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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22일 낮 12시 15분]

신임 소방방재청장으로 선임된 이기환 차장과 경질된 박연수 청장
 신임 소방방재청장으로 선임된 이기환 차장과 경질된 박연수 청장
ⓒ 소방방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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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는 21일 '화재와의 전쟁'을 독려하던 박연수 소방방재청장을 경질하고 이기환 소방방재청 차장을 후임 청장으로 내정해 발표했다. 일선 소방서장에 의해 화재와의 전쟁이 통계조작 사기극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지 보름여 만의 일이다.

신임 이기환 청장은 소방간부후보생 제2기 출신으로 대구광역시 중부소방서장, 소방방재청 소방정책국장,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장 등을 역임한 전문 소방 관료다.

"끝까지 자기 책임 떠넘기려다가 밀려난 겁니다. 소방 조직이 내분으로 어수선해지니 청와대에서도 불안했나보죠. 아무튼 소방현장을 아는 소방관 출신이 청장이 돼서 현장은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소방방재청장의 교체 사실이 알려진 21일 오전 한 일선 소방관계자는 현장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박 청장이 허위와 통계 조작을 성과라고 내세웠던 것은 더 좋은 자리를 욕심내기 위한 방편이었을 텐데, 진실이 드러나면서 도리어 부메랑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18일 돌연 사표를 냈던 이기환 차장이 후임 청장으로 내정된 것에 대해 "본청 고위직들 통해서 알아봤더니 박 청장이 물러나기 싫어서 차장에게 책임을 미루고 대신 사퇴시키려했던 것"이라면서 "하지만 상황이 안 좋아지니까 소방관 출신 수장을 요구하는 현장의 목소리를 임명권자가 들어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현직 교수로 있는 소방 전문가에게 제안이 갔으나 그분이 고사해 내부승진을 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덧붙였다.

허위 보고와 통계 조작을 성과로 내세우다 부메랑

박연수 소방청장 퇴진과 류충 서장의 양심선언을 지지하며 소방관들이 소방방재청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
 박연수 소방청장 퇴진과 류충 서장의 양심선언을 지지하며 소방관들이 소방방재청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
ⓒ 소방방재청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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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만 해도 '화재와의 전쟁'은 소방방재청장의 중요한 업적이었다. 철저한 예방 활동을 통해 화재 건수와 사망자수가 줄었다고 홍보했고,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자찬했다. 일부 언론은 자신들도 공동 기획으로 참여했다며 성과를 알리기에 분주했다.

그러나 이 성과가 사실과는 다르다는 소방관들의 주장이 지난 6월 말 <오마이뉴스>를 통해 처음 보도되면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일선 소방관들은 위에서 성과주의를 압박하다보니 허위 보고와 조작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며, 이는 이명박 정권의 성과주의가 빚어낸 '사기 행정'이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행정관료가 아닌 현장을 아는 소방관 출신이 소방방재청 수장이 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어 지난 7월 6일에는 류충 음성소방서장이 소방방재청 홈페이지 게시판에 '화재와의 전쟁은 소방방재청장의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글을 올리면서 파문이 확산됐다. 류 서장은" 국민을 우롱하는 전시행정이 이뤄지고 있다"면서 소방방재청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후 류 서장은 사표를 제출했으나 소방방재청의 징계 요구에 따라 대기 발령된 상태에서 현재 충북도 소방본부 징계위에 회부된 상태다.

이에 대해 소방방재청은 "업무가 힘들어진 일부 소방관들이 억지 주장을 펴는 것이고 통계 조작이 아니"라고 강변했으나 일선 소방관들의 양심선언은 소방방재청 게시판을 통해 공개적으로 이뤄졌다. 자신의 실명을 내걸고 소방방재청의 주장을 반박했고, 류충 서장을 지지하면서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통계 조작 사례를 직접 제시하기도 했다.

공개적으로 청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글들이 올라오면서 지휘부와 일선 소방관들 간의 내분 양상으로 치달았다. 평소 한산하던 소방방재청 게시판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의 항명성 글이 올라오며 논란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부 소방관들은 소방방재청장 퇴진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계획하기도 했다.

결국 이 같은 여론의 압박이 커지자 정부가 소방방재청장의 교체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와 관련, 소방방재청 대변인실 관계자는 "내부 승진이라 환영하는 분위기"라면서 "청장 대신 용퇴를 선언했던 이기환 차장이 이번에 청장으로 내정된 것은,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보기에 소방방재청을 이끌기에 적합한 분으로 평가했기 때문 아니었겠느냐"고 말했다.

'화재와의 전쟁' 사실상 끝났다

'화재와의 전쟁'을 독려했던 소방방재청의 지휘관 회의
 '화재와의 전쟁'을 독려했던 소방방재청의 지휘관 회의
ⓒ 소방방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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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청장이 내정됨에 따라 통계 조작으로 논란이 됐던 '화재와의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는 것이 일선 소방관들의 의견이다. 양심선언으로 문제를 확대시켜 징계위에 회부돼 있는 류충 서장의 신변 문제에도 전환점이 마련됐다는 전망이 나온다.

소방방재청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화재와의 전쟁'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던 광역자치단체의 한 소방본부장은 "청장 교체는 잘된 일"이라고 평가하고, "화재를 줄이고 피해를 예방하려는 노력하는 것은 소방관들의 기본적인 사명이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평가 요소가 불합리했던 부분과 전쟁이란 표현은 바꿔야 할 부분"이라며 "신임 청장이 잘 판단하실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소방방재청 관계자도 "화재와의 전쟁은 소방정책과에서 담당하는 분야인데, 청장님이 바뀌었으니 변화가 있지 않겠냐"고 예상했다.

서울의 한 소방관은 "신임 청장이 시도 본부장 시절에는 평이 좋았었는데, 본청에 들어가서는 우유부단하게 행동하신 측면이 있다며 소방관 출신이 수장이 된 것은 잘된 일이지만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류충 서장 문제에 대해서는 "잘 풀릴 수 있지 않겠냐"고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지방의 다른 소방관은 "박 청장이 목숨 걸다시피 했던 '화재와의 전쟁'은 이명박 대통령이 추구했던 성과주의에 코드를 맞춘 것인데, 결국 그 폐해가 드러나 경질됐다는 것은 현 정권의 정책에도 문제가 많다는 것을 드러낸 것 아니겠냐"고 꼬집었다.

"한쪽은 고대 인맥 동원, 또 한쪽은 심상찮은 소방관 분위기 전달"


"소방직의 대역전극이다."

청장이 교체된 21일 일선 소방관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들이 흘러나왔다. 일반직에 밀리던 청장 자리를 최초로 소방직이 차지한 데 대한 환호였다. 소방방재청장은 지금까지 일반직 출신 행정 관료들이 맡아왔다. 소방직 출신 수장은 3대 최성룡 청장이 유일했으나 퇴임 후 교수로 있다가 청장이 됐다는 점에서 이기환 청장이 최초의 소방직 출신 수장이라는 게 소방방재청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이번 청장 교체를 내부 갈등의 산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소방방재청 내부적으로 현장에서 일하는 소방직과 행정 업무를 주로 맡는 일반직들 사이에 갈등이 있어 온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대해 소방관들의 모임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 관계자는 "갈등과 반목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본청에 있는 200명 정도의 일반직들이 현장에서 활동하는 3만6000명의 소방관들을 좌지우지 한다는 게 문제가 많은 것 아니냐"며 "이제야 조직이 상식적인 모습을 찾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논란이 된 "'화재와의 전쟁' 통계 조작 실무는 본청에 있는 일반직들이 맡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하고 "책상에 앉아 서류만 만들고 현장과는 동떨어진 지시를 내리다 보니 현장 소방관들 입장에서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이런 구조도 점차 개선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청장 교체 과정에서 일반직과 소방직의 로비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박연수 청장이 통계 조작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대 인맥을 동원했고, 이기환 차장을 압박해 사직서를 내게 만들었다는 것. 그러나 한편에선 소방관 단체들이 행정부 쪽 인사들을 통해 상황의 심각성을 전달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들 덕분에 결과적으로 소방직 출신이 첫 수장을 맡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태그:#화재와의 전쟁, #소방방재청, #소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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