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운대>의 한 장면. '골 때리는' 야구팬으로 나온 배우 설경구와 직접 영화에 출연한 롯데의 이대호 선수.

영화 <해운대>의 한 장면. '골 때리는' 야구팬으로 나온 배우 설경구와 직접 영화에 출연한 롯데의 이대호 선수. ⓒ (주)JK FILM


'월요일이 싫다. 비가 오는 날도 싫다. 하지만 비가 오는 월요일은 괜찮다'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야구팬임이 분명하다. 7월 14일 비가 오는 목요일, 하늘을 원망하는 야구팬들이 모여 술잔 기울이는 소리가 들린다. 야구는 일상의 스포츠다. 4월부터 9월까지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 저녁에는 어김없이 야구가 시작된다. 2010년을 기준으로 평균 게임시간은 3시간 7분. 야구팬들은 늦은 봄부터 가을까지 저녁시간을 늘 야구와 함께한다.

그날의 성적에 따라 혹은 그 주의 성적에 따라 기분은 하늘까지 올라가기도 땅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평온한 일상을 살고 싶다며 '야구를 끊어야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끊을 수 없는 것이 야구다. 일상의 스포츠이니만큼 아침부터 생각하는 것이 야구다. 경기는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도 여타 야구팬들과 다르지 않았다. 야구에 대한 열망이 나날이 높아만 갔다. 하루에 기본 3시간을 꼬박 갖다바치는 것으로 모자라 그들과 더 가까이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휴학을 계획함과 동시에 야구장 아르바이트를 찾아서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는 휴학을 하기까지 6개월이나 남은 시점이었다. 행여나 내가 모르는 사이에 모집 소식이 올라오지 않을까 즐겨찾기에 알바구인 사이트를 등록해놓고 들락거렸다.

고시 합격보다 더 기뻤던 야구장 알바 취직 

그리고 마침내 2010년 3월, 잠실야구장에 아르바이트생으로 당당히 '입성'했다. 그깟 알바가 뭐라고, 누가 보면 고시라도 합격한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야구에 대한 나의 열정은 그것을 고시합격 이상의 기쁨을 가져다 주도록 만들었다.

그곳에서 내가 하는 일은 중앙석에서 연간회원에게 음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한 시즌 중 대략 60경기쯤 되는 홈경기를 중앙석에서 관람하는 연간회원들은 고가의 시즌권을 구입한 사람들이다. 때문에 야구장의 입장에서 이러한 'VIP' 고객들을 잘 관리하는 것은 중요하다.

야구장에서 일하며 수많은 야구팬들을 만났다. 그들은 이미 '야구팬'을 넘어서 '야구인'이되어 있었다. 어느덧 두 시즌째, 그곳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일들은 휴학기간이 끝난 후에도 내가 여전히 그 일을 하게 만는 원동력이다.

 두산 베어스 마스코트 '철웅이'의 탈을 벗겨 직접 써보다. 야구장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감히 탈을 벗어보라 말할 수 있었을까?

두산 베어스 마스코트 '철웅이'의 탈을 벗겨 직접 써보다. 야구장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감히 탈을 벗어보라 말할 수 있었을까? ⓒ 강혜란

사실 할 수만 있다면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일하고 싶었다. 경남 출신의 유학생인 나는 아빠와 함께 롯데를 응원하던 롯데팬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알바를 하자고 부산으로 갈 수 없었다. 차선으로 잠실야구장을 택했다. 두산 베어스에도 이종욱, 김선우와 같이 내가 좋아하는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하는 틈틈이 야구를 구경할 수 있는 일자리는 정말 최상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하지만 남 모를 고충이 뒤따랐다. 롯데가 원정경기를 올 때마다 반가움과 함께 걱정을 품어야만 했다. 롯데가 이기는 것은 좋은데 울상인 두산팬들을 보면서 표정관리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두산 유니폼을 입고 롯데를 응원하는 일은 역적이 되는 일과도 같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한 시즌을 억지로 웃어가며 잘 버텼다. 그런데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했던가. 일은 시즌의 끝자락에서 터졌다.

때는 2010년 9월 30일 두산과 롯데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 연장 10회 1-1로 맞선 상황에서 롯데 이대호의 3점 홈런이 터졌다. 그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만세를 불렀다. 패넌트레이스도 아닌 준플레이오프에서, 가뜩이나 두산은 1차전에서 패배했었다. 긴장감 넘치는 그곳에서 나는 아무도 반기지 않을 환호를 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만천하에 롯데팬임을 인증받았고 팀장님께 꾸지람 아닌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올해는 맘 편하게 롯데팬임을 떠벌리고 다니는 중이다. 같이 윈윈하자며 "롯데도 파이팅, 두산도 파이팅"을 외친다. '롯데팬이 롯데팬이라 말하지 못하는 이 더러운 세상아'를 속으로 외치며 울분을 삼키던 작년을 떠올리니 웃음이 난다.

'모태야빠'와 "야구가 싫다"는 야구기자...야구장에서 만난 이들

처음에는 야구를 보기 위해 야구장 일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니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야구장에 출근하게 됐다. 야구장에서 가장 먼저 친해진 이는 4살 짜리 꼬마였다. 아이의 이름은 홍주원. 최연소 연간회원이다. 주원이의 엄마, 아빠는 연애할 적부터 야구를 보러다닌 열혈팬이었고, 아이는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야구를 겪었다.

"주원이는 롯데팬이에요. 엄마 아빠가 두산팬인데 혼자만 배신했어요. 그렇지 주원아?"
"어라? 왜 주원이는 롯데팬이에요?"

사연인 즉슨, 베이징올림픽이 열렸던 2008년 주원이 엄마는 뱃속에 주원이를 품은 채 야구를 보기 위해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한창 경기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배를 발로 차더란다. 그때가 마침 롯데 소속의 이대호 선수가 나오고 이대호 선수의 응원가가 울려퍼지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원이가 태어난 뒤에도 걸음마도 하지 못하던 아주 어릴 적부터 이대호 선수만 타석에 서면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깜빡이는 등 반응을 보였단다.

주원이의 앞날이 기대된다. 엄마 뱃속의 기억을 가지고 롯데팬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엄마, 아빠의 뜻을 따라 두산팬이 될 것인가. 몇 년 후 야구장에서 주원이를 보게 된다면 이 아이는 어떤 팀의 유니폼을 입고 있을까?

 영화 <글러브>의 한 장면. 청각장애 학생들로 이루어진 충주성심학교 야구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야구가 종종 인생에 비견되는 것은, 이들이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꿈', '희망', '도전', '감동'과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 아닐까.

영화 <글러브>의 한 장면. 청각장애 학생들로 이루어진 충주성심학교 야구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야구가 종종 인생에 비견되는 것은, 이들이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꿈', '희망', '도전', '감동'과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 아닐까. ⓒ 시네마서비스


일을 하다보면 야구팬뿐만 아니라 수많은 야구기자들을 만난다. 볼 때마다 늘 궁금했다. 저 기자님은 어느 팀을 응원하실까,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패배하는데도 태연히 '객관적인' 기사를 쓸 수 있을까. 그래서 하루는, 직접 물었다.

"기자님은 어느 팀 팬이세요?"
"에이, 그런 거 없어."
"어디 가서 소문내지 않을게요. 가르쳐주세요~."

그런데 하나같이 좋아하는 팀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뿐만 아니라 야구가 싫다는 이도 있었다! 처음엔 일부러 숨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기자는 언제나 객관성을 가지고 기사를 써야 하기 때문에 응원 팀을 밝히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 그토록 좋아했던 야구가 싫어질 수 있다니….

몇 년 전의 나를 생각하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나도 지금은 야구가 지겨워질 때가 있다. 사실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그것이 일이 되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이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야구는 게임 종료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스포츠. 행여 연장전이라도 갈라치면 설령 롯데의 경기라 하더라도 짜증이 난다. 1년쯤 지나고 보니 이젠 '빨리 이기는 팀이 우리 팀' 하고 생각하게 된다. 하물며 몇 년을 야구'만' 보고 사는 기자들이야 오죽하랴.

그래도 결국은 야구를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에이 확 져버리고 일찍 끝나라' 싶다가도 안타라도 하나 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색이 바뀐다. 기자들도 응원하는(혹은 과거에 응원했던) 팀이 이길 때면 일의 고단함은 잊은 채 웃고 있다. 그리고 기자들은 그렇게 싫다고 하더니 휴가를 받아 야구장을 찾는다.

"어? 오늘은 카메라 안 들고 오셨네요? 아 참, 휴가라고 하셨잖아요?"
"어휴, 그래도 뭐…."

애증의 야구, 하지만 미움보다 사랑이 더 큰 것임은 분명하다.

야구도, 인생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야구팬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미국 메이저리그의 유명한 야구선수 요기 베라의 명언이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프로야구 관중 수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작년에 500만 명을 넘긴 데 이어 올해는 600만 고지가 벌써 눈앞이다. '야빠'들이 점점 늘어난다. 야구의 가장 큰 매력은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는, 언제든 역전이 가능한 스포츠라는 것이다. 9회 말 2아웃에서 뒤지고 있다가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야구. 그 짜릿함이 사람들을 야구장으로 끌어모은다. 결국은 나도 그 맛에 여태껏 야구장에서 일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인생에서 역전의 순간을 꿈꾼다. 그러나 그 상상을 현실로 이루기는 쉽지 않다. 그 아쉬움을 한 번이라도 느껴본 적이 있다면 야구판에서 대리만족해보는 것도 좋겠다. 야구팬이 되어 야구를 즐기다보면, 매번은 아니더라도 한번씩 찾아오는 역전의 순간을, 그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쉬는 날 야구장을 찾아 스트레스를 날려보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닌' 야구와 당신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덧붙이는 글 강혜란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기자단 '오마이프리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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