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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남한산성으로 가을소풍을 갔을 때 찍은 사진, 키 차이도 많이 났었는데 이젠 거의 비슷하다. 내가 크질 못했다.
▲ 그 친구(우)와 나(좌) 중학교 2학년, 남한산성으로 가을소풍을 갔을 때 찍은 사진, 키 차이도 많이 났었는데 이젠 거의 비슷하다. 내가 크질 못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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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를 만난 것은 서울 변두리 지역에 있는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변두리' 혹은 '가장자리'는 중심부와 그리 멀지 않기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변두리에서도 또 다른 중심부는 있기 마련이고, 그 친구와 내가 있던 곳은 변두리 중에서도 또 변두리였다. 나와 그 친구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남들보다 약간 공부를 잘한다는 것뿐이었다. 그 사실도 곧 '뺑뺑이'로 이른바 강남 8학군에 배정되면서 허구로 밝혀지긴 했지만, 지긋지긋한 가난이라는 공통점이 그와 나를 친구로 묶어주었다.

고등학교를 각기 다른 학교로 배정받았고, 주고 받던 편지도 뜸해질 무렵, 죽음을 암시하는 편지가 왔다. 편지지에 쓰인 주소를 들고 찾아간 말죽거리에서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죽었는가 싶었다.

"공동목회 하자" 약속했지만, 건강과 경제 문제로 멀어진 친구

그 친구는 이렇게 곱게 나이들어가고 있다. 그의 직함이 너무 많아서 다 소개할 수가 없다. 요즘 그는 8월 말 제주에서 열리는 제5차 간토(관동)조선인 학살 국제 심포지움 준비로 바쁘다.
▲ 김종수 목사 그 친구는 이렇게 곱게 나이들어가고 있다. 그의 직함이 너무 많아서 다 소개할 수가 없다. 요즘 그는 8월 말 제주에서 열리는 제5차 간토(관동)조선인 학살 국제 심포지움 준비로 바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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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를 대학 면접 보는 날 만났다. 둘은 씽긋 웃으며 합격을 예견했다. 중학교 시절 장난하는 말로 "우리 이 다음에 같은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동목회하자!"라는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친구는 대학을 오기 전부터 공장 노동자로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고, 이미 사회운동에 깊이 참여하고 있었다. 우리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어릴 적 약속대로 '공동목회'에 준하는 일을 함께 시작했다.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지역 노동자의 자녀를 위한 공부방과 놀이방을 열었다. 당시, 그 공부방은 전국에서 가장 활성화된 공부방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교육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회비를 받았기에 한정된 후원구조로는 한 명이 늘어날 때마다 적자폭도 늘어났다.

그렇게 몇 년을 버티다가 결국 경제적인 문제와 건강 문제가 겹치면서 나는 그곳에서 뛰쳐나왔고, 그 친구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 일을 계속 이어갔다. 친구는 지금 대안학교 '아힘나'를 통해서 다양한 일들을 펼쳐나가고 있다.

그 다양한 일들이 펼쳐지는 동안 서먹한 관계가 유지되었고, 그 서먹한 관계가 어느 정도 정상화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건강은 그리 오래지 않아 회복됐지만, 경제적으로 IMF 직격탄까지 맞아 이 문제가 꽤 오랜 시간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런 나보다도 아내의 마음고생이 심했던 터였다. 아내는 그 친구를 만난다고만 하면 경계를 했다. 절대로 그 친구와 일하면 안 된다고 다짐을 받곤 했었다. 거의 15년이 지나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서로의 입장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각자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각기 자기의 분야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지난 4월 홍대에서 열린 한일평화콘서트, 그 친구는 늘 일을 벌인다.
▲ 한일평화콘서트 지난 4월 홍대에서 열린 한일평화콘서트, 그 친구는 늘 일을 벌인다.
ⓒ 아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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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돈 안 되는 일 그만해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

그와 만나면서 그동안 그가 해왔던 일들의 면면을 알게 되었다. 내가 떠나고 나서도 성남시에서 몇 년을 더 악전고투했으며, 늘어나는 빚을 견디지 못해 돌파구로 찾은 것이 안성이었고, 새터민들을 위한 학교를 시작으로 대안학교 아힘나(아이들의 힘으로 세우는 나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들을 해왔다. 더불어 일본의 대안학교와 교류하던 중 1923년 간토(관동) 대진재와 관련된 조선인학살 소식을 접했고 이후 '1923년 간토 조선인대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한 한일시민모임'을 구성하여 올해로 5년째 그 일에 매진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 친구와 결별한 후, 나는 개인적으로 안정된 삶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후에도 그 친구는 여전히 자신을 돌보는 삶을 살지 않았던 것이다. 40대 후반을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청년의 삶을 고집하고 있었다.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희생된 이들의 묘비를 방문했다.
▲ 간토대지진 희생자 묘비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희생된 이들의 묘비를 방문했다.
ⓒ 아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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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제주도에서 제5차 간토 조선인학살규명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을 하게 되었다며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와 함께 그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2박 3일간의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눈이 좋지 않아 시력이 약했던 그는 녹내장이 심하게 전이되어 자칫하면 실명을 할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제 몸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걸핏하면 잊어버리길 잘하는 친구가 안압을 조절하는 약을 챙겨 먹는 것을 보니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은 듯했다. 그날 밤 나는 심각하게 말했다.

"야, 이젠 너를 위해서 살아도 아무도 욕할 사람 없어. 제발, 돈 안 되는 일만 찾아다니면서 하지 말고 너만 위해서 살아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야. 남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고."
"하는 일마다 후원 받아서 하는 일이고, 후원도 못 받으면 손해 보는 일이네?"
"그래도 여태껏 잘 살았잖아."
"하긴, 돈 벌자고 악착같이 살아온 나나, 만날 퍼주면서 살아온 너나 결산해 보니 별 차이 없다."

대학을 졸업한 지 25년 가까이 되었는데, 그 친구는 여전히 청년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때론 그 삶의 방식이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분야에서 그만큼 일했으면서도 여전히 힘든 경제생활은 또 무엇이며, 시력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대로 치료도 하지 못하면서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전력을 다하는 친구.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하필이면 그 친구여야만 하는 것일까.

제주도에 함께 간 일로 상기가 된 친구는 기왕 그 일을 도와주려면 제대로 도와달라며 관동대지진과 관련된 자료를 한아름 사무실로 가져왔다. 바빠서 공부하면서까지 할 수가 없다는 말에도 싱글벙글 오랜만에 함께 일하니 좋다고 한다. 내가 졌다. 내가 졌으니 응원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번 일 끝나면 나는 진지하게 그 친구에게 권할 것이다. 이제 너만 위해서 살아도 충분하다고.



태그:#친구, #간토대지진, #김종수,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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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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