 변화의 과정을 겪고 계십니다. 그건 세월이 가르쳐 준 교훈이고 다음 생을 위해 지금을 준비한다는 마음가짐이기도 한 것입니다.

 

"너희가 이제 부모랑 살 날도 길어야 10년, 20년이다. 남은 삶은 서로 자주 얼굴보고 그러고 살자" 하시며 신신당부도 잊지 않으십니다. 좋은 부모님 만나서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었고 지금도 그 추억에 행복해하는 제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것이고, 그 추억이란 것도 그저 주위의 공기와 사람이 자연스레 녹아들어 공통의 감정에 들 수 있을 때 더할 나위 없이 값어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추억은 결국 평생에 걸쳐 그립고 애틋한 향기를 내는 것이겠지요.

 

수박나물을 만들어 먹는 여름이 올 때마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입니다. 우리네 삶이 길어야 80년입니다. 그리고 그 삶에서 부귀영화, 명예가 전부가 아니라 가족의 따뜻했던 한 시절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추억만 남아있어도 그 삶은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간 잘 안 먹던 수박 한 통 사서 화채도 하고, 곱게 손질해서 나물도 만들어 봤습니다. 아주 오래전 그때, 소금이랑 다진 마늘 넣고 수박나물을 볶으시던 어머니처럼 저도 그렇게 삶을 살고, 추억을 먹고, 그리고 늙어가겠지요.


태그:#수박나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