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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6일 사망한 탤런트 고 박주아씨
 2011년 5월 16일 사망한 탤런트 고 박주아씨
ⓒ 한국환자단체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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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3월 28일, 미국 스리마일 아일랜드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소한' 사고가 발생했다. 원자로 융해를 막기 위한 냉각수 필터 '폴리셔'가 고장난 것이다. 이는 흔히 일어나는 사고였다. 발전소에는 이에 대비한 '비상 냉각 시스템'이 이미 구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우연히' 비상 냉각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냉각 시스템 작동 안 함' 경고등이 켜졌다. 하지만 경고등은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수리 중' 팻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안전장치인 압력조절밸브마저 '하필' 고장 나 있었다. 미국 원자력 발전 사상 최대의 사고는 이렇듯 사소한 우연의 합작으로 일어났다.

그로부터 32년이 흐른 2011년, '우연의 합작'이 또 다시 일어났다. 이번엔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다.

2008년 방영한 SBS 드라마 <온에어>를 본 시청자라면 극중 '영은'의 극성맞은 어머니 '박향자'를 기억할 것이다. 잘 모르겠다면, 2011년 MBC 일일연속극 <남자를 믿었네>의 '선우 할머니'도 있다. 중요한 것은 영은 어머니, 선우 할머니의 정 많은 얼굴을 더 이상 안방극장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2011년 5월 16일,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어머니, 할머니가 될 수 없게 됐다.

2011년 5월 16일 사망한 탤런트 박주아씨는 생전에 신우암 초기 판정을 받았다. 담당의사는 그녀에게 '로봇수술'을 권유했다. 2011년 4월 18일, 수술을 받은 직후 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다음 날 급히 진단한 결과 십이지장 천공에 의한 복막염(수술 도중 십이지장에 구멍이 뚫려 염증이 생긴 상태)으로 밝혀졌다.

장천공이 의심될 때에는 즉시 진단하고 응급수술을 실시해야 한다. 그러나 박주아씨의 응급수술은 6시간이나 지체된 뒤에야 이뤄졌다. 3주에 걸친 우연의 레이스의 시작이었다.

스리마일 원전사고(위)와 박주아씨 사망사고(아래)는 과정적으로 유사하다.
 스리마일 원전사고(위)와 박주아씨 사망사고(아래)는 과정적으로 유사하다.
ⓒ 한국환자단체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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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산소호흡기 튜브 관리 소홀로 뇌사상태에

5월 11일, 중환자실의 감염 관리 소홀로 박주아씨는 슈퍼박테리아의 일종인 '감염성 반코마이신 내성 장내구균(VRE)'에 감염됐다. 다음 날, 그녀는 1인 무균실로 옮겨졌다. 이틀 뒤 5월 14일엔 박주아씨의 호흡을 책임지던 산소호흡기 튜브가 '우연히' 빠져 있었다. 당시 박주아씨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100% 기계호흡에 의존하고 있었다. 의료진은 튜브가 빠진 것을 발견하고 다시 삽입했지만 '공교롭게도' 이미 5분 이상 시간이 지체된 뒤였다.

결과는 뇌사 상태였다. 의료진은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지만 '하필' 시술 중 박주아씨의 갈비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부러진 갈비뼈는 폐에 박혔고 그녀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결국 이틀 뒤, 박주아씨는 사망했다.

박주아씨의 산소호흡기 튜브가 빠졌던 날, 간호일지에는 '5월 13일 23시 38분 인공기도를 관리'했으며, '5월 14일 0시 40분에 인공기도 호흡기 튜브가 빠진 걸 간호사가 발견'했다고 적혀 있다. 마지막 호흡기 체크 후 튜브가 빠진 걸 발견하기까지 62분 여 동안 시간적 공백이 있었던 셈이다. 14일 0시 40분에 튜브가 빠진 걸 '발견' 했으니 실제로 튜브가 빠진 후 얼마나 시간이 지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는 '사소한' 관리 소홀이다. 그러나 몇 가지 사소함은 결국 한 여인의 죽음을 불러왔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따진다면 스리마일 아일랜드 원전사고와 박주아씨의 죽음은 확실히 '우연의 합작'이다. 그러나 한두 가지도 아니고 무려 네다섯 가지의 우연이 '동시에' 일어난다면 그저 우연만을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소한 우연들이 퍼즐처럼 꿰맞춰져 비극을 불러오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적 오류'가 존재한다. 안전관리 시스템의 오류다.

'우연의 합작'이 불러온 죽음...과연 '우연'일까

스리마일 원전사고 당시 발전소에는 3단계의 안전관리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각 단계에는 사소한 우연으로도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비상 냉각 시스템의 구멍, 수리 중 팻말에 가려진 계기판의 구멍, 압력조절밸브의 구멍. 각각의 구멍이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 위험상황으로 뻗어가는 죽음의 사이클이 완성된 것이다.

박주아씨 사망사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십이지장 천공 발견 후 응급수술에 이르기까지 지체된 약 6시간의 구멍이 중환자실 관리 소홀의 구멍으로 이어졌고, 호흡기 튜브라는 구멍과 연결되며 박주아씨를 죽음의 사이클로 몰아넣었다.

이 '죽음의 사이클'은 비단 박주아씨 사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일단 오류를 가진 시스템 속에서는 그 누구라도 목을 졸릴 수 있다. 박주아씨 사례는 특수한 케이스가 아니다. 다만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의 사이클을 경고한 '적신호등'일 뿐이다.

생전 박주아씨가 치료받은 병원은 신촌세브란스, 2007년 국내 최초로 '환자안전관리에 관한 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JCI)의 인증'을 받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관리 소홀에 의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은 인증 여부와 상관없이 병원의 실제 시스템이 심각한 오류를 품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병원 측에서는 박주아씨 사망에 관해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이제 박주아씨 사망사고를 '스위스 치즈' 사고라고 하자. 작은 구멍들로 가득한 스위스 치즈 덩어리 속에서, 여러 개의 구멍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 치즈는 속이 뻥 뚫린 결함을 갖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스템 속에 산재한 여러 위험요소들이 하나로 집결되는 순간 치명적인 안전공백이 생겨나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박주아씨 사례가 환자관리체계상 작은 구멍 여러 개가 모인 것이라면 다음에 소개할 사례는 비교적 큼직한 구멍이다. 작년에 발생한 정종현(당시 8세)군의 '빈크리스틴' 사망사고다.

구멍이 숭숭 뚫린 '스위스 치즈'는 허술한 시스템의 위험을 경고할 때 흔히 쓰이는 비유다.
 구멍이 숭숭 뚫린 '스위스 치즈'는 허술한 시스템의 위험을 경고할 때 흔히 쓰이는 비유다.
ⓒ 이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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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의사의 잘못된 약물 투여로 사망한 고 정종현군

당시 종현군은 '급성림프모구성백혈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완치율 90% 이상인 희망적 유형이었다. 어려운 골수이식 대신 항암치료만으로도 충분히 완치를 기대할 수 있었다. 사고는 유지 항암치료 12사이클 중 마지막 단계인 12차에서 일어났다.

사고가 있었던 날 늦은 10시, 종현군은 경북대병원 소아과병동 처치실에서 항암제 '시타라빈'과 '빈크리스틴'을 주사받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담당의는 1년차 레지던트였다. 종현군의 부모는 레지던트가 실수로 두 항암제를 바꾸어 투여했다고 주장한다.

'시타라빈'과 '빈크리스틴'은 모두 항암제에 속하지만 투여방법은 각각 다르다. '시타라빈'은 척수강내 투여로, 척추뼈 사이에 주사한다. 반면 '빈크리스틴'은 정맥내 투여로, 쇄골 밑에 있는 정맥에 주사한다. 문제는 두 약이 바뀌었을 경우이다. 만약 '빈크리스틴'이 실수로 척수강에 주사될 경우 중추신경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고 환자를 사망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

종현군은 항암제 투여 후 엉덩이를 잡아 뜯는 듯한 통증과 극심한 두통을 호소했다. 마약성 진통제까지 투여해야 할 정도였다. 이후 다리부터 마비 증상이 시작되어 차츰 상반신까지 퍼져나갔다. 이는 관련 논문(<우발적 뇌척수강 내 빈크리스틴(Vincristine) 주입에 의한 뇌척수신경병증>)에 기재된 빈크리스틴의 척수강 내 주입 증상과 동일하다. 그러나 병원 측은 여전히 '빈크리스틴' 투여 과정에서 실수는 없었다는 입장이다.

대한병원협회에서는 빈크리스틴을 주사할 때 피해 예방법으로 ▲ 투여 전 의사와 전문 간호사의 이중확인 ▲ 숙달된 의사의 투여와 투여현장에 경험 있는 간호사의 배석 ▲ 빈크리스틴 약제와 혼동할 수 있는 약제를 함께 운반하지 않을 것 ▲ 투여 직전 의사와 간호사의 최종 확인 등을 권고한다.

만약 종현군이 항암제를 투여받기 전 이 중 하나의 절차라도 거쳤더라면 잘못된 약물 투여로 인한 사망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안전 관리체계는 위의 절차들을 의무화하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절대적 안전공백', 즉 위험을 예방할 수 없는 '거대한 시스템적 구멍'이라고 할 수 있다.

건강하던 정종현군의 모습(왼쪽)과 사망 당시의 모습(오른쪽)
 건강하던 정종현군의 모습(왼쪽)과 사망 당시의 모습(오른쪽)
ⓒ 한국환자단체연합회/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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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사이클', '구멍'을 막아라

고 정종현군과 박주아씨의 유족들은 현재 각각 보도자료를 통해 성명을 낸 상태다. 성명서가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사항은 정부 차원에서 시행하는 환자안전 관리체계 점검이다. 개인은 병원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약자이므로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만이 국민들의 불안과 위험을 덜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다시 '스위스 치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마트에서 치즈 속을 들여다보고 살 수 없듯, 구멍 뚫린 시스템의 오류는 쉽게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허술한 관리시스템이 우연히 맞춰져 작동하는 순간 시스템 속 개인은 치명적인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누구라도 이 '불운한 우연'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사이클'을 끊어내기 위해선 이 '불운한 우연'을 만들어내는 '시스템 속 구멍'부터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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