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모든 시민은 기자다. 모든 블로거, 트위터리언, 그리고 페이스북 유저 역시 시민기자다. 이들은 때론 정규군보다 빠르고 깊이가 있다. 기존 문법을 파괴하는 촌철살인과 감각적 글쓰기. 뉴스게릴라들은 하루에도 수차례씩 인터넷 생태계 곳곳에 출몰해 융단폭격을 퍼부으며 의제를 설정한다. 바야흐로 시민기자 전성시대다. 김병기 뉴스게릴라본부장(편집국장)이 곳곳에서 활약중인 시민기자들을 만났다. [편집자말]
장태욱-장진주  시민기자.
▲ 아버지와 딸이 나란히 장태욱-장진주 시민기자.
ⓒ 오마이뉴스

관련사진보기


"신기하다. 웃기네. (손가락을 독수리 발톱처럼 들어보이며) 어떻게 손가락 네 개로 치지? 뭔 소리가 그렇게 요란해요. 헤-헤-"

3년차 시민기자는 내가 자판을 두드리는 모습이 황당했던 모양이다. 노트북에 연신 코를 박고 웃고 난리다. 빗속을 질주하는 자동차 안에서의 딱딱한 인터뷰. 독수리 타법에 적극 호응하는 어린 시민기자 덕분에 분위기는 좋다. 유머가 빵점인 내가 누군가를 유쾌하게 해줄 수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후두둑거리며 차창에 부딪치는 굵은 빗방울, 그 소리에 지지 않으려고 난 네 손가락으로 자판을 더 세게 두드렸다.  

최연소 시민기자의 '미운 아빠'

장진주 손글씨
 장진주 손글씨
ⓒ 오마이뉴스

관련사진보기

지난달 25일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1박 2일 참가차 제주 시민기자들과 함께 숙소에서 묵고 다음날 제주 강정마을로 가는 차에 동승한 장진주(11)양. 가장 나이가 적은 시민기자로 지난해 한글날 손글씨로 <오마이뉴스> 로고를 쓰기도 했다. 9살 때 시민기자로 등록한 뒤 기사를 2개 밖에 쓰지 못했다는 장양은 "억지로는 아니지만, 아빠가 쓰라고 해서…"라고 말끝을 흐렸다. 극성스런(?) 시민기자 아빠를 둔 탓이다. 그래서 한 번에 두명의 시민기자와 대화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기다.   

새벽까지 기사를 쓰기 때문에 장양과 놀아줄 시간이 없는 '미운 아빠'를 소개하기에 앞서 아래 1분짜리 동영상을 봐주길 바란다. 만약 그가 편집국장이라면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방송뉴스 콘셉트의 동영상이다. 인터뷰 중에 그가 이런 바람을 내비쳐서 즉석에서 직접 해보라고 했다.

태풍이 몰아치는 날이면 방송 뉴스의 화면에 비추곤 하던 판에 박힌 우비 리포터와는 달리 소금기를 흠뻑 머금은 제주의 바다 향기가 물씬 풍긴다.    

▲ 장태욱 시민기자의 "제주 강정마을 리포트"
ⓒ 오마이TV

관련영상보기


밀감을 재배하는 농사꾼 시민기자 장태욱씨. 아니, 지금은 제주 강정마을 전문기자 장태욱씨다. 하루에도 수차례씩 핸드폰에 문자로 꽂히는 강정마을의 다급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제주에 상근기자를 특파하지 못해 찜찜했다. 지금은 강정마을 주민이 된 문정현 신부님의 호통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그런데 잠시 후 나의 죄책감을 들춰내는 문자 대부분이 생생한 기사가 되어 <오마이뉴스>에 올라왔다. 역시, 장 기자! 그래서 그가 더욱 고마웠고 꼭 한번 만나고 싶었다.

'강정마을을 취재하는 장태욱 시민기자를 동행취재해 보자'. 시민기자 1박2일 행사차 제주도에 내려오면서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다.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고서는 그와 만나기 어려운 환경인데, 마침 행사가 있고 강정마을이라는 현안도 챙길 수 있다.

기사 제목 잡을 때는 안 돌아가는 머리가 이럴 때 보면 그럭저럭 쓸 만하다고 자족하면서 두 명의 시민기자와 함께 강정마을로 향했다.

강정마을에 도통한 시민기자의 아름다운 '외도'

그런데 아뿔싸! 태풍 메아리까지 예측하진 못했다. 강정마을에 도착해 차 문을 열고 나갔다가 날아가는 줄 알았다. 비바람이 강하게 몰아쳤다. 우산 두 개가 뒤집혔다. 운동화는 온통 진흙투성이고, 천막 바깥으로 나가면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강정마을의 전쟁같은 상황을 취재하는 시민기자를 동행취재하려 했는데, 태풍과 맞장을 떠야할 판이다. 잠시 정신줄 놓은 나에게 장 기자가 한마디 툭 던졌다.

"강정마을에 모처럼 평화가 찾아왔수다."

헉! 장 기자, 이건 뭥미? 도통한 것 아닌가?

"여기는 매일매일 전쟁터다. 바다 쪽에서 기지를 짓기 위해 측량하려는 해군들과 싸우고, 업자들의 트럭 밑에 들어가 싸운다. 그런데 오늘은 태풍으로 모두 철수했기 때문에 평화스러운 날이다."     

역시! 도통했다. 그런데 그의 이런 경지는 날로 먹은 게 아니다. 그는 감귤 농사도 잠시 접고 강정마을 취재를 위해 한 달 동안 방을 얻어 살기까지 했단다. 주민들과 밥과 술을 섞어 먹으면서 말이다. 심지어 그의 딸인 진주양조차도 10여 차례나 이 곳에 드나들었단다. 이쯤되면 온 몸으로 시를 썼다는 김수영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 아닌가? 이게 바로 시민기자 정신이라고 목놓아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 강정마을에 왜 꽂히셨나?
"해군 기지를 강정마을로 결정하기 전에 화순, 위미에서도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위미는 내 고향이다. 그 곳에서 선배들이 해군 기지를 막으려고 삭발하는 등 분투하는 것을 기사화했다. 두 군데서 퇴짜를 맞은 정부는 비열하고 치사한 방식으로 강정마을에 들어왔다. 유권자가 1500명인데, 80명이 모인 자리에서 수용 결정을 내렸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때의 결정이 주민의 뜻이라고 우기고 있다. 

기존의 언론사들은 국익과 안보, 지역경제를 이야기하면서 허황된 장밋빛 미래만 홍보한다. 이건 언론들이 할 짓이 아니다. 나는 강정마을에서 민주주의와 저널리즘, 주민 생존의 위기를 봤다. 누군가 총대를 메야하는데 전문기자들은 안 보였다. <오마이뉴스>는 상근 취재 인력이 부족하기에 내가 나섰다. 사실 시민기자인 나는 개인적으로 외도하고 있다." 

인터뷰 초입부터 한방 먹었다. 장 기자로 인해 그나마 강정마을의 소식을 독자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안도했는 데, 내 얕은 속을 들킨 것이다. 혹시나해서 추가질문했다. 곧바로 '확인사살' 들어왔다. 
     
- 외도하고 있다니요?
"시민기자가 현안을 쫒다 보면 생업과 충돌한다. 가령 장마철이어서 병충해가 기승을 부리는데 밭에 못나가면 생활이 어려워진다. 생업을 돌보다 보면 시간이 부족하다. 아침에 취재한 기사를 낮에 쓰면 좋은데 새벽에 쓰고 다음날 늦잠잔다. 생활 패턴이 불규칙해지는 것이다.

이뿐인가? 이곳에서는 나를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로 여긴다. 지역 주민들과 활동가들은 내가 보이지 않으면 '<오마이뉴스>가 강정마을에서 손을 뗀 거냐'라고 묻기도 했다. 할 수 없이 나서는 때도 있는데 시민기자들은 정보 접근성이 취약하기에 취재 시간이 배로 든다. 내 판단으로는 현안의 경우 상근기자들이 주도하고 나머지 여백을 시민기자들이 자신만의 시각으로 채워나가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제주도에서 활동하는 장태욱 시민기자
 제주도에서 활동하는 장태욱 시민기자
ⓒ 최지용

관련사진보기


'델몬트 최민식'에게 한방 먹인 뒤에...

사실 2003년에 <오마이뉴스> 기자회원에 가입하고 2년 뒤인 2005년에 쓴 그의 첫 기사는 '나의 생명이야기'라는 서평이었다. 기초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자연과 주변에 대한 경외감을 가져야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인상적인 그의 기사는 2006년 2월에 쓴 "귤 농사꾼이 '텔몬트' 최민식에게"라는 제목의 글. 이 역시 현안을 쫓기보다는 자신의 위치에서 상근기자들의 여백을 채우는 기사였다.

"당시 영화인들이 스크린 쿼터를 축소하는 데 반대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 한미FTA로 인해 우리 농업도 불리한 상황이다. 영화인들이 보인 태도에서 자신에 대한 성찰이 빠졌다고 봤다. 그래서 최민식씨가 델몬트 광고를 찍은 것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자성을 통해 농민들과 교감해야 한다고 봤다."

- 그 기사가 나간 뒤에 최민식씨가 반응했나?
"<한겨레 21>에서 최민식씨의 대담 기사가 나왔는 데 '농민들의 어려운 싸움을 이해한다'는 말을 했다. 그걸 전면에 배치한 그 인터넷 언론사(오마이뉴스)의 의도는 불쾌하다고 했지만. 그 뒤에 최민식씨가 광화문 농민집회에서 큰 절하고 사과했다. 물론 나는 후속 기사를 썼다. '그 태도를 존중하는데, 연기가 아니길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다."

- 당시 최민식씨의 반응을 보고 기분은 어땠나?
"언론 환경이 바뀌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시민들이 언론의 주체로 설 수 있겠다는 것, 그리고 <오마이뉴스>의 매체 영향력이 작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혹시 도통한 장 기자가 내 속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속보이는 질문에 내가 원하는 답변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시민기자를 만나다'라는 기획 인터뷰는 11년 전 <오마이뉴스>가 창간하면서 내세웠던 창간 모토가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측면도 있다. 제주도 비행기 값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 노골적으로 물었다.  

- 첫 기사를 출고한 뒤로 따지면 시민기자 6년차이다. 시민기자는 어떤 점에서 매력적인가?
"사회적 감시자 역할을 확실히 할 수 있다. 주변의 일상 속에서 많은 모순을 느끼고 발견하는 데 그때마다 소시민의 입장에서 기자의 입장(감시자의 입장)으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공익적 감시자 역할을 했을 때 보람을 느낀다. 또 그동안 언론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서민들의 사는 이야기도 기사화될 수 있고, 이를 매개로 서민들끼리 소통하는 것도 좋다."

- 그럼에도 시간을 많이 빼앗길 텐데, 아내로부터 면박을 당하지는 않는가?
"아직까지는 언론탄압은 받지 않고 있다. 내가 술먹고 늦은 것이 아니기에. 아내는 많이 양해하는 편이다."

인터뷰 분위기가 점점 모범답안처럼 흐르고 있다고 느낀 순간, 진주양이 짓굳게 웃으면서 또다시 구세주로 나섰다.

"나는 아빠한테 잔소리해요. 그만 쓰라고. 컴퓨터를 독점하니까 그렇죠. 자기만 인터넷 다 쓰고. 아빠가 미워요. 난 1시간을 쓰고 기사로 올렸는 데, 아빠는 30분만 쓰고 나보다 원고료를 더 많이 가져가요.(웃음)"

"이런 마을을 뒤집을 순 없다"

분위기는 잠시 반전됐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마냥 가벼울 수 없는 인터뷰다. 결국 화제는 강정마을로 되돌아왔다.  

- 강정마을이라는 현안을 취재하는 데 많은 한계를 느낀다고 했는 데 아직도 계속하는 이유는?
"상근기자의 여백만 메우려고 했는데, 그 여백이 너무 컸다. 가령 언론사들은 올레길을 그렇게 크게 보도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생존 문제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 실망감 때문에 여백을 채우다가 지금은 아예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 가령 주민 생존권이 어떻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인지?
"고향 위미는 강정마을보다는 좀 떨어지지만 아름다운 해안선을 갖고 있다. 독특한 지형과 생태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또 겨울에 난방을 하지 않아도 좋은 품질의 농산물이 생산된다. 국내 최상급의 백합단지이기도 하다. 일본에 수출해서 외화도 많이 번다.

강정마을도 그렇다. 이 마을 부회장은 1000평의 땅에서 딸기 농사를 하는데 지난 2009년 한해 동안 5천만원의 소득을 올렸다고 했다. 이번에 다른 분들에게 물어보니 1억원을 벌었다고 한다. 이걸 다 밀어서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 장태욱 기자의 눈에 비친 강정마을은 어떤 곳인가?
"제주도에서 연중 맑은 물이 하천으로 흘러드는 마을이 별로 없다. 그런데 강정에는 흐른다. 또 이곳은 그 흔한 연립주택도 없이 제주도의 전통적 생활을 유지하는 마을이다. 곽재구 시인의 <포구 기행>이란 책을 보면 강정마을 돌담에서는 잠시 길을 잃어도 행복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이런 마을을 뒤집을 수는 없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취재데스크의 지시에 따라 비행기를 타고 외지에서 날아온 기자가 아니라 강정마을의 역사와 환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민기자이기에 이런 행동이 가능한 게 하닐까 하는. 하지만 이 말을 그에게 전하지는 않았다. 생업을 가진 그에게는 너무 가혹할 수 있고, 나에게는 너무 속보이는 면피성 질문일 수도 있기에.  

그는 고향인 위미에서 2200여평의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가업을 잇고 있지만, 잠시 가세가 기울어서 농지를 팔았다가 지난 2008년 아내와 함께 다시 농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감귤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강정마을에서 평화농사를 짓고 있다. 매일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에 일주일에 5개 정도의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것 역시 감귤농사만큼 쉽지 않다고 한다. 기사 한 개를 쓰는데 투여되는 시간은 5시간 정도. 2시간여 동안 취재를 하고, 농사 일을 한 뒤에 집에 돌아와 3시간여 동안 사진을 편집하고 기사를 다 마무리하면 새벽이란다. 또 방송사, 신문사 등에서 취재를 오면 안내하는 역할도 한단다. 그야말로 1인 다역이다.   

"오마이뉴스에서 주는 원고료는 기름값도 안 된다. 그런데 이게 내 취미활동이다. 돈 받고 놀러다니는 거다(웃음). 이 좋은 일을 내가 왜 그만두나? <오마이뉴스>에서 받은 원고료는 사회단체 후원금이나 도서구입비로 쓴다."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장태욱 시민기자와 <오마이뉴스> 김병기 뉴스게릴라 본부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장태욱 시민기자와 <오마이뉴스> 김병기 뉴스게릴라 본부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최지용

관련사진보기


그의 외도는 멈추지 않는다

- 마지막으로 시민기자들을 포함해 <오마이뉴스> 식구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오마이뉴스가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004년 행정수도 무산됐을 때 도올 김용옥 선생의 기사에 자발적 원고료가 3000만원이 쌓였다. 그 때 도올 선생이 '우리 사회에 <중앙일보>에서 퇴짜맞은 글을 실어줄 수 있는 <오마이뉴스>같은 매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저도 그와 비슷한 마음이다. 서울과 멀리 떨어진 제주도라는 지역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고, 제 기사를 실어주는 매체가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

결국, 장 기자의 마무리 발언이 이 인터뷰를 살렸다. 너무 노골적으로 자화자찬하는 것같아서 위의 멘트를 독자들에게 전달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으나, 그의 말에 진정성과 절실함이 배어있었다.

그는 단순히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었다. 여백만을 채우려고 했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민참여 저널리즘이라는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닐까?

참고로, 얼마 전부터 이주빈 상근 취재기자를 제주도 강정마을에 특파했다. 하지만 장태욱씨의  아름다운 '외도'는 강정마을에 평화가 찾아올 때까지 멈출 것 같지 않다.

* '당신도 지금 원 클릭으로 기자가 될 수 있습니다.' ☞ 시민기자 가입하기

덧붙이는 글 | 이번 인터뷰하는 데 전재홍 시민기자(제주 토지닷컴 대표)가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자동차 운전과 강정마을을 안내해주신 전 기자님께도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태그:#시민기자, #장태욱, #강정마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환경과 사람에 관심이 많은 오마이뉴스 기자입니다. 10만인클럽에 가입해서 응원해주세요^^ http://omn.kr/acj7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